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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어냄으로써 영원히 남기고자 한 조선 - 실록 세초와 세초연

- 전근대 기록문화 다시, 깊이보기-

2026.01.29 | 조회 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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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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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지움'으로 완성되는 실록의 역설

 조선 왕조의 실록 편찬은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고 후대에 이를 전달하는 성스러운 과업이었다. 실록의 여정은 도성의 서북문인 창의문(彰義門) 너머 홍제천의 너른 바위, ‘차일암(遮日巖)’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이곳은 종이에 먹으로 쓰인 글자를 씻어내는 세초(洗草)를 통해 사관의 사초가 공적인 역사가 되는 즉, 실록 편찬의 마침표를 찍는 경계의 공간이다.

 실록 편찬 과정에서 축적된 기록들은 편찬이 완료되면 물에 씻어 지우는 작업인 세초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세초는 1차 자료인 기록물을 폐기하는 절차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단순한 행정 절차를 넘어 국가적 기억을 확정하는 최종 승인의 과정이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실록 편찬이라는 복잡한 과정에 내재된 기록 철학과,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남기고자 했던 세초의 의례적 의미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국가 대업의 실행: 실록의 편찬, 사초에서 실록으로

 조선의 실록 편찬은 실록청(實錄廳)이라는 임시 기구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도청과 각 방()의 유기적인 분업 체계 아래 산절청, 찬수청, 교정청 등이 설치되어 체계적으로 편찬 업무를 분담했다. 사관의 사초, 춘추관의 시정기, 승정원일기 등 방대한 1차 자료가 실록청으로 집결되면서 비로소 역사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자료 수집 후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산절(刪節)은 불필요한 내용을 정리하여 찬수의 효율을 높이는 기초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춘추관 시정기는 주필(朱筆)로 지워 내용을 추렸고, 편찬 후 승정원에 반납해야 하는 승정원일기에는 부표(附票)를 붙여 원본을 보존하면서 필요한 기사를 선별하였다. 이후 등록낭청이 산절의 결과물을 등서하여 '출초(出草)'를 만들면, 이를 바탕으로 각사 문서 등의 자료를 보완하여 초초(初草)'를 작성한다. 이어 초초를 교정하여 '중초(中草)'를 완성하고, 이를 다시 대분판에 정서(正書)하여 실록 인출의 저본으로 삼는다.

 그다음 인쇄 단계에서는 정본 제작에 앞서 두 차례의 시험 인쇄를 거친다. 1차인 초견인출과 2차인 재견인출을 통해 오자와 흠결을 낱낱이 살핀 후, 비로소 최종적인 실록의 정본이 인출된다. 이렇게 완성된 실록을 사고(史庫)에 봉안하고 몇 가지 의례를 거치면 비로소 한 임금의 시대는 공식적인 역사가 되어 봉인된다.

 

세초와 세초연의 시행과 기록의 성소, 차일암

 실록이 사고에 봉안되는 날, 편찬의 기초가 되었던 방대한 자료들은 비로소 세초(洗草)의 대상이 된다. 산절된 시정기부터 초초와 중초, 그리고 교정용 인출본인 초견·재견인출본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들은 가자(架子, 물건을 실어 옮기는 들것의 일종)에 실려 붉은 보자기와 붉은 줄로 엄격히 묶인 채 세초 전까지 춘추관 사고에 임시로 보관된다. 세초 당일이 되면 책장(冊匠)과 지장(紙匠)이 기록물을 잘라 망과 공석(空石)에 담고, 이를 대홍(大紅) 보자기로 덮어 인로군의 인도 하에 세초 장소로 옮긴다. 그 종착지는 물길이 맑고 바위가 평평한 창의문 밖 인근 홍제천변의 차일암이었다.

 차일암에서 세초를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주체는 세초군이다. 세초 당일 조지서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초군이 차일암에 와 세초를 진행한다. 세초군이 흐르는 물에 종이를 담가 묵흔을 씻어내면 비로소 세초 작업이 끝난다. 흔히 세초 후 남은 휴지(休紙)는 조지서로 옮겨져 일반적인 재생지로 활용된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엄격했다. 실록청의궤등 기록에 따르면, 재정 부서인 호조(戶曹)의 낭청이 차일암이나 조지서에 대기하고 있다가 세초가 끝난 휴지를 직접 수거하여 호조로 옮겨갔다.

과거 모 드라마에 등장한 세초 장면(실제 세초 방법과 비교하면 굉장히 비역사적인 모습이다)
과거 모 드라마에 등장한 세초 장면
(실제 세초 방법과 비교하면 굉장히 비역사적인 모습이다)

 호조로 옮겨진 종이는 다시 태어난 이후에도 그 활용처가 극히 제한되었다. 실록이라는 중대한 국사를 담았던 매체는 글자가 지워진 후에도 여전히 상징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는 기록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았던 물질인 종이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예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실무인 세초 작업이 마무리되면 차일암은 실무 공간에서 국가 의례의 현장인 세초연의 무대로 변모한다.

