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49] 하나의 삶을 통과한 이후에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추워질 듯 추워지지 않는 십일월입니다. 저는 시월의 바쁜 일정을 끝내고 이 계절에 집중하고 있어요. 십일월은 정말 좋아요. 곳곳이 환하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가로막는 입자가 조금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맑은 날씨도 좋고, 거리 전체에 조명이 켜진 것 같은 은행나무들도 정말 아름다워요. 공기는 차갑지만 아직은 걸으면 몸이 따뜻해지고요.

저는 오늘 점심시간을 이용해 삼층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커다란 창에 은행잎이 가득 들어차 보이는 공간이었어요. 시나몬롤을 주문해서 커피와 함께 먹었는데요, 요즘 밀가루를 너무 잦게 섭취했는지 속이 답답합니다.

자잘한 말이나 늘어놓게 되네요. 요즘 저의 화두는 제대로 된 이야기하기인데 말이죠. (가능할까요? 언제나 가장자리만 두드리는 방식으로 써왔는데요.)

말은 많이 안 하고 싶고, 그저 최대한 많은 것을 느끼고 싶습니다.

차재신

김종삼 시선 ⟪북 치는 소년⟫

이번 책의 키워드는 ‘근현대 힙스터’. 명 박사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읽고 나니 좋아서 나도 추천한다. 요새 계속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명 박사님’ 언급을 자주 해서 죄송하긴 한데 어쩔 수 없다. 주변 사람 중 문학(특히 시)에 있어 내가 가장 신뢰하는 눈을 가진 인물이라 그렇다.

나는 아주아주 게으른 독자다. 그래서 시집을 고를 때 무척 신중하게 고민한 뒤 산다. 그렇게 해도 안 읽은 책들이 쌓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옛날 시집’들에는 눈이 덜 가게 된다. ‘요즘 나오는 것도 제대로 못 읽는 중인데 예전 것까지 찾아 읽을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그런데 명 박사가 김종삼 시집을 추천했다. 너 이거 한번 읽어 보라고.

이런 표현이 과연 온건할까? 나와 맞닿은 부분이 많은 시인이라고 느껴졌다. 비록 나는 힙스터가 아니지만, 책의 키워드를 왜 ‘근현대 힙스터’라고 했느냐 하면 마치 ‘요즘 사람’이 직접 그 시대에 가서 관찰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표현했다. 본인은 그 시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전찻길’, ‘논밭’, ‘오두막’, ‘초가집’, ‘인력거’, ‘고무신’... 모두 옛날 단어다. 개중에 지금도 익숙한 ‘왕십리’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디젤 기관차’가 튀어나오고 ‘스티븐’이 튀어나오고 ‘아우슈비츠’가 등장한다. 이국의 이미지에 대한 감상성도 없다. 그것들이 단지 자신에게 도래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응시만 있을 뿐이다. 그런 부분이 오히려 그때만의 시대성을 실감나게 한다. + ｢시인 학교｣에서처럼 시니컬한 유머는 덤이다.

무엇보다 시인의 태도가 멋지다.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고 말하는 태도.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서 ‘내가 시인은 못 된다’고 한다면, 김종삼은 ‘시/시인이라고 외치는 것의 의미 없음’을 깊이 생각하고 나직이 읊조리는 것 같다. 무엇을 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시가 되는 단계에 서서.

응시의 주체가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 세계를 바꾸려 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 외부에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닌 내게서 발생되는 사건을 바라보는 것. 김종삼의 시에 꼭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전반적인 태도가 나의 지향점(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과 맞닿아 있다.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내 시에는 시대가 없다. 그러나 김종삼의 시에는 거대한 이념이나 첨예한 담론 없이도 시대가 담겨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내 시에도 김종삼이 말하듯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로 시대가 담길까? 지금은 모른다. 생각해 볼 문제다. 만약 김종삼이 지금, 2025년을 경유하고 있다면 그는 어떤 시대를 살아갈까? 

사진은 본문에 인용한 시 중 하나인 〈올페〉. 가급적 책 이미지를 안 쓰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간지 그 자체인 시다. 

연정모

이실비 ⟪오해 또는 오후의 해⟫

요즘 나의 관심사는 이것이다. 

