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다가올 무렵, 적막한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을 나가는 출구 앞에 서서 와인 메이커 친구 A의 연락을 기다렸다. ‘아무 출구로 나와서 바로 앞에 보이는 야외 주차장으로 와’라는 연락을 받고는 후회스럽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나서 발을 내디딘 베네치아의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를 크게 한 숨 들이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산했던 공항 라운지에 비해, 주차장에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거나 배웅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틈을 비집고 A의 자동차인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누가 봐도 농부의 차인 은색 스바루를 열심히 찾았다. 그러던 와중에, 뜬금없이 한 폭스바겐 차량이 다가와 내 앞에 섰고 창을 내려 해맑게 인사하는 A를 보았다.
A는 여자친구인 C의 차를 끌고 나를 배웅하러 왔고 우리는 C의 집으로 가서 잘 거라고 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너만 괜찮다면’이라고 덧붙였다. ‘안 괜찮으면 어떡할 거야’라는 나의 대답에 ‘그럼 어쩔 수 없지. 차에서 자’라고 답하는 A의 장난에 문득 이탈리아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A와의 기묘한 인연은 대략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와 단둘이 제주도를 여행하던 중, 와인을 마시고 싶던 나는 한 와인바에 들러 숙소에서 마실 와인 한 병을 추천받아 샀었다. 포장해온 회와 함께 마신 와인은 상큼하고 가벼우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어떻게 와인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던 나머지, 인스타그램으로 와이너리를 찾아 무작정 연락했고 A는 친절하게 답변 해주었다.
그러다 우연히 덴마크를 떠나기 전, 그의 와인을 떠올렸다. 덴마크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와이너리를 방문해 경험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제주도에서 그에게 연락했던 때처럼 무작정 찾아가고 싶다고 연락했고, A는 흔쾌히 받아주어 올해 4,5월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왜 받아주었냐고 언젠가 물었다.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냐며, 때로는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믿어주고 경험하는 것도 인생의 일부이지 않겠냐고 답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찾아가겠다고 무작정 연락한 나도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A의 생각은 특이함을 넘어 비범했다. A와 지내며 9월 수확기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다시 이탈리아에 왔다.
그리고 시차 적응을 할 겨를도 없이, 다음 날 아침 5시 반부터 포도 수확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Y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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