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38] 좋아하는 것을 쓰게 된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뜨거운 날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앞으로 더운 걸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더 이상 여름을 격렬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슬픈 생각도 자연히 따라오더라고요. 

지난 주엔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처음 겪는 뜨거움이었습니다. 양산을 써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해가 강했어요. 나중엔 어지러워서 조금도 걸어다닐 수가 없었고요. 길게 머물 예정이었는데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제대로 꺾인 탓에 일찌감치 여행을 끝냈습니다. 

조금 더 멋지고 도움되는 인사말을 적고 싶었는데, 계속 더위 얘기만 하게 되어 지웠습니다. 대신에 이 날씨에 전하고 싶은 한 구절을 첨부해요. 안미옥 시인의 ⟨여름잠⟩ 마지막 문장입니다.

안미옥, ⟨여름잠⟩,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문학동네, 2023

외출하실 땐 양산과 텀블러 꼭꼭 챙기시고요! 부디 팔월 편지 때는 공기 중에 편안함이 함께하길.

차재신

내 삶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 하나를 뽑으라면 극단 활동할 때를 빼놓을 수 없다. 공연 하나를 올리려고 퀴퀴한 연습실에 다 같이 모여 밤새 회의하고, 대본 외우고, 구르고, 밥 먹고, 술 먹고, 노래 부르고, 함께 자고, 다른 공연 보러 가고, 또 회의하고... 미술, 무용, 영화, 음향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소중한 인연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은 잠시 휴식기를 보내고 있지만 아직도 그때가 종종 그립다.

처음 극단에 납치돼 연기 배웠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독백 연습이었는데, 고전 ⟨오셀로⟩의 오셀로가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장면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감정 노출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남들 앞에 나서서 독백까지 하라니. 가장 벽에 부딪힌 건 분노 감정이었다. 연인한테 부들부들 화내 본 적도 없는데 의처증 남편이 돼 아내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니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어찌저찌 처음 화내는 데 성공한 후로는 연기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처음 분노를 표출한 순간에는 아내를 향한 분노보다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던 것 같지만. 한번 지르고 나니 다른 것들도 수월해졌다.

대본 분석하거나 연습할 때면 쌤은 “인물과 만나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극중 인물의 라이프 스토리 및 성격, 습관 등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상상하다 보면 인물과 만나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처음 들었을 당시에는 무척 추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연기를 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시 쓰게 된 경위를 얘기하려 했는데 자꾸 딴 길로 샜다. 연극을 본 지도, 한 지도 오래됐는데 문득 극장이 그리워져서 이번 시 ⟨소극장⟩을 쓰게 되었다. 객석에 앉은 관객으로서,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연정모

* 생과 부패 * 

여름엔 많은 것이 태어나는 동시에 또 많은 것이 부패하고 손상되기 쉽다. 여름의 강변을 걸어 보자. 아무리 잘라내도 다시 무성하게 솟아나는 풀들이 있다. 원시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되는 나무들이 있다. 풀숲에서 물웅덩이에서 새로 태어난 날벌레들이 떼로 들이닥친다. 강렬한 해가 피부에 느껴질 때마다 너무나 살아 있는 기분이다. 여름의 활기다. 

동시에 우리는 맡게 된다. 곳곳에서 유기물이 썩어가는 냄새. 생활 쓰레기가 데워지며 나는 악취. 물 비린내.

한강을 걷다가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본 적 있다. 죽은 몸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 얼른 자리를 피했는데, 함께 있던 친구는 마음이 몹시 쓰였던 모양인지 사체를 처리할 만한 기관에 연락을 남겼다. 집게와 봉투를 가진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그 몸은 온전했을까? 일부는 이미 분해되고 부패하지 않았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름에는 무엇도 원형을 유지하기 어렵다. 상온에 내놓은 치즈가 금세 상해 쓰고 역한 맛을 낸다. 과일이 썩고 무른다. 곰팡이가 핀다. 모든 사물이 깨끗하게 얼어붙고 보존되는 겨울과는 전혀 다른 생태다. 이런 감각 속에 있으면 이 세계가 진짜인 것만 같다.

*  잼 * 

이번 달 39호로 보내드리는 시 ⟨아열대의 사랑⟩은 친구 재형에게 먼저 보여 주었다. 언제나 나의 시에서 좋은 점만 읽어 주는 고마운 아이다. 이번에 가장 먼저 해 준 말은 이것이다. “너는 잼이나 청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어떤 다듬어진 평가보다도 좋았는데, 나의 사랑하는 친구가 내 여러 시가 가진 공통된 특징을 기억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그와 잼과 청 얘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쁘잖아, 등등.

아닌 게 아니라 내 시에는 과일로 만든 보존 식품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잼이나 청처럼 반고체 상태인 것도, 병절임처럼 어느 정도 본래의 형체를 유지하는 것도. 의도해서 일부러 끼워 넣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자꾸 등장하는 걸 보면 내가 보존 식품의 어떤 특성을 시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특징이라 하면 아래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_ 보존 식품이다. (부패를 막기 위하여 시간 들여 처리를 했다) 

_ 맛의 농도가 진하다, 달다. (끈적임이 상상된다)

_ 무엇보다, 보기에 아름답다. (진하게 농축된 색 그러나 어느 정도는 투명하다)

아마 나는 변형과 보존 사이의 긴장을 시적 이미지로 담아내고 싶은가 보다, 라고 괜히 적어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아닐 뿐더러 상당히 멋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생활과 삶을 어떠한 감각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가공하고 또 보존하고 싶은 거지? 자문해 보자면…

* 몸 *

나의 몸이 나의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이 내게는 있다.

*  사랑 * 

그러나 나의 사랑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자랑거리가 내게는 있다.

오늘 친구들과 모여 사랑 이야기를 했다. 지나간 연애와 미래의 사랑 얘기, 괴상하거나 상냥했던 사람들 얘기. 삶이 너절한 듯 하다가도 사랑 이야기를 하면 좀 살 것 같다. 아침 자취방에서는 사소한 수치심들과 싸워야만 했는데 (걔네는 위험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거슬린다. 달리기할 때 얼굴로 달려드는 날벌레 떼 같은 존재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아주 강해진 기분이었다. 

이 위치에 정체성과 상태로서의 사랑(또는 사랑하기)에 대한 글을 몇 줄 썼다가 지웠다. 설명하면 초라해지는 것들이 있다. 시의 멋진 점은 그런 것들을 손상하지 않고 담아낼 수 있다는 거다. 비겁한 마무리인 것 같아 머쓱하지만, 말을 더할수록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기에 이쯤에서 줄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수 있겠다.

이번 시에서 가장 먼저 쓰인 문장은 이것이다.

"이 사랑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활기

차재신: 인간의 후회는 끝이 없고 같은 후회를 반복한다.

연정모: 어제는 304낭독회에 다녀왔습니다. 저와 재신은 각각 시를 한 편씩 써 가서 읽었어요. 제 직전 차례의 낭독이 너무 슬펐던 이유로, 저는 상당히 불안정한 목소리로 글을 읽었는데요. 평소의 저라면 내려오자마자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 것 같은데 마음이 그런 방식으로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모여 마음과 시간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감각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