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메이커 A가 말했다. 오늘은 컴팩트하게 딱 3시간 일하고 쉬자고. 요즘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하다고.
계획대로 3시간만에 일을 전부 마칠 수 있었을까? 수확기에 조기 퇴근이란 단어는 상상할 수 없다(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한 우리는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었다. 원래 농사 일이란 게 다 한 것 같다가도, 여기저기 보이는 부족한 것들 해치우다 시간 다 보내는 집청소 같은 것 아니겠나. 포도를 수확하고 압착한 뒤에도, 사용한 도구를 청소하고 숙성이 끝난 탱크 안의 와인을 병입하는 일까지 하니 발바닥마저 와인 색으로 물들 정도니 참으로 고된 직업이다(사진 있음 주의).
늦은 점심을 위해 열심히 전화를 돌려, 차로 10분을 달려야 갈 수 있는 식당에 간신히 한자리를 예약했다.
정원 같은 뜰에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식사를 마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뜰을 가로질러 나오고 있었다. 몇 종류의 파스타와, 치킨 등의 메인 메뉴 2-3가지로 구성된 심플한 메뉴가 딱 한국의 동네 백반집 같았다.
꽤나 늦은 점심시간에 도착한 탓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파스타는 딱 하나였다. 그것이 바로 ‘비골리’. 우동 면발같이 통통한 비골리를 A는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물론 우동도 좋아한다). 비골리만 주문하기엔 열심히 일한 몸이 아쉬울 것 같아, 시간이 늦어 안된다는 직원을 조르고 졸라 감자튀김까지 추가 주문했다.
우리나라 국밥집에 다진 양념과 후추가 기본으로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듯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면 테이블 위에는 올리브오일과, 소금, 그리고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가 준비되어 있다. 각자의 기호에 맞게 뿌려 먹으라는 세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참고로 파스타 위에 신선한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둘러 먹으면 정말 맛있다).
다행히,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스타가 바로 나왔다. 뽀모도로 라구 소스 비골리. 치즈 가루를 넉넉히 뿌리고 올리브오일을 둘러 한 입 먹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통통한 면발의 비골리는 우동같이 도톰하지만, 훨씬 묵직하고 쫀득한 식감을 가지고 있다. 풍미가 깊은 라구 소스를 곁들이니 두꺼운 면도 부담스럽지 않다. 우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법한 그런 면. 비골리는 대체로 생면으로 판다는 말에, 한국으로 면을 뽑는 틀을 사들고 가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아주 무거운 황동 틀을 사용한다길래 조심스레 그 마음 다시 내려놓고 눈앞에 놓인 남은 비골리를 최대한 음미해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는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한여름의 서울만큼이나 덥고 습한 날씨에, 해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포도밭에는 온갖 벌레로 가득하고, 저녁마다 집에서는 모기와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일정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돌아볼 때의 머릿 속은 더 또렷해진다. 일의 피곤함 보다는 농사의 소중함을, 늦은 점심의 배고픔 보다는 새로운 이탈리아 음식 경험의 재미를 떠올린다.
오늘 수확한 포도의 맛, 수확하며 A와 나눈 대화, 생경했던 비골리의 식감과 빵으로 싹싹 깨끗하게 비워낸 빈 접시.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강물에 비친 햇살에 부서지는 윤슬처럼 반짝이다 사라져, 이내 다가올 내일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 Y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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