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기록, 평범도 범이다입니다🐯
가정의 달 5월이 어느새 끝나 가네요. 여러 공휴일이 있어서인지 유독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는데요. 독한 감기가 유행성으로 돌기도 했다는데, 건강히 지내셨는지요?
특히 올해 5월은 마음이 뒤숭숭했던 것 같아요. 지금 2-30대가 몸소 겪지는 못했지만 결코 모를 수가 없는 5·18 민중항쟁에 관하여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잠시 잊고 지내는 시기도 있죠. 그래도 우리는 그 가치를 머릿속에서 꺼내 말끔히 닦아 흐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 생각해요.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오늘 범레터에서는 민주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5월 광주와 원주 아카데미 극장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희 평범도 범이다 또한 이번 레터를 준비하며 무얼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지 차근히 알아볼 수 있어 참 좋았답니다. 😊
레터의 마지막 장엔 읽다 보면 마음이 말랑~해지는 이야기, 호랑이표 꿀떡까지 준비했으니 챙겨 가세요! ✨
오늘의 범레터가 건네는 이야기
🎼 칼럼|임을 위한 행진곡의 유래
🔎 영상|광주의 오늘과 오월 사이
📽️ 인터뷰|극장은 무너져도 시민은 무너지지 않는다
🔔 오늘의 꿀떡|한 지붕 아래, 두 가족
칼럼|임을 위한 행진곡의 유래
: 민주주의를 위한 두 열사의 삶과 5·18 민중항쟁의 가치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에 5·18 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인 윤상원 열사와, 노동운동·야학운동 활동을 한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을 위해 제작된 곡입니다. 오월의 정신을 담고 있는 이 민중의 노래는, 독재 정권의 폭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 낸 열사들을 추모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곡은 전국의 수많은 투쟁 현장에서 민중을 하나로 결집하며 뜨겁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박기순 열사는 1976년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에 입학한 이후 사회과학 서클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을 접하게 됩니다. 이후 1978년 6월, 전남대 교수 11명이 선언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한 이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교수 전원이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박 열사는 이에 저항하고자 전남대 정문에서 조선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가두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되었으나 박 열사는 좌절하지 않고 광주·전남 지역 최초로 공장에 위장 취업 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78년 7월, 박 열사는 지역 노동 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동 야학인 ‘들불야학’을 창립하여 광주 지역의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 운동에 나섰습니다. 지식인의 특권 의식을 버리고 노동자와 평등하게 연대해야 한다는 실천 의식을 바탕으로, 들불야학은 구성원을 ‘교사’와 ‘학생’ 대신에 ‘강학’과 ‘학강’으로 구분하여 연대 의식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동년 12월, 박 열사는 고된 공장 노동과 야학 활동을 병행하던 중에 연탄가스 누출로 인하여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영면에 들게 되었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군 제대 이후, 반유신 활동가들과 학습 모임을 가지며 노동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1978년, 윤 열사는 졸업 후 주택은행에 입사한 후에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저항해 수배자가 된 후배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를 계기로 사회 변화를 결심하게 된 윤 열사는 은행원의 삶을 그만두고 광주공단에 위장 취업을 하였습니다. 이후 박기순 열사의 권유를 받아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합류하였으며, 박 열사의 영면 이후에는 야학운동의 뜻을 이어받아 ‘들불야학’을 이끌었습니다.
1980년 5월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신군부의 학살이 시작되자, 윤상원 열사는 야학 동지들과 함께 항쟁의 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계엄군의 학살을 목격한 윤 열사는 야학 동지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는데요. 또한, 항쟁 기간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기획하여 시민들의 단결력을 강화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윤 열사는 최후까지 시민을 지키기 위해 무기 반납과 투항을 주장하던 수습대책위원회에 대항하여 전남도청에 ‘도청항쟁지도부’를 결성하고 시민군의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당월 26일 오후, 윤상원 열사는 기자회견을 개최했습니다. 외신 기자들에게 피해 상황을 전달하고 ‘우리는 오늘 패배한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란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죠. 열사는 다음 날 새벽에 계엄군이 진입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청을 지키던 청소년들에게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며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진입이 시작되자 윤 열사는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시민들과 함께 전남도청을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그렇게, 윤상원 열사는 도청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산화하였습니다.

5·18 민중항쟁 이후 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서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의 넋을 기리기 위한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이 거행됐습니다. 2달 뒤,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영혼 결혼식을 기념하고 오월의 항쟁 정신을 기록하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가 제작되었는데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로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개작하여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이며 탄생했습니다.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중항쟁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5·18 민중항쟁은 평범한 시민들이 국가 권력의 불법적인 폭력에 저항하여 공동체의 정의를 지켜낸 우리 민주주의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또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두 열사의 가치와 5·18 민중항쟁의 정신을 담고 있는 연대의 상징이기도 하죠.
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상기하며 숭고한 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앞서간 이들의 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 내야 합니다. 혹여나 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 왔다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 없이 불의에 저항하여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1980년 윤 열사의 말처럼,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올 테니까요.

