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41] O월엔 좋은 일이 생김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삿포로의 숙소에서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근교로 투어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는데요, 오고가는 시간이 왕복 네 시간 정도 된다기에 버스 안에서 쓸 생각이었지만 딱 요만큼밖에 못 썼습니다. "저는 지금 홋카이도 여행 중입니다. 일일 투어 가는 버스 안이에요." 버스 안에서 쓴 글이 없으니 저 문장은 그저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투어를 신청한 이유 중 하나는 차에 실려가며 창밖 풍경을 보기 위해서였다는 걸요. 도시 바깥의 도로와 나무들과 먼 산들. 만화경을 들여다 보는 기분으로 멍하니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루하지 않았어요.

팔월에는 좋은 일이 생김. 매년 팔월 드는 생각입니다. 여행 중이라 마냥 낙관적인 상태가 된 것은 아니고요(아주 틀리진 않을지도요), 매년 이맘때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하루아침에 서늘한 바람 불어 어리둥절한 채로 깨어나는 시기에. 비록 이 이후에도 곧 다시 더위 찾아오고 그 늦더위의 기간은 매년 점점 길어지고 있지만요.

팔월 말 시원한 바람 불 때쯤엔 언제나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고 편안해진다, 는 것을 알고 나니 팔월이 시작될 때부터 기대가 됩니다.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많은 일들이 매끄러워질 것이다.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지고 팔월을 맞이해서일지 정말 꽤 괜찮은 한 달이 되곤 합니다.

아직 진짜 가을이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제가 마음이 앞선 걸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제가 머무는 이 도시가 한국보다 서늘하다는 것도 한 몫 할 거구요. 그러나 곧 걸어다닐 수 있는 계절 오리라는 거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좋은 일이 생김!"

차재신

정권 지르기

구독자로부터 '입문자를 위한 쉬운 시'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시.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묘사에 충실한 시다. 문장의 간격이나 비약보다는 사진처럼 하나의 장면을 그려 내는 데 충실한 시. 가시적인 시. 그래서 이번 시를 가져왔다.

과외 수업을 할 때 학생에게 <불꽃>을 소재로 묘사적 글쓰기를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도 같이 썼다. 라떼만 해도 시에서 묘사는 기본기라고 배웠다. 쉽게 말해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고 '이것이 시다!'라고 박박 우기지 말고 눈앞에 보이는 세계부터 똑바로 그려 내라는 뜻이다. 마치 무술의 세계에 입문할 때 정권 지르기부터 배우는 것처럼.

물론 요즘 와서 묘사에 대한 비중이 많이 줄어든 것 같지만(심지어 나도 묘사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여전히 묘사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에서의 묘사는 장면을 풀어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장면을 응축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일부러 왜곡한 장면을 왜곡한 대로 정확히 비추는 렌즈 같은 것. (시인과 독자 간의) 일종의 통로.

'다양성 추구', '내면세계 집중' 등 시에서 묘사가 점점 줄어드는 이유야 여러 가지 댈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정직하게 잘하기가 힘들어서'가 크지 않을까. 묘사는 어렵다. 보이는 것들을 보이는 대로 나열만 해서는 좋은 묘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시는 원래 묘사적 글쓰기를 한 건데 딱히 시가 안 될 이유도 없는 것 같아서 가져왔다.

여러분도 <불꽃>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나올지 상상하며 읽는 것도 재미가 되겠다. 감사합니다.

연정모

영화에서는 왜 

영화를 볼 때는 웬만하면 동생과 함께인 것이 좋다. 영화 속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을 즉각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헉, 저 사람 죽나 봐. 헉, 아까 그거 여기서 쓰려나 봐. 아, 나 어떻게 될지 알 것 같다. 이런 대화는 대부분 방 안에서 영화 볼 때 이루어지지만, 영화관 안에서도 음소거로 대강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매니까.)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손가락으로 쿡 찌르기, 몸 기대기 등이 있다.

우리가 선호하는 건 보통 히어로물, 또는 동물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 판타지는 취향이 아니지만 SF는 좋고 우주가 배경이라면 우주인보다 외계인이 나오는 편이 좋다. 평범한 인간이 주인공일 거면 아예 완벽히 평범한 이야기여야 한다. 세계의 음모에 휩쓸리지 않고 각자의 동네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걸 보고 싶다. 살인, 납치, 협박, 테러, 안 된다.

사람이 죽는 걸 그만 보고 싶다. 비록 영화 속이어도.

작년이었나, 친구가 저 말을 한 적 있다. 그런가? 하며 감자튀김을 맛나게 먹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론 나도 사람 죽는 영화를 힘들어하게 됐다.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픽픽 소모되는지 의식하게 된 것에 가깝다. 죽음이 플롯을 움직이는 장치로 손쉽게 사용되는 일이 싫다. 나를 공범 만드는 것 같아 불쾌하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잖아? 묻는다면 당연히 할말은 없다. 현실이랑 이야기를 구분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

지난 메일에서 어릴 적 소년만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새로 나오는 만화를 보기가 괴로워졌다. 이야기 안에서 너무 많은 인물이 소품처럼 다뤄진다. 오로지 설정만을 위해 끔찍하게 죽이고 안타깝게 죽인다. 꽤 인기 있는 만화, 초반에 열심히 보다가 작가가 캐릭터를 만들고 다루는 방식이 불쾌해서 하차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끔찍한 운명을 타고나, 인간성을 말소한 이들 때문에 불행에 휘말려 악인이 되고, 결국엔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물.’ 회차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자극적이고 강한 설정을 더해가는 것이 흉하다. 창작자가 자신이 만든 인물을 저렇게 대해도 되나, 자기가 형체와 인격을 만들었으면 최소한의 애정과 윤리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 못하는 사람으로 오인되고 싶지는 않다.)

이번에 쓴 시에도 수영장이 등장한다. 나는 시가 잘 안 써질 때 우선 화자를 수영장에 보내 냅다 헤엄치게 하는데, 효과가 나쁘지 않다. 나의 화자는 그곳에서 할말을 찾는다. 하고 싶었던 말을 찾는다. 이번엔 이것이었고 여기서 시작했다. “영화에서는 왜 죽기로 약속된 사람이 있는 거야.”

삼촌과 함께 수영장에 놀러간 어린 화자의 이야기를 썼다. 그곳에서는 때때로 영화가 상영된다. 어떤 영화를 보고 있는지는 구독자님이 상상해 주었으면 좋겠다.

덧)

이 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과 수영장에 갔다. 오래되고 커다란 리조트에 달린 오래된 수영장. 정말 좋았음. 물놀이 중인 모두가 가족 단위의 투숙객으로 보였는데, 아기 또는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은 대인 4인 식구는 우리가 유일했다.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늦은 오후부터는 좀 추워져, 야외에 머물기엔 무리가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실내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해가 기울어지며 창으로 빛이 비스듬 들어왔다. 햇볕은 바닥의 물기에도 공평히 쏟아진다. 미끌미끌 반짝반짝. 이곳은 천국일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는데 속 편한 소리 같아서 여기에만 쓴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누웠을 때, 언젠가 가족 휴가를 가지 못하는 때가 오면 나는 무엇으로 시를 쓸 수 있나 생각했다.

🚶생활기

차재신: 끔찍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여름의 연속입니다. 이번 달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연정모: 저는 메모장에 '시 제목'으로 쓰려고 단어를 적어두곤 하는데요, 최근 들어 메모가 추가되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일을 쉰다는 건 정말 좋은 거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