무엇이 좋은 이야기인가? 좋은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와는 다르다)

며칠 전,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좋은 영화였다. 극장에서 나오면서 내내 울었고,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들어간 카페에서도 중간중간 훌쩍거렸다. 일기를 쓰면서도 좀 더 울었다. 아마 여러분도 각자의 방식으로 느껴왔겠지만, 이런 때는 단순히 ‘그 이야기가 슬퍼서’, ‘저 사태를 보니 분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건 아니다. 

내가 모르던, 어느 하나의 삶을 통과한 이후에 느껴지는 총체적인 감정. 고통과 애정과 슬픔과 지리멸렬과 지지부진과 통쾌함을 두 시간만에 겪고 난 후의 고양감. 그런 것이 있다.

영화관 안에서의 두 시간 동안, 관객은 연출자가 구성해낸 세계를 따라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의도 속에 있다(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관객에게 달려 있음과 별개로). 그가 전하고 싶은 바를 그가 보여주고 싶은 방식으로, 그가 정한 시간 동안 고스란히 경험한다. 두 시간 후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건 오로지 좋은 이야기만이 할 수 있는 일.

물론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영화에 한정된 이야기고,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연출자(및 각본가)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럼 어떻게,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가?

물론 연출하는 이의 기술적 탁월함도 한몫할 것이다. 그는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며 별로인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는 눈을 길렀을 것이고, 소품과 대사를 세련되게 배치하는 훈련을 해왔을 것이며, 인물을 드러내고 숨기는 방식에도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사한 촬영 및 편집 결과물은 하루에도 수없이 보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우릴 다른 존재로 만드는 데 실패하고 기억 뒤로 잊힌다. 그러니 기술만으로는 이토록 깨끗한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시 저 영화로 돌아와보자. 내 친구 J는 이런 평을 남겼다. “내가 지금부터 피나는 노력을 한다고 해서, 이 감독처럼 인간을 바라볼 수 있을까?” 

이실비의 첫 시집, ⟪오해와 오후의 해⟫ 앞날개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타인의 고통과 이어지면서도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송현지 평론가의 해설 일부다. 배움이 미진하여 시집 해설은 절반쯤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이 시집의 해설은 아주 정확하고 힘 있게 다가왔는데, 그건 이실비의 시가 정확하고 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1월의 첫날, 바닷가 카페에 앉아 이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었다. 어떡하지, 너무 잘 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쓸 수 있지. 어쩜 이렇게 쓸 수 있지. 내 옆에 바다가 있고… 그런 풍경이 전부 사소하게 느껴지는 읽기 경험이었는데…

이 시집을 칭찬하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시 안에서 이미지나 색채를 매끄럽게 전환하여 읽는 이를 멀리 보냈다 다시 훌쩍 끌어오는 방식이나,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분명한 구성 및 마지막 부의 폭발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시들을 크고 넓게 잇는 세계관 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인이 사람과 세계를 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할 거라 예상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무릎 아래로는 담요를 함께 나누어 덮어도 좋겠다.

이실비는 밝은 눈으로 본다. 정직한 눈으로 본다. 과하게 미끄러지지 않고, 침묵이 두려워 말을 서두르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한다. 산만하게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써야 할 것을 끝까지 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 이실비의 등단작 ⟨조명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잊지 않고 세어본다” 이 시의 화자는 극장의 맨 뒤, 조명실에 앉은 사람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성급히 알려고 하거나 추측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끝까지 보고 있다. 아마 이 화자는 영화가 끝나고 관객 모두 떠난 후에도 거기 앉아 있을 것이다. “잊지 않고” 계속 그들이 떠난 자리를 볼 것이다. 

나는 잘 보고 싶다. 

🚶생활기

차재신: “우주의 면면을 세세히 느끼고 경탄하고 싶다면, 그저 우주를 손에 쥐면 된다.”

– 네, 방금 제가 만든 말입니다. 스팀덱(게임기) 사용 후기로요. 작은 기기 안에 정말 무한한 우주가 펼쳐져 있어요.

연정모: 요즘 나의 생활이 어땠지...? 돌아보는데 딱히 설명으로 묶을 수 있는 게 없네요. 집에 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