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잿밥에 관심이 많은 누나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 돌아올 때 뭐 가져올 거야?’. 올리브유, 파스타, 토마토소스, 앤초비 등등, 수많은 신선한 이탈리아의 식재료와 와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단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면 단연코 나의 대답은 ‘아페리티보’일 것이다.
‘아페리티보’는 어떤 종류의 음식이 아닌 하나의 이탈리안 문화다. 밥을 먹기 전, 간단하게 빵, 치즈, 샤퀴테리, 그리고 원하는 종류의 술을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이곳의 친구들은 여유가 없을 때에도, 음식을 요리하는 동안 와인을 따고 샤퀴테리를 꺼내어 꼭 아페리티보를 가졌다.
가끔(혹은 자주)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면 아페리티보로만 2시간을 훌쩍 넘긴다. 어느 날은 아페리티보를 오전 11시에 시작해서 점심을 오후 5시에 마친 적도 있다(그리고 바로 친구 집으로 넘어가 저녁을 먹고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음식과 와인에 절여진 날이었다). 그만큼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화에도 진심이다. 얼마나 웃긴 얘기를 하는지 시끄럽도록 깔깔 웃어대다가도,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열을 올려가며 토론을 하기도 한다(이탈리아어를 못하는 나에게는 종종 싸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주망태가 되기 직전까지 와인도 진탕 마시고, 식사를 할 때에는 오히려 술을 가볍게 마신다.
한국의 문화와는 정반대라서 굉장히 흥미롭다. 한국에서는 1차부터 바로 본론으로 시작해서 2차, 3차로 갈수록 음식이 줄어들고 술이 주가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3차 즈음에는 거하게 취해서 서로 하지 못했던 얘기를 나누며 많이도 웃고 눈물도 찔끔 흘렸던 대학 시절의 기억이 있다(너무 많이).
아페리티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샤퀴테리도, 와인도 아닌 ‘대화’다. 무엇을 먹느냐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하다. 가끔은 대화보다도 더). 슈퍼마켓에서 사 온 크래커가 될 수도, 냉장고에 짱박혀 있던 오래된 치즈나 살라미가 될 수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눈을 맞추며 서로의 근황을 묻고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한국에서 밥 먹으러 가기 전에 카페에 가는 느낌과 유사하다. 아페리티보에서는 보통 술을 마시니,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한국에서의 삶은 언제나 바쁘다. 직장에서는 일과 사람에 치이고,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아 좀처럼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지 돌아볼 때가 많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마주하는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내 마음까지도 초조하고 다급해진다. 이런 한국 사람들에게 가끔은 아페리티보의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 없이 아페리티보를 가지다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고 9시에 저녁을 먹고 디저트까지 챙겨 먹는 이탈리아인들의 여유와 넉살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면, 오늘은 아페리티보를 해보자. 친구에게 연락해 칵테일이든 와인이든 맥주든 한잔하고 밥 먹으러 가자고. 얘기로 지친 마음을 먼저 소화시키고 배를 채우러 가보자고. 그것도 어렵다면 알려달라. 나는 언제든지 아페리티보를 함께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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