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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과 기록의 정치성

군부 쿠데타로 인해 아르헨티나에서 자행된 끔찍한 만행, 그리고 기록.

2024.12.12 | 조회 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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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계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겠다. 며칠 전 현직에 있는 국가기록원장이 계엄 선포 관련 기록물에 대해 발언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언론에서 그는 "정부 전자기록 생산 시스템에 등재된 기록된 것만 '폐기 금지 조치' 대상이므로, 계엄 선포 관련 기록물들은 조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관장급 이상, 특히 정무직 공무원일수록 전자문서보다는 비전자 형태로 대면 보고받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국가 아카이브의 수장이 사실상 계엄 관련 기록물을 관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란 말인가. 관료제의 부작용과 권력에 충실히 복무하는 근대적 아카이브의 속성이 절묘하게 섞이면서 발생하는 그 어처구니 없음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위안이 될 수는 없겠으나, 이러한 국가 권력기관의 불행한 인식 수준은 딱히 국경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한국과 지구 정반대에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에서도 국가기관의 폭력으로 민간인이 무지비하게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이 끔직한 국가 폭력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지난 11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개최한 2024 연구교류 <행동의 아카이브>에서 현장감 있게 들을 수 있었다. 뉴욕대학교의 다이애나 테일러가 퍼포먼스 아카이브에 대해 발표했는데, 바로 아르헨티나에서 자행된 “더러운 전쟁(Dirty War)”에 관한 내용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피해자 규모나 폭력성을 봤을 때 제주 4.3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기록이 권력기관에 의해 어떻게 은폐되었는지, 그리고 반대로 살아남은 기록이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기록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성으로 인해 서로 밀고 당기며 길항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긴장관계를 지닌다. 이러한 기록의 정치학 관점에서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197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익 게릴라 활동이 증가하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부의 억압이 강화되면서 국가 위기가 심화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주도한 페론주의 경제의 실패와 극심한 사회 혼란은 군부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 군부는 페론 대통령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직후 군부는 ‘국가 재조직 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는 미명하에 군부 통치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쿠데타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정권은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해 소위 ‘더러운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비슷한 시기 브라질에서 제일 먼저 1963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집권에 성공하고, 페루에서도 1968년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이어 칠레에서 1973년 피노체트가 등장해 독재정권을 수립해 장기집권했다. 이러한 남미의 반민주주의적 흐름 속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사례는 잔혹성과 참혹함으로 따지면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시민들이 실종되고, 고문, 납치, 살해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 침해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군부 세력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헌법의 제약을 넘어 수시로 포고령을 선포하고 군대, 경찰, 정보기관 등의 국가기관은 물론 ‘아르헨티나 반공동맹’과 같은 극우 무장조직을 동원해 반대 정치세력을 비롯하여 학생, 지식인, 언론인,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납치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그들은 그대로 “실종” 상태가 되었다. 당시 군부정권은 반정부 인사뿐만 아니라 쿠데타의 목적으로 내세운 “가톨리적 정의”와 “반공주의 정의”에 어긋나는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법 연행 및 납치하여 살해했다. 심지어 재산을 강탈하고 영유아를 탈취하여 강제 입양시키는 반인륜적 패륜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숨막히는 공포정치는 피해자 유족의 어머니들이 모여 결성한 "오월어머니회"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자행한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 등 연이은 전쟁의 패배로 독재 정권은 결국 무너지게 된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다이애나 테일러가 발표한 내용 중에도 오월어머니회의 활동이 많이 언급되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퍼포먼스’도 시위와 집회, 철권 통치에 맞선 예술적 활동들이었다.

