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40] 시를 읽자!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2주 전 보낸 편지 인사말의 마지막 문장은 "부디 팔월 편지 때는 공기 중에 편안함이 함께하길."이었는데요, 놀랍게도 아침 공기가 상쾌해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공기가 확연히 바뀐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살 것 같군요. 이 자연이 참 너그럽군요. 

이번 달부터 [시인이기]에는 조금의 변화가 있습니다. 저희는 14일에 한 건, 28일에 두 건의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어요. 앞으로 14일에 전하는 월 첫 번째 메일에서는 저와 재신이 시집을 한 권씩 소개하려 해요. 그 계절에 어울리는 시집일 수도 있고, 지금 읽고 있는 시집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주제로 시집을 고를 수도 있겠고요. 우선 이번 달에는 자유롭게, '첫 번째로 구독자님께 소개하고 싶은 시집'을 골라 왔어요. 

(28일에 보내드리는 두 건의 메일은 기존과 동일합니다! 한 메일에는 신작 시를, 다른 하나의 메일에는 그 시에 대한 노트를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포맷을 바꾸게 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진 않고요. 책상 위에 쌓인 시집들을 보던 중 (저는 지독한 병렬독서가입니다) 읽은 책들을 기록해두지 않으니 '걍 조왔다' 정도의 감상만 남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더라고요. 연재 일 년을 넘어간 시점에서, 슬슬 구독자 분들이 저희 얘기에 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

이번 달에는 황유원 시인의 ⟪하얀 사슴 연못⟫과 김보나 시인의 ⟪나의 모험 만화⟫를 소개합니다. 재신은 '시 도사'의 시집을, 저는 8월 중 제가 가장 즐겁게 읽은 시집을 가져왔어요. 구독자님의 독서 생활에 환기가 되어드릴 수 있기를!

차재신

황유원의 ⟪하얀 사슴 연못⟫

시집 추천을 어떤 책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다. 처음 읽었을 때 충격받았던 시집, 20대 내내 나를 관통했던 시집, 내 마음을 무너뜨린 시집, 개성이 뚜렷해 잊을 수 없는 시집 등 (아니면 차라리 내 시집ㅎㅎ) 후보가 많았지만 결국 ⟪하얀 사슴 연못⟫으로 정했다. 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하얀 사슴 연못⟫은 시 도사의 시집 같다. 올드하지만 이 시집을 한마디로 요약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표현이다.

한 편의 시를 쓰는 과정 대부분은 ‘시를 쓴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문장을 이어 가지만, 간혹 드물게 ‘시가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문장을 쓰는 게 아닌 문장이 나오고 있다는 감각. 내게서 나왔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들 때, 그 희열. 어떻게 보면 그 순간을 향해 시를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시를 읽을 때뿐 아니라 시를 쓰면서 시와 만나질 때도 있다.

⟪하얀 사슴 연못⟫은 그런 감각으로 가득한 시집이다. 시인이 의식적으로 ‘시를 썼다’는 느낌이 아닌, 자연스레 ‘시가 되었다’는 느낌(물론 시가 되려면 시를 써야 하긴 한다). 마치 시에 통달한 도사가 신선놀음하듯 주저리주저리 말하면 그대로 시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느슨하고 천진한 화자의 어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가 기다리고 있는 세계.

누가 나에게 “어떻게 써야 좋은 시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하얀 사슴 연못⟫을 건네며 “이렇게 쓰면 좋은 시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근사한 문장 몇 줄을 가져와 시집을 소개하고 싶은데 포기했다. 좋은 시가 많아서 무엇 하나를 골라도 다른 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시 대신 시만큼 멋있는 시인의 말로 대체하겠다.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을 모두 가보기로 한다.” 전자의 결과물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후자의 결과물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

···

이 시집이 그 자체로 하나의 전시회 공간처럼 읽혔으면, 그래서 독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요소들의 생성과 변환을 느껴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앞서 말한 두 길을 모두 가본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시의 길을 두가지로 한정한 것도 좀 우습군. 길 아닌 곳도 걸어가다보면 길이 되어 있겠지.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것이다. 계속.

