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에 입사한 이래로 현재까지, 전문적인 기록물관리 업무 수행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고, 그 공간이 내부 직원들에게 기록관으로 불리기까지 3년이 걸렸다. 하지만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꿈, 항온항습기 설치가 남아있다.
기록물관리전문요원으로 일을 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항온항습기에 집착하게 된 걸까. 오죽하면 기계 담당자가 나를 보기만 해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을까. 그만큼 나는 항온항습기에 진심이었다. 매년 예산계획서에 쓰고 기관장 사업보고, 부서장 면담마다 기록관 내 항온항습기 설치를 요청해왔다.
1. 항온항습기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간절할까
항온항습기가 필요하다는 건 담당자 개인의 생각일까? 전혀 아니다. 기록물관리를 위해서는 항온항습을 통한 기록물 보존이 필수적이다.
'보존(preservation)'이란 기록학용어사전에 의하면, 열화나 손상으로부터 자료를 보호하는 과정으로, 정보를 담고 있는 기록이나 도서류를 보관하기 위한 시설, 인원, 기술 등 관리적인 측면과 재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공공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에는 기록물을 관리하기 위해서 보존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 기준이 명시되어있다. 매년 각 기관에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운영할 때 참고하는 국가기록원의 기록물관리지침에도 기록물의 보존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그 안에 항온항습이 언급되어있다.
2024년 국가기록원 기록물관리지침에 의하면 기록관은 기록물을 안전하게 보존관리하기 위한 시설장비 구축 및 보존환경 유지, 보안대책 및 재난 대비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기적인 환경점검을 통한 최적의 보존환경 유지와 온‧습도 기준에 따른 항온항습 유지를 통한 소장기록물의 훼손 예방과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2. 기록물의 입장에서도 항온항습기가 필요할까.
이처럼 온도, 상대습도 등의 변화가 유기물인 기록의 수명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존환경이 특히 중요하다. 기록물관리기관의 보존시설‧장비 및 환경기준에 따르면 종이기록물 및 행정박물의 최적의 온‧습도는 온도 18~22℃, 습도 45~55%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고 내 공기조화기술을 이용하여 일정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위험부담이 없다. 특히, 기온 변화가 심한 우리나라의 경우 24시간 가동하는 공기조화기기가 더욱 필요하다.
3. 나(기록물관리전문요원)의 입장에서는 항온항습기가 왜이렇게 간절할까.
기록물관리전문요원에게 기록물은 곧 존재의 이유이다.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기록물관리라는 업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록물관리에 대한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는 기관과 달리, 처음 기록물관리라는 업무가 수행되기 시작한 공공기관의 경우에는 항온항습기가 갖는 의미가 조금 더 특별하다.
기록물관리만을 수행하는 공간을 확보하기까지 많은 설득과 계획안이 필요했다. 공간을 확보한 후에는 곧바로 모빌렉을 설치하고 매년 기록물관리기본계획을 세워 이관‧정리‧평가‧폐기‧이용서비스 등을 진행해나갔다.
“휴직 들어가면 없어질 수도 있어, 조직은 원래 그래.” , “필요없으면 없어지는거야.”와 같은 농담이 가볍게 오고갔지만, 나는 절대 가벼이 들을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기록물관리전문요원에게 기록물관리가 없어진다면 존재의 의미가 옅어진다. 기록물과 기록물을 관리할 수 있는 공간을 얻고 지켜내는 것이 곧 기록물과 나를 지킬 방법이었고, 그 최후의 보루이자 강력한 방법이 항온항습기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당장 항온항습기가 없는 환경에서 기록관 내 온습도 조절을 위한 차선책으로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에어컨으로만 관리를 시작했다. 출근하면 에어컨을 켜고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온습도를 체크했지만, 그마저도 중앙제어인 탓에 16시면 에어컨 가동이 중단되어 퇴근 즈음엔 다시 후끈후끈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서 한 단계 변화는 제습기 구매였다. 에어컨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 가장 사고 싶은 제품은 제습기였다.
제습기를 설치한 이후에도 오전,오후 하루 두번 온습도를 체크하며 변화를 살폈다. 에어컨이 꺼지는 16시에도 제습기는 가동이 가능했다. 물이 가득 차면 일시적으로 작동이 멈추고 삑-삑- 소리가 난다는 제습기는 오전에만 두 번씩 물이 가득 찼다는 신호가 들렸다. 에어컨과 제습기만으로 관리되던 3월 한 달간의 기록관은 오히려 습도가 낮아 적정 습도를 맞출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7월의 기록관은 일정한 온습도 유지가 불가능했다. (7월 17일 하루 동안 제습기와 에어컨으로 52%까지 습도를 조절했지만, 18시 이후 작동이 중지되면서 다음날 오전엔 다시 습도가 66.5%로 측정되었다.) 우리 기록관은 9시부터 18시까지만 기록물에게 쾌적한 공간이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어낸 결론은 '우선 항온항습기가 필요하다.'였다. 항온항습기를 위한 여정은 1. 매년 기록물관리에 관한 기본계획 내 핵심과제에 보존시설 구축 명시하기 2. 기록물 이관, 정리, 평가, 폐기 등 업무 수행 및 내부직원 대상 교육을 통한 기록물관리 인식 개선하기 3. 기록관 정수점검을 통한 기록물 상태 점검으로 항온항습이 필요한 근거자료 만들기 4. 매년 예산계획 내 보존환경 개선 예산 제출하기 등이 있었다.
내부적으로 위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던 배경에는 국가기록원과 상위기관의 점검 및 지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은 기관일수록 국가기록원의 지적사항에 따라 매년 예산요구의 근거와 업무 추진력이 생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 국가기록원의 실태점검 결과 지적된 ‘보존서고 공간 부족 및 보존시설 미구축’ 덕분에 차년도 공간 확보를 위한 근거로 사용할 수 있었다. 2023년 국가기록원의 공공기관 컨설팅은 실태점검과 함께 기록관 운영을 위한 규정 제정과 보존시설 개선을 위한 근거로 활용했다. 매년 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 실태점검 공문은 차년도 예산요구서의 근거가 되고, 부서장에게 매년 국가기록원에서 우리기관을 점검하고 있다고 어필할 수 있게 해준다.
기록물의 보존환경은 온도 18~22℃ 습도 45~55%로, 허용차는 정해져 있지만 자체는 고정되어 있다. 기관에서의 나 역시, 기록물관리 업무 이외의 타 업무까지 할 수는 있으나 기록물관리라는 업무는 고정되어야 한다. 항온항습기 설치를 통해 이를 지켜내야 한다. 필자의 기관은 아직 항온항습기가 설치되어있지 않다. 항온항습기에 대한 공감 단계까지는 도달하였으나 여전히 고민과 논의라는 시작단계에 머물러 있다. 기록물관리 초보기관 안에서, 필자의 항온항습기 설치를 위한 여정을 지켜봐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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