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몇 시에 잠에서 깼는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이 흐릿하다. 얼렁뚱땅 고양이 세수를 하고 차에 올라타, 정신을 문득 차려보니 포도밭이었다. 와인 메이커 친구 A랑, 수확을 도와줄 친구 P랑 함께. A가 나눠준 포도 수확용 가위 하나를 달랑 들고 포도를 따고 있는 내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와인을 서빙하고 팔아는 봤지만, 직접 수확을 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잘 익은 포도알은 구슬같이 조그맣고 동그란 게, 한 알 따서 먹으면 아주 새콤달콤하니 맛이 기가 막혔다. 한국에서 먹어온 포도 맛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의 포도도 많이 달고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과육은 적지만 더 달고 더 상큼했다.
이탈리아의 9월은 아직 여름이 한창인 것만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뚫고 뜨거운 태양볕이 비 내리듯 쏟아지고 있었다. A는 우리가 일하고 있는 포도밭 구역의 포도를 전부 수확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포도 수확은 비가 오면 그다음 날까지도 포도 수확이 어렵고, 너무 더워져도 포도가 쉽게 물러지고 상큼함이 덜해져서 안되니 오늘 마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점심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포도를 다 수확해내고, 오후 3-4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너무 덥고 힘들면 보통 입맛이 없어지곤 하는데, 너무 배고파서 수확한 포도라도 열심히 집어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실에 앉아 A와 저녁 메뉴로 옥신각신하던 찰나에, A의 여자친구 C가 퇴근하고 와서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C는 이전에 까르보나라를 한 번 만들어 준 적이 있다. 그때는 재료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다음에 꼭 다시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걸 잊지 않은 것 같았다.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파스타 사랑은 유별나다. 크림의 ㅋ자나 베이컨의 ㅂ자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발작 버튼이라고나 할까. 염장 햄인 관찰레,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랑 섞기도 한다), 그리고 계란만 써서 소스를 만든 파스타만 까르보나라라고 부르라고 한다.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된장국 끓인다고 하고 일본 미소를 써도 맛만 있으면 뭐라고 안 할 것 같은데 말이다.
C가 만들어준 까르보나라는 아주 특이하고 놀랄만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만든 까르보나라에는, 그 단순하고 좋은 재료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달까. 그런 말도 있지 않나,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꾸덕하고 고소하고 짭짤한 맛에, 산펠레그리노 오렌지 쥬스 한 잔 곁들이니 몸에 남아있던 묵은 피로가 싹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낮에는 포도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이탈리아 음식을 해 먹는 것. 정확히 한국에서 기대하던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었다. 무언가 아쉽다 했는데,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해서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내일은 와인을 한 병 열자고 해 볼 생각이다.
- Y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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