2023년 입동

황유원

연정모

김보나의 ⟪나의 모험 만화⟫

요즘 나는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창작실에서 지내고 있다. 회사에 휴직을 낸 김에 아예 나를 새로운 공간에 던져 두기로 한 것이다. 굳이 서울을 벗어난 이유는 지하철, 거리, 가게를 가득 메운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지고 싶어서이고, 뉴욕도 치앙마이도 아닌 원주를 선택한 이유는 긴장한 상태로 있는 것에 질렸기 때문이다.

올여름의 숨막히는 더위 앞에서 내가 가장 자주 떠올린 생각은 “결국 세상은 멸망하겠군, 인류가 정말 싫다”였다. 이런 때 필요한 건 맑고 밝은 목소리의 시집이다. 최근 나를 정화해 준 시집, 김보나 시인의 ⟪나의 모험 만화⟫를 소개하고 싶다. (‘맑고 밝은’이라는 표현은 릿터 인터뷰에서 시인이 직접 밝힌 바 있다.)

우선 릿터에 실린 ⟪나의 모험 만화⟫ 출간 인터뷰를 첨부한다. 👉 인터뷰 전문 보기

인터뷰를 읽자마자 시인이 좋아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류를 싫어한다고 말해 놓고 곧바로 금사빠적인 면모를 보이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러나 알고 있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곧바로 시집을 주문했고, 읽자마자 이번엔 시인과 친해지고 싶어졌다. - “이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듯”(나의 모험 만화)이라는 구절 때문이었을까?

물론 시인과 시 속 화자를 동일시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씩씩하고 단단한 화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생기 있는)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모험가는 세상을 사랑한다. 다시 말해 볼까? 삶을, 세상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모험의 발을 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투니버스의 축복을 받은 유년기를 보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던 마법소녀물 계보에는 관심 없었고, 악당을 무찌르거나 보물을 찾는 여정 중에 우정을 쌓아나가는 소년만화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방영 시간 맞춰 공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를 떠 둘 정도였으니 꽤나 진심이었던 것 같다)

이런 종류 만화의 매력이라고 하면, 하나의 큰 플롯을 따라가면서도 주인공 그룹이 자꾸만 모르는 마을에 들러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해 준다는 점이다. (매우 정의로운 소녀가 무리 중 한 명씩 있고, 나는 그런 캐릭터에게 자아의탁하곤 했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마을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의 편이 되고 물론 사건을 해결하고 마침내는 그들의 친구가 된다. 그것이 모험의 법칙. 

⟪나의 모험 만화⟫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을 위와 같이 생각해 볼까. 유년의 기억을 담은 1부를 지나면, 점차 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나는 특히 이주민이나 먼 땅에 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에 마음이 갔다. 집시 할머니, 결혼이주여성, 제각기 다른 음식 취향을 가진 이민자들. 시인은 그들을 손쉽게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에게 속해 있는 이야기를 손상 없이 풀어낸다. 시인이 ‘말풍선’과 ‘구름풍선’이라는 만화적 장치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이 시인이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한 발짝 더 가까이서 담아낼 용기. 용감한 줄도 모르고 용감한 사람의 용기.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진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할 수는 없다. 그들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옮겨오는 일은 조심스럽고 까다롭다. 지난 몇 달간 나는 나의 불건강한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대표적인 불건강의 신호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나는 안 저러는데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생각, 다른 하나는 ‘세계는 왜 이따위로 추할까’라는 생각. 이럴 때는 자꾸 나에게만 골몰하게 된다. 관심사가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아아 씩씩하고 명랑하고 싶어라. '모험 떠나고 싶구나' 상태가 되고 싶어라. (내가 몇 달 전 생성해 둔 유튜브 채널명은 '___의 모험'이다. 언젠가 영상을 올리는 날이 오면 공개하리…)

덧.

시에는 결말이 없다. 시는 언제나 마지막 행에서 또다시 시작된다. 그것이야말로 모험의 속성과 닮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너무 오랜만에 깨달았다.

🚶생활기

차재신: 저는 제가 예술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삶이 조여들수록 좋은 전시, 좋은 연극, 좋은 영화, 좋은 책에 대한 갈증이 심해집니다.

연정모: 휴직하면 책을 쌓아두고 읽고, 시를 일주일에 한 편씩 쓰고... 그럴 줄 알았는데요.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