영상|광주의 오늘과 오월 사이
지난 5월 17일과 18일,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5월의 광주가 간직한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살폈는데요. 그 전후로 독립서점을 구경하고 창억떡, 카페를 즐기는 등의 광주의 일상까지 담아 보았습니다.
특히, 5·18민주화운동기록관과 전일빌딩245 등을 방문하며 광주에 남아 있는 오월의 기억을 짚어볼 수 있었는데요. 사진과 문서, 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이 시민들의 삶에 깊이 남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체감하였으며, 전일빌딩245에 남아 있는 탄흔은 1980년 5월의 시간이 여전히 광주 곳곳에 남아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브이로그에는 광주의 오늘을 즐기고, 오월의 흔적을 함께 따라가 본 하루가 담겼습니다. 평범도 범이다가 만난 5월의 광주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의 브이로그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인터뷰|극장은 무너져도 시민은 무너지지 않는다
평범도감_9호 : 원주 〈아카데미의 친구들〉 이야기
지난 4월 10일, 원주 아카데미 극장 철거에 대한 반대 시위를 벌이다 업무방해죄 등으로 기소된 시민 24인이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2년 6개월간 이어진 법적 싸움이 시민의 승리로 끝이 난 것입니다. 1963년 개관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은 국내에서 그 원형을 보존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었습니다. 본래 시민들의 공유 공간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원주시의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으로 2023년 철거되었습니다.
아카데미 극장은 사라졌지만, 극장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아카데미의 친구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극장은 무너져도 시민들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평범도감에서는 지역의 문화 민주주의와 공공성 회복을 위해 힘써 온 ‘아카데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Q1. 자기소개와 ‘아카데미의 친구들’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네, 저는 아카데미 친구들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동화라고 합니다. 원주에 이주한 지 11년차고 원주에서 동네 책방을 운영했어요. 동네 책방과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첫 책으로 아카데미 극장에 대한 인터뷰집을 냈고, 그걸 계기로 아카데미 극장 보존 운동에 동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장이 철거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아카데미의 친구들이라는 시민 모임을 조직했고 그 이후 철거 투쟁을 하면서 24년에 시민단체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 극장 같은 경우에는 1963년도에 원주에 개관한 단관 극장이에요. 단관 극장은 관이 하나인 극장을 말하는데요. 원주의 abc 도로 아시죠? 그중 c도로에 5개의 단관 극장이 있었고, 그 극장들을 한 명이 모두 소유하고 있는, 영화사적으로도 희귀한 케이스가 원주에 있었어요. 근데 이제 멀티플렉스가 생기면서 다 철거됐고요. 아카데미 극장이 마지막으로 남은 극장이었어서 이걸 보존해서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이자 공유 공간으로 활용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이를 위해 시에서 매입을 했는데, 바로 다음에 시장이 바뀌면서 철거 정책이 변경되었고 그걸 막기 위해 시민들이 투쟁을 했던 거고요. 그 이전 6~7년 동안 아카데미 극장 보존을 위해 많은 노력들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주요한 것들을 말씀드리자면, 일단 시정 정책 토론이라는 주민참여 조례가 있어요. 그 토론을 청구하려고 했는데 원주시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보완하라고 했거든요.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반되는 것인데도요. 이런 식으로 절차상의 방법들을 차단하면서 시와 대립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도 일어났어요.
이를 두고 원주시가 고발해서 24명의 시민들이 2년 정도 재판을 받기도 했어요.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고, 2심(항소심)에서도 검찰 측 항소가 기각되면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죠.
극장은 무너졌지만, 또다른 모두의 것(커먼즈)을 위협하는 사례들이 많아요. 그런 것에 대응하고 목소리를 내고자 아카데미 친구들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Q2. 단체가 결성된 이후 지금까지,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사실 제가 원주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근데 지난 10년 동안 문화 생태계가 조금씩 만들어졌고, 그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시민들이 더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점 공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어요. 특히 문화예술인들에게는 너무 소중하고 기대가 되었던 공간이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철거에 대해 수용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서라도 막아내고 싶었고, 시정 정책 토론과 같은 조례나 지역 문화 진흥 정책을 직접 공부하면서 행정의 오류를 찾아 잘못을 지적해 왔어요.
성과라고 하면 시정정책토론 조례를 개정한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기존에 ‘선거권자’ 규정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보완을 요구해 왔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절차였고 행정 편의에 가까운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해당 조항을 삭제해 시민이면 누구나 청구할 수 있도록 조례를 바꿨습니다. 개정 당일에는 함께한 활동가들과 케이크에 초를 꽂고 조용히 축하를 나눴던 기억이 남아 있네요.
또, 시민들이 흩어지지 않고 부당한 것에 저항하면서 시민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감각을 만들어 냈다는 것 역시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Q3. 지난 4월, 철거 반대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에 대해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그 판결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1심과 2심 판결의 논지는 거의 동일했습니다. 6년 간의 보존 과정과 그것이 급격히 뒤집히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이 형식적으로만 수렴되었을 뿐, 실질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법원 역시 이를 ‘숙의’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거죠. 민주 사회에서 시민의 참여와 표현의 권리는 시정 행정보다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시민을 형사 처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판결문에 담겨 있었어요.
