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팁, 엔팁의 필독서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농담이 있던데. 엔팁인 나는 대학생 때 심리학 관련 교양 수업을 듣다가 과제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그때 누군가를 처음으로 좋아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좋아하던 사람은 Y의 같은 학과 선배다. 워낙 대형과라 Y도 접점은 없어 서로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지만, 종종 소식을 건너 건너 들을 수 있었다. 혹시 그 사람 오늘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학교 축제에 와봐라, 나 오늘 엘리베이터에서 그 사람 봤다 등등. 그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오랜 시간 카톡 프로필 사진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결혼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변경하셔서 근황을 알게 되었다.
첫사랑이라 그런지 쪽팔린 기억이 유독 많다. 친구 사이도 아닌데 맨날 페이스북을 염탐하다가 나도 모르게 좋아요를 눌렀던 일. 그걸 숨기고자 계정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설정을 잘못해서 미들 네임이 붙어버린 일. 한 번 변경하면 3개월간 변경할 수 없다 해서 그대로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일. 그때 멋지게 고백을 하고 끝냈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러서 이제 안 좋아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연락을 끊었다. 이게 가장 쪽팔리다.
그때의 J는 지금의 J가 더 성숙하게 사람들과 교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이 먹어도 하는 고민이 비슷하다.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곤 한다. 그게 어른으로서 당연하고 건강한 것일 텐데도, 나는 종종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나보다 우선순위에 두게 되어 그게 어렵게 느껴진다. 무의식적으로 상대방도 나만큼이나 헌신하길 바라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쉽게 포기해버린다.
최근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목표가 무엇인지 찾아가는데 있어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과정을 풀어보자면, 난 그냥 좋아하고 있고 그게 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연애의 행동 양식을 하고 싶었던 내 욕심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에게 원하는 바를 더 강하게 요구한다면 맞춰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협박으로 교류를 이어 나가봤자 관계의 지속성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기에, 마음이 머리를 따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요구에 의한 관계는 신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들어주면 당장은 관계를 되돌린 듯하고, 상대방을 믿을 수 있다는 기분이 잠깐 들겠지만, 그 기분은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이기 때문에 착시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과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 감정도 마주해보면 결국 두려움일 뿐이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이 나라면 두려울 일이 없을 텐데, 그 자리를 상대방이 차지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사라지는 것에 대비하지 못한 두려움을 불안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근데 내 인생에서 상대방을 지워봤자 내 몸의 대부분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건 변할 일이 없다.
최근에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제법 비밀이었기 때문에, 이 글을 올리고 나면 친한 사람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연말이라 잼얘를 준비해봤다. 보고 있나, HYS, HMJ?
- J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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