 

오월어머니회의 집회 모습(출처: 다이애나 테일러 발표자료 중)
오월어머니회의 집회 모습(출처: 다이애나 테일러 발표자료 중)
피해자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실종처리된 부모의 사진을 들고 찍은 사진(출처: 다이애나 테일러 발표 자료 중)
피해자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실종처리된 부모의 사진을 들고 찍은 사진(출처: 다이애나 테일러 발표 자료 중)

아르헨티나 군부는 긴 독재 기간 동안 수많은 기록을 무단 폐기하고 은폐했다. 특히 독재의 종식이 임박하면서 군부는 관련 기록을 감추거나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범죄를 숨기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한국에서도 12.3 내란 시도 이후 방첩사 등 관련 군부대에서 기록 무단폐기가 자행되고 있다는 제보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 역시 범죄자들의 “국룰”인 것 같다.) 다이애나 테일러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기록은 아카이브에서조차 권력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 아키비스트의 입장에서 나는 이 발표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신뢰성을 담보로 국민의 권리를 구제하고 보장해야 할 국가 아카이브에서 희생자의 기록을 삭제한다? 너무나 놀라워 공식 자료를 통해 근거를 찾아 보고자 노력하였으나 확인은 하지 못했다.  

어쨌든 독재가 종식된 후 피해자 유가족과 인권 단체들은 끈질기게 정부의 기록을 발굴하고 공개하여 진실을 밝히고 군사 정권의 책임을 추궁하는 데 기록을 이용했다. 군사 독재 시기 동안 발생한 실종 사건들에 관한 기록은 군부 정권의 잔혹성을 폭로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핵심 도구였다. 당시 독재 정부는 실종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내무부와 군부 내에서는 비밀리에 이들에 대한 명단과 정보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 명단은 정부에서 체포하거나 처형한 사람들의 이름과 정보가 기록된 비밀 문서로, 군사 작전 중 “실종된” 인구 명단(listas de desaparecidos 또는 listas de personas desaparecidas)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고로, 원어에서 “desaparecidos”는 ‘실종된 사람들’을 의미하며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시기에 비밀리에 납치되어 실종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군부 정권에 반대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라는 명목으로 납치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실종(desaparesio)”이나 “실종된 사람들(desaparecidos)”이라는 용어는 거의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다. 이 명단은 독재 종식 후 인권단체들에 의해 발굴되어 실종자들의 존재를 공식화하고 군사 정권의 범죄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법정에서도 군사 정권 요직자들의 인권 침해를 증명하는 핵심 증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기록이 사회 저항의 도구로 활용되어 정치 변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해군기술학교(ESMA: Escuela Superior de Mecánica de la Armada)에 남겨진 문서들이었다. ESMA는 당초 아르헨티나 사관 훈련생들을 위한 군사훈련소였으나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비밀수용소로 운영되었다. 독재 기간 동안 500여 개의 비밀수용소가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이곳은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5천여 명이 불법 납치돼 ESMA를 거쳐갔으며 피해자들은 극심한 고문을 받은 후 공군 비행기에 실려 바다에 산 채로 수장되거나, 살해된 후 공터에 이름 없이 묻힌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수십 명의 임신부가 이 비밀수용소에서 아기를 낳았지만, 산모는 살해되고 아기들은 대부분 불법 입양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이다. 인권단체들은 군부의 불법 행위에 대한 기록을 ESMA에서 발굴함으로써 군부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인권을 침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총 16헥타르 규모인 ESMA는 현재 인권 관련 기관이자 추모관 및 전시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난 202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SMA 전경(출처: Museo Sitio De Momoria ESMA)
ESMA 전경(출처: Museo Sitio De Momoria ESMA)

 

1983년 독재가 완전히 끝난 후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가실종자조사위원회(CONADEP: Comisión Nacional sobre la Desaparición de Personas)’를 설립하여 실종자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CONADEP는 군부가 비밀리에 작성한 문서와 명단을 수집하여 9,000명 이상의 실종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집한 문서들은 피해자 가족들이 제공한 증언과 함께 독재 정권의 만행을 기록한 보고서 형태로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아르헨티나에서 『Nunca Más』(눙카 마스)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군사 정권의 범죄를 폭로하는 결정적 증거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Nunca Más”는 “Never Again”으로, “다시는(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보고서는 군사 정권의 지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가해자들이 저지른 인권 침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했다. 이처럼 기록이 피해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어 기록의 공개와 재해석이 정치 변화와 사회 정의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Nunca Más』 최종 보고서 오리지널 표지[출처: El Litoral]
『Nunca Más』 최종 보고서 오리지널 표지[출처: El Litoral]

