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22]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요즘 잠자리는 좀 어떠세요? 잘 주무시나요? 전 원래 아주 일찍부터 잠드는 편인데, 요 몇 주 동안은 늦은 시간까지 잠이 오지 않아 무척 고역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은 상황 속에 있어서인 것 같아요. 많은 상황 속에 있으면 많은 말을 하게 되고 많은 말은 많은 생각을 불러오니까요.

심지어 오늘은 아침에 살짝 깼다 다시 잠들면서 가위에 눌렸어요. 패턴은 항상 똑같은데요. [꿈에서 깨려고 발버둥침] → [깸. 눈 떠보니 내 방임] → [사실은 이것도 꿈이지롱] …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 굴레 속에 있다 보면 영영 꿈 안에 갇힐 것 같다는 생각에 엄청난 공포가 느껴지거든요.

그래도 살아남아 구독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이번 달의 글감은 '종로'입니다. 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동네예요. 정말 현장이면서 정말 시적이기도 하고, 아주 빛나면서 아주 괴괴하기도 한 곳. 여길 저만 좋아하는 건 아닌지 '광화문 걸으면 기분 좋지 않음?' 류의 인터넷 글이 종종 보이더라구요. 킹 풍수지리가들이 설계한 계획 도심이니 그 반듯함과 에너지는 어디에도 지지 않겠지요.

생각해 보면 이 도시야말로 저의 불면을 유도하는 '많은 상황' 유발체일 텐데, 왜 저는 자진해서 종로찬가를 쓰고 있는 걸까요. 사랑이랑 참으로 복잡다단하다는 생각을 여기서도 해 봅니다. 어찌 됐든간에 구독자님, 짧은 이월의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복잡다단한 상황 말고 복잡다단한 사랑 속에 있는 이월 되시길. 겨울이 지나간다고들 하니까 말이죠.

감사합니다. '2'월에 '22'호 메일을 보내는 작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사해요!

차재신

나에게 종로는 없는 세계다. 어렸을 때 종로는 골목마다 아저씨들이 득실거리는 곳. 매캐한 담배 연기와 토 섞인 막걸리 냄새. 깍두기 튄 국물이 테이블에 그대로 남아 있는 지저분한 닭한마리 가게. 촌스럽고 거대한 한글이 박혀 있는 나이트 간판. 공원의 나무들보다 많은 시커먼 비둘기 떼.

20대 때 종로는 놀러가기 촌스러운 곳. 노인네들을 위한 번화가. 변화하는 도시의 분위기를 따라오지 못해 낙후된 지역. 카페보다 다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00년대식 커피숍. 햇볕도 들지 않는 좁은 골목에 파리지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철물점들. 절인 통골뱅이처럼 배 나온 아저씨들이 이쑤시개를 꼬나물고 어슬렁 나오는 국밥집.

지금 종로는? 길을 잘못 들면 갑자기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부터 우리 아빠들까지 바글바글 뒤엉킨 포장마차 거리. 관광 온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수제 금은방. 세상의 끝일 것 같은 골목을 꺾으면 갑자기 새로운 골목이 등장하고,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바가 등장하고, 미니멀하고 세련된 게스트 하우스가 나오고, 모두가 흥겨운 이곳에서 나만 가장 오래된 사람이 된 것 같고⋯

정리하자면 종로는 내가 ‘유형화할 수 없는 세계’다. 갈 때마다 종로는 다른 모습이다. 내가 예상했거나 기대한 종로의 이미지를 매번 배반한다. 파악할 수 없는 세계, 상징 없는 원형. 그래서 나에게 종로는 ‘없는 세계’ 라고 했다.

앞에 가져온 시는 ‘종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띵시다. 제목은 ‘종로일가’지만 짧은 본문 속에 종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종로라고 유추할 수 있는 힌트나 내용도 없다. 제목과 내용의 간극이 아주 먼 시다. 그래서 멋진 시가 되었다. ‘종로’라는 이름은 공간에 붙은 지명일 뿐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는 건 시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건 독자다. 나는 공간을 어떻게 지각할까? 평범하지만 정확한 대답은 감각과 기억일 테다. 감각과 기억은 앞에 늘어놓은 것처럼 이미지로 형성된다. 다시 시를 본다.

아마 화자에게 종로는 ‘사후’ 혹은 ‘이전’의 공간 같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사건이 끝난 공간. 혹은 내가 있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공간. 새를 팔지도 못했는데 새는 떠나고 나만 남아버린 자리. ‘죽고 싶다’라는 종국의 생각보다 불현듯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 드는 자리. 시에서 현재 혹은 지금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듯하다. 모든 상황이 화자로부터 엇갈리고 있다. ‘새’, ‘생각’ ‘종치는 소리’ 들은 이미 벗어났거나 지연되는 중이다.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는 대상이 내가 아님에도 돌아보게 된다.

짐승은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짐승의 세계에서 불합치라는 개념은 없다. 환경과의 불합치는 곧 죽음으로 귀결되기에. 그러나 인간은 자신과 환경을 분리한다. 인간은 자신을 먼저 인식한 뒤 환경을 변화시킨다. 또는, 포기하고 환경에 종속된다. 인간에게 있어 세계와의 불합치는 꼭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자신이 어울리는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세계가 공존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산다. 생존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 때문에. 

