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밥캅스 S01.E08.

먹깨비 전생 이야기

2024.08.26 | 조회 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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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캅스

재미없는 밥상, 너 오늘부터 범인해라

 아직까지도 서울에서 산 기간보다 도쿄에서 산 기간이 더 길다 보니 나도 모르게 회사 사람들에게 일본 문화를 이야기할 일이 많다. 그 와중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끝도 없기도 하거니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위주로 풀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일본을 좋아하는 줄 안다. 하지만 아니다. 난 자칭 지일파다. 악플 먹고 어그로 끌릴까봐 말을 더 못 하겠는데 부정적인 이야기로만 천일야화도 가능하니 궁금하다면 연락해 주시라. 합정역 생활맥주에서 만나자. 어쨌든 오늘은 긍정적인 경험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되돌아보면 식생활은 대부분 행복했다. 사 먹은 경험들도 즐거웠지만, 해 먹은 경험들에 대해서는 특히나 말이다.

 일본에서 살 때, 회사에 도시락을 싸서 다닌 적이 있다. 당시에는 요리가 즐거워 그게 고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도 크게 들이지 않았다. 저녁에 해 먹은 반찬을 조금 나눠, 다음날 나물이나 채소 반찬과 함께 싸 가곤 했다. 주말엔 미리 도시락용 반찬 메뉴들을 몇 가지 만들어 두기도 했다. 애초에 각종 채소를 소분해서 팔고 매일 장 보는 것이 거진 문화인 그 나라에선 그게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는 대충 할인 스티커가 붙은 채소나 특가로 파는 반찬들을 사서 활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가도, 철마다 나오는 질 좋은 과일과 채소 들을 때론 챙겨 먹었다. 비싸도 아깝지 않았다. 무리해서 센비키야의 고급 과일을 사볼까 싶기도 했다. 오오제키와 같은 채소를 품종별로 다채롭게 파는 슈퍼에서 장을 잔뜩 보거나, 퀸즈 이세탄에서 예쁘게 포장된 백화점 스타일 과일을 사는 게 최대 사치로 끝났지만 말이다.

 위에 언급한 오오제키를 포함해 몇몇 슈퍼가 기억에 남는다. 20대 초반에 창동 이마트(무려 국내 1호점)와 창동 하나로마트(대빵 크다)에서 장을 보던 게 익숙하던 나는 일본에 건너가자마자 상대적으로 작아도 너무 작은 마트 크기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도쿄라지만 이럴 수가. 그나마 내 마음을 달래주던 게 요가역의 오케이마트 2호점이다. 화분에 자전거까지 판다. 서울로 치면 내부 순환로에 인접해 그 인방의 모든 주민이 주말이 되면 차를 타고 양재 코스트코 오듯 방문하는 곳이었다. 근처의 맥도날드,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지점들도 모두 드라이브 스루 매장이었다. 또 타마가와 강과 키누타 공원에 인접해 바베큐, 어린이 야구 시합, 벚꽃놀이 같은 이벤트가 상시 열려 술, 고기, 델리 종류가 다양했다. 바베큐용 양갈비를 항상 구입 할 수 있는 슈퍼, 이거 흔치 않다. 그 앞에 ‘칼디’라는 해외 식료품 수입점이 있었는데 온갖 향신료를 팔았다. 자취생이 캐러웨이, 월계수 이파리까지 갖춰두고 오븐으로 양갈비구이를 해 먹다니.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다.

 다시 돌아가서 오오제키 이야기도 해보자면 무려 세 점포나 꾸준히 이용했다. 토도로키 살 때 자주 들린 카미노게점과 오야마다이점, 히가시키타자와에 살 때는 시모키타자와점. 시모키타자와의 오오제키는 다른 점포들보다 훨씬 큰 데, 카레 격전지라는 시모키타자와의 명성에 맞게 일본 각지에서 모인 별의별 카레 루와 칼디에 버금가는 향신료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s&b사의 향신료를 종류별로 쟁이고 싶다면 시모키타자와의 오오제키 2층으로 가세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동네라 까르보 불닭볶음면도 항상 있었다. 또 델리 코너가 예술인데, 근처 스시노미도리 본점에서 납품받아 격이 다른 마트 초밥이 있고, 일본 마트 반찬 대회에서 금상을 탄 가라아게 등 일품 델리들도 종류별로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이 오오제키가 빛나는 시즌은 바로 연말 연휴 전후다. 구정이 아닌 신정을 기념하는 일본 사람들은 신년 연휴 전에 잔뜩 음식을 만들어 두고 그걸로 일가친척들과 3~4일을 보내는데, 그때 먹는 게 오세치다. 삼단 도시락통 같은 데, 장수, 건강, 성취 등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조린 음식들을 담는다. 요즘은 오세치를 다들 주문해서 먹는 추세지만, 그래도 청과물점으로 시작한 오오제키 답게 신선함이라는 차별화 전략을 내세워 오세치용 식재료를 화려하게 내건다. 홋카이도 털게, 성게알, 청어알, 쿠로게와규, 이름도 모르겠지만 눈알이 크고 새빨간 생선 등.

 일본에서 사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동네, 토도로키는 역 근처에 세조이시이라는 고급 슈퍼가 있었다. 비싸서 잘 가지 않았지만, 작은 규모에 비해 와인 섹션이 잘 꾸려져 있었다. 월급날엔 후타코타마가와의 치즈 왕국이라는 가게에서 뇌샤텔 치즈, 테트 드 무안 치즈를 사고 친구와 함께 나눠 마시는 게 낭만이 있었다. 다다챠라는 수제 소시지 가게와 나카츠 가라아게 케이라는 곳도 상점가를 지나칠 때마다 자주 들렀다. 이 동네는 도심부와 가깝지 않아 아사히 생맥주 캔도 나오자마자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무심코 들어간 동네 구멍가게에서 온갖 크래프트 맥주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도 남아있다. 게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사시사철 들리는 자연이 가득한 풍정이라 떠날 때 참 아쉬운 동네였다.

 토도로키를 떠난 후부터는 계속 도심에서 살았다. 관광지와 가까운 동네다 보니 도쿄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나보다 더 잘 알아서 소개받은 가게들을 가는 데도 벅찬 시간이었다. 또 친해진 회사 동료들이 모두 근처에서 사는 데다 밥잘알들이라 매일매일 끼니가 부족할 정도로 멋진 가게들을 많이 탐험할 수 있었다. 토미가야, 오쿠시부의 와인바, 하타가야의 밥집들, 요요기우에하라의 빵집들, 신주쿠 뒷골목의 이자카야들, 잘난 체하는 아자부의 가게들 등. 언젠가 또 기회가 된다면 이 이야기들을 잔뜩 써볼 테다.

이 뉴스레터의 주제가 항상 밥상머리 불만이라고 주변인들에게 말해왔는데, 일본에서의 먹생활엔 사실 불만이랄게 없었다. 간장, 미림에 질릴 때도 있었지만 돈이 아까운 밥은 딱히 없었달까? 잃고 나면 소중함을 안다던데… 돈 아끼지 말고 히메이치마돈나 귤, 피오네 포도 잔뜩 먹고 올 걸. 까비 

- J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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