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오기 전에는 귀찮다는 핑계로 운동도 미루고 편하게 지내던 날들을 보내며, 너무 편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쓸모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간의 불안함이 깨끗하게 사라질 정도로 부지런히 지내는 중이다. 헬스장도 필요 없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농장으로 출근해서 포도를 따고, 싣고, 옮기고, 짜내고, 청소하면 바로 팔다리에 근육통을 짜릿하게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에는 유명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가 있다. 이 프로세코를 만드는 포도 품종은 글레라인데, 와인메이커 A도 이 품종을 기르고 있다.(하지만, 프로세코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 얘기를 하려면 한 회차를 할애해야 할 정도니 다음으로 미뤄본다.)
오늘 수확할 포도가 바로 이 글레라. 포도 알갱이도 먹음직스러운 크기에, 송이마다 알이 성글성글 열려 예쁘고 탐스럽다. 수확도 쉬운 편이고 한 송이가 꽤나 묵직하고 커서 수확하는 손맛이 좋은 품종이다.
하루에 800kg의 포도를 수확하고 나니, 온 몸에 수분이 주욱 빠져 말라 비틀어진 느낌이었다. 맛있는 점심을 내놓지 않으면 내일부터는 태업을 하겠다고 땡깡을 부렸다니 대뜸 생각해놓은 밥집이 있다고 했다.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오래된 이탈리아 할머니 백반집을 내가 꼭 좋아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우리나라 백반집에서도, 갈 때마다 조금씩 반찬이나 국이 바뀌지 않는가. 이 이탈리아 백반집도 비슷하다. 매일 상황에 따라 바뀌는 파스타와 소스가 몇 종류 준비되어 있고 원하는 대로 조합해서 먹을 수 있다. 거기에 추가로 로스트 치킨, 비프와 같은 메인 디쉬도 추가할 수 있다.
오늘은 생면 뇨끼, 딸리아뗄레, 비골리 파스타와 라구, 토마토, 버섯 소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집은 연세가 80이 넘으신 할머니가 파스타 면과 소스를 포함한 모든 요리를 직접 하시는 찐노포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씩 음식 서빙도 하시면서 단골손님들이랑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참 정겨운게 오래된 한국의 백반집들이 떠올랐다.
A가 본인의 할머니가 만든 뇨끼 다음으로 맛있다고 추천하는 라구 소스 뇨끼로 주문했다. 파스타 한 그릇 만으로는 아쉬우니 추가할 수 있는 메뉴가 없을지 서빙을 도와주는 아드님께 물어보니, 오늘은 야채 리조또가 있다며 원하면 한 접시를 반 나눠주신다고 하셨다(라고 말하고 거의 한 접시씩 내어주셨다).
나에게 요리를 기깔나게 하시는 이탈리아 할머니가 있다면 이런 집밥을 해주지 않을까 싶은 맛의 파스타와 이보또였다. 이방인인 나에게도 푸근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숟가락을 놓을 새가 없이 계속 고개를 박고 먹게 되는 음식. 아주 좋은 재료로 섬세하게 조리된 다이닝에서 먹을 것 같은 음식과는 상반된, 매일 먹고 싶은 소울이 느껴지는 그런 밥 말이다.
A가 지내는 이 지역에서는 이 식당과 같은 오래된 백반집은 이제 찾기 어렵다고 했다. 이런 식당에서 일하려는 젊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이 식당도 서빙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저녁에는 열지 못하는 처지라고 했다. 이 식당에서 저녁에 일하겠다고 하면 오늘이라도 받아줄 거라는 A의 농담에 이미 단골집을 잃은 것 마냥 괜히 마음이 짠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지역에 놀러 가게 되어서 맛집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식당을 꼽겠다. 이곳에서는 여행이 아닌,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진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 같아서. 사람 사는 느낌의 따뜻한 식당에서 밥을 한 끼 먹고 나면 왠지 여행 전체가 따뜻하게 이어질 것도 같아서.
밥을 무진장 먹어 푸드 코마가 온 것 같이 눈꺼풀이 가라앉는 이 순간에도 다른 파스타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진다.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할머니와 ciao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 Y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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