〈종로일가〉가 주는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느낌. 내 존재가 자꾸만 어긋나는 것 같은 공간. 그런 감각이 나의 종로와 맞닿았다. 임승유 시인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 된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줄곧 위화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늘 환경으로부터 튕겨져 나오거나 도망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종류는 다르지만 결국 부딪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렇듯, 쓰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연정모

이십대의 반절은 종로에서 살았다. 다녔던 대학이 종로구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혜화에서 종로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건 3학년 여름이 되어야 알았다. 마로니에공원을 지나 이화사거리만 거치면 곧바로 종로5가라는 사실은 당시 막 친해졌던 친구가 알려주었다. 

밤늦게 과제를 하던 중이었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함께 걸어 보자 했지. 학교에서 내려와 대명거리로, 대학로 큰길을 지나 방송통신대를 막 지나쳤을 때, 갑자기 거센 소나기가 쏟아졌다. 가장 가까운 처마 아래서 잠시 비를 피하는데 노란 조명에 반사된 맞은편 건물이 비현실적으로 고풍스럽던 것이 기억난다. (웨딩홀이었을까? 싶어 그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로드뷰 2016ver 보았는데 웨딩홀이 있던 게 맞았다)

첫 종로 걷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엔 어렵지 않았다. 걷는 건 전혀 까다로운 일이 아니니까. 길을 찾을 필요 없이 헤맬 걱정 없이 그저 곧장 걸으면 그곳에 도착했다. 크고 똑바른 길이 거기에 있었다. 

마포구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종로를 걸을 일이 오히려 더 늘었다. 지하철 환승 구간,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 있기보단 일찍 내려 걷기를 선택했다. 2호선 합정역에서 탑승해 4호선 혜화역에 내리려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출퇴근 무렵의 그곳은 정말 공포스럽다. (이 말엔 조금의 과장도 없다)

나는 그곳에 서서 모자른 숨을 아껴쉬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천장 없는 공간으로 나가기를 선택했다. 마침 여기가 어딘가,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사대문 안이다. 너르고 너그러운 평지다. 역을 나서 청계천과 흥인지문공원을 지나 집에 도착하기까지 숨이 차거나 다리가 아플 일 없었다. 해가 지는 하늘을 누리다 보면 삼십 분이 지났고 그러다 보면 집이었다.

산책 같은 귀가길은 점점 길어졌다. 집에서 더 멀리 있는 역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을지로4가에서 3가로, 을지로입구로. 일을 마치고 그럴 체력이 어디서 왔나 싶지만 그때의 나는 오로지 그 저녁 시간을 위해 하루를 보냈던 것 같지. 

길은 똑바르다. 길에는 이름이 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이 참 중요했다. 

이곳은 을지로, 광교사거리를 지나면 저기부터는 우정국로, 여기는 조계사앞사거리… 처음엔 멈춰서서 지도 앱을 찾던 것이 어느 정도 지나자 필요없게 되었다. 이곳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는 길이 되었다. 그것이 내게 왜 그만큼이나 필요했는지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올해로 서울에 혼자 산 지 12년 차가 되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특별히 외롭거나 슬플 일은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아홉 번의 이사를 하고 지금은 열 번째 집에 살고 있다. 이건… 특별히 지겨울 일이 맞음. 첫 자취의 단추를 잘못 채운 탓에 이후에도 수시로 옮겨다녀야만 했는데 저렇게 걸어다니던 당시만 해도 그것이 상당히 괴로웠다. 왜 나만 정처없어? 왜 나만 주소 없어? 왜 나만…

그냥 되게 외로웠다.

믿을 구석들을 연구개발 해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간밤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친구에게 잠을 못 잤다고 하니 무슨 일 있었냐는 물음이 돌아오는데, 대답할 말이 많지 않았다. 그냥… 삶의 형편없음을 견디느라.

모두가 스스로를 견디며 살고 있는 거겠지? 물으니 "그럼"이라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그것이 이상한 위안이 되고.

그때의 외로움은 이제 없지만 지금 여기엔 또다른 괴로움이 있다. (삶이란 정말!!!!) 그러나 위안의 방법을 연구개발한 경험은 남았다. 스스로를 견디고 다스리는 법은 조금씩 더 알아가는 중이다.

거주지를 옮긴 지 오 년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종종 종로 나가서 걷는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녹초가 되는 기쁨 소진되는 기쁨. 삶의 형편없음을 견디는 데 그만한 게 없고 이제 추위가 풀리고 있다. 나가서 발목을 혹사시킬 시간이다.

추신. 

쓰고 보니 시 얘기를 하나도 안 했네 싶어 한 편 첨부한다. 종로 걷기 하면 떠오르는 시로, 허연의 〈칠월〉이다. 첨부한 아티클의 말미엔 허연 시인이 적은 문장이 있는데 그것이 몹시 좋다. "젊은 날 많이 아팠다. 미래는 없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사랑은 떠났고, 차는 끊겼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속에 시를 쓰는 일 밖에 없었다."

🚶생활기

차재신: 삶을 삶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루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정모: 필명을 쓸까 아주 깊이 고민 중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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