 

축소할지언정 폐지할 수 없는 국가 의례, 세초연

 세초가 마무리되면 임금이 편찬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사연(賜宴)이 거행된다. 이는 크게 세초일 며칠 전 의정부에서 열리는 정부연(政府宴)과 세초 당일 차일암에서 열리는 세초연으로 구분된다. 두 연회 모두 임금은 내·외선온(宣醞)을 비롯해 풍성한 음식(사연(賜宴))과 음악(사악(賜樂))을 내림으로써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특히 임금이 내리는 술인 선온은 세초연이라는 의례의 핵심적 위상을 상징했다. 이를 위해 지금의 의전 매뉴얼에 해당하는 의주(儀註)를 작성하여 절차와 순서를 엄격하게 계획하고 시행했다.

 세초연에서 주목할 점은 가뭄 등의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도 이 의례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연과 사악을 생략하여 음식과 음악은 없을지언정, 임금이 내리는 술인 선온만은 반드시 내려졌다. 이는 세초연이 단순한 유흥의 자리가 아니라, 실록 편찬이라는 대업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국가적 기억의 완성을 선포하는 최종적 마침표였기 때문이다.

 정조대 영조실록을 편찬 당시에는 재정개혁의 여파로 세초연에 소요되는 비용 충당이 어려워지자, 사연과 사악은 물론 내외선온 중 내선온을 생략하고 정부연과 세초연 모두 외선온만을 내리는 방식으로 행사를 축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없는 축소조차 임의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근거로 과거시험인 대과와 소과 합격자에게 술을 내리는 방방례(放榜禮)의 사주(賜酒) 제도에서 그 근거를 찾아 명분을 세웠다. 행사를 대폭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반드시 전례에서 근거를 확보해야 했을 만큼, 세초연은 조선 왕조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중대한 국가 의례였음을 반증한다.

 

세초냐 보관이냐, 기록 철학의 충돌

 세초의 당위성은 때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조실록1727(영조 3) 1125일자 기사에 따르면, 숙종실록편찬의 마무리 단계에서 영의정 이광좌와 실록청 당상 윤순 등은 사초의 보존을 강력히 건의한다. 그들은 사초 속에 담긴 사관들의 공정한 말과 강직한 필법을 보존하여 훗날 진실을 규명할 고징(考徵)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록의 증거적 가치를 우선시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인 영조의 판단은 달랐다. 영조는 사초가 지닌 주관적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기록을 남겨둠으로써 발생할 소모적인 시비와 당쟁의 불씨를 경계했다. 영조는 말많은 세상에서 보궐(補闕)의 역사(役事)에서 온갖 힘을 다하였으나 또 세초를 하지 않는다면 분운(紛紜)한 말을 어떻게 진정하겠는가? 세초함이 옳다고 명하며, 세초를 단순한 파기가 아닌 사회적 합의로서의 역사를 확립하기 위한 통치적 결단으로 격상시켰다.

 결국 영조에게 세초는 과거의 갈등을 씻어내고 탕평(蕩平)의 길로 나아가기위한 정치적 매듭이었다. 실록이라는 공적인 정사(正史)를 확정짓는 순간, 그 이면의 사적인 논쟁거리들을 세초를 통해 씻어보냄으로써 평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록의 관리에서 '국가적 기억'의 형성으로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의 기록 생성(사초 작성)과 사회적 기억의 완성(실록 편찬)은 매우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얼핏 현대 기록학의 레코드 컨티뉴엄(Records Continuum) 관점에서 말하는 기록의 생성부터 다원화 단계까지 단절없이 이어지는 연속적 흐름의 원형을 적용할 수 있을 듯도 하다. 사초의 작성에서부터 세초와 봉안에 이르기까지, 기록의 물리적 상태는 변화하고 글자는 지워질지언정 그 속에 담긴 역사의 맥락과 가치는 실록으로 단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차일암의 물길에 씻겨 내려간 것은 검은 먹물이었으나,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역사를 대하는 조선의 지극한 경외심이었다. 지금의 우리가 지녀야 할 기록에 대한 책임과 예우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게 된다. 기록을 '지움'으로써 오히려 영원히 '남기려' 했던 조선의 기록에 대한 경외심과 책임있는 마무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
  • 『영종대왕실록청의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세초연등록』(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오항녕(2003), 실록의 의례성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사학보26.
  • 조계영(2014), 조선후기 실록의 세초 기록물과 절차, 고문서연구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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