한편, 미국은 지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보유하고 있는 ‘더러운 전쟁’과 관련된 비밀기록을 해제해 아르헨티나에 전달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남미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는 걸 방조했다. 이에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요청에 따라 아르헨티나 정부에 관련 기록을 전달하기로 약속하고 2016년에 1차분을 전달했다. NARA에서는 이미 2002년에 '더러운 전쟁'과 관련해 비밀해제 된 국무부 문서 4,700건을 검색도구인 카탈로그에 공개한 바 있는데 아르헨티나의 요청을 미국이 수용하면서 본격적인 비밀 해제 작업과 함께 공개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바마에 이어 트럼프까지 두 번의 대통령에 걸쳐 진행되었고 16개 행정부 기관이 참여했다. NARA의 수장인 데이비드 페리에로에 따르면, “NARA의 직원 380명 이상이 단어 하나하나를 기준으로 기록을 검색하고 검토하는 데 거의 32,000시간을 보냈”으며, “NARA와 4개의 대통령 도서관(포드, 카터, 레이건, 조지 H. W. 부시)이 참여하고,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국립기밀해제센터(National Declassification Center), 대통령 도서관(Presidential Libraries), 입법아카이브센터(Center for Legislative Archives)의 직원 25명이 1,300시간 이상 관련 기록을 식별하고 검토했”다고 한다. 특히 2019년에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에 전달한 기록의 경우 국립기밀해제센터의 직원들이 740입방피트가 넘는 기록을 찾아 4,600페이지 이상을 포함시켰으며, 기록의 출처는 공군, 육군, 법무부, 노동부, 국무부, 연방수사국,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국제개발청을 포함한 다양한 미 연방기관이라고 한다. 이 기록은 아래 링크를 통해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가 아카이브의 행동은 한국의 국가기록원 또는 대통령기록관이 최근에 보인 행태를 돌이켜 볼 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장 데이비드 S. 페리에로(왼쪽)가 아르헨티나의 법무부 및 인권부 장관인 헤르만 카를로스 가라바노(오른쪽)에게 기록을 전달하는 모습(출처: NARA)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장 데이비드 S. 페리에로(왼쪽)가 아르헨티나의 법무부 및 인권부 장관인 헤르만 카를로스 가라바노(오른쪽)에게 기록을 전달하는 모습(출처: NARA)

 


 

기록은 쉽지만 쉽지 않고,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기록은 정치적이다. 우리는 이미 짧은 한국의 현대사를 통해서 기록이 어떻게 정치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며, 또 어떻게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거나 저항을 촉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왔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사례에서 보았듯이 기록의 정치학은 기록관리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기억과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접근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관계를 조명할 수 있도록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자행된 국가권력의 만행은 지구 정반대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멀게는 4.3, 가깝게는 5.18을 겪은 한국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멀리 1980년까지 갈 것도 없다. 바로 지난 12월 3일, 계엄군이 총을 들고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관위에 쳐들어가 주요 인사를 구금하려고 했던 2024년 현 시점에서도 너무나 익숙하기만 하다. 

기록의 정치화와 관련된 사례는 많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사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 Andersen, M. E. (1993). Dossier Secreto: Argentina’s Desaparecidos And The Myth Of The “Dirty War”. Avalon Publishing. 
  • Feitlowitz, M. (1998). A Lexicon of Terror: Argentina and the Legacies of Torture.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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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별여행자의 프로필 이미지

    지구별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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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1 year 전

    정성스런 글이네요. 이 세미나 같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내용을 다루진 않았잖아요. 추가로 조사하고 글로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땐 몰랐는데 지금은 남 얘기 같지가 않네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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