(중략)
법원은 시민들의 행위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적 의사 표현에 해당하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판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재판이 원주시에서 시민들을 업무 방해로 고발하면서 이루어지게 된 건데요. 사실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철거 업체는 이미 처벌 불원서를 내기도 한 상황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시민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한 방법으로 법적 고발을 한 것인데요. 전국적으로 다양한 투쟁 현장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통제하는 횡포가 벌어집니다. 이번 판결을 통해 시민이 공적 관심사에 목소리내는 것이 묵인되지 않고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Q4. 현재 원주의 문화예술 정책이 가진 한계는 무엇이며, 그 안에서 시민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아무래도 문화예술인들이 이런 정책에 대한 관심도 크고 다른 노동에 비해 가치지향적이다보니, 문화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의지가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아요. 지역 문화 진흥 기본 계획을 공부하거나 방향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현장의 인식과는 달리 행정은 문화 정책을 정권의 치적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죠. 이는 정당과 상관없이 고질적인 문제였다고 봐요.
그리고 기초 재단의 정책이나 운영이 행정과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원주의 경우 문화재단의 이사장이 시장이고, 대표이사가 비전문가인 시장의 측근인 상황이에요. 그러다 보니 문화 정책에 대한 전문성 없이 운영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존의 정책이 사라지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인이나 시민이 재단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거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지 않은 것이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죠.
아카데미 극장 투쟁이 지역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면서 아카데미 극장 투쟁 사례를 들어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민주권을 강화하라는 요구들이 시민사회에서 나오고 있어요. 이 사건이 지역 인식의 전환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시민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요구하고, 시민들의 의견이 정책에 잘 반영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Q5. 홍천 ‘풍천리를 지키는 나무들’, 원주 시설관리공단 투쟁 등 아카데미의 친구들에서 강원 지역의 다른 투쟁 활동과도 연대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 활동이 아카데미의 친구들과 지역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나요?
A. 처음 극장을 지킬 때는 시민으로서 이 공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했었는데요. 그때는 그게 당연히 될 줄 알았어요. 시정 정책 토론 제도가 있으니 300명만 모으면 당연히 토론하고, 숙의를 통해 결정할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심지어 고발까지 해서 제 친구들이 수갑을 차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었고요. 그런 일들을 통해 민주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몸으로 체감하게 되었어요.
아카데미 극장 같은 경우에도 시에서 매입하기는 했지만, 원주시의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것이잖아요. 근데 4년의 임기를 가진 시장 한 명이 60년의 역사를 통째로 없애 버리는 것을 보면서 그런 막강한 권한을 누가 줬는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설악산 케이블카 투쟁도 그렇고, 홍천 투쟁도 그렇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배제된 채 프레임화된 논리로 개발이 정당화되는 것들이 굉장히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카데미 극장이 공공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도 공공재이고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것들이 누구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들인데, 그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희가 극장 앞에 섰을 때, 대부분 문화예술을 하는 친구들이다 보니까 연령대가 낮았어요. 정치적으로 기득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절박하게 목소리를 내더라도 쉽게 패싱되더라고요. 소수자와 약자는 그러면 계속 이렇게 내어주기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젠더, 환경, 노동, 장애인권 등 다양한 투쟁 현장에 관심이 생겼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되었던 거죠.
Q6. 아카데미의 친구들의 활동에 있어서 ‘모두의 것’, ‘공공재’와 같은 개념들이 핵심 키워드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러한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저희 캐치프레이즈가 “극장은 무너져도 시민은 무너지지 않는다”와 “모두의 것을 지키는 사람들”인데요. 시스템의 구멍에 한번 굴러 떨어지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잘못된 것들이 눈에 훨씬 잘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저희가 투쟁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중 하나는, 나이가 더 많거나 그 지역에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이 결국 권력이나 기득권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어요.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는 권력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횡포를 부리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저는 원주에서 1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도 외지인이라는 욕을 들으면서 살거든요. 저항하기 전까지는 이주민이라고 환영받았었는데, 저항하는 순간 그것이 결점이 되어 버린 거죠.
사실 몇 년 동안 권력자를 대상으로 싸운다는 게 쉽지 않아요. 지치기도 했죠. 그런 어려움도 있지만 계속 목소리를 내고 저항해야 우리의 세력들이 더 커지잖아요.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기 때문이에요. 저희가 무작정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소수자가 배제되지 않고, 권력이 없다고 해서 묵인되지 않아야 하고,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게 부끄럽더라도 그건 바로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져 있어요.
현 시장이 이번에 재선에 도전하는데요. 시민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본인들의 고발이 정당했다고 기자회견을 했어요. 저는 그게 바로잡는 게 부끄러워서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바로잡게 되면 자신의 권력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죠.

Q7. 〈평범도 범이다〉의 지면을 빌려 독자들에게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고 싶은 사안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A. 설악산 케이블카 투쟁도 30년을 싸워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개발 계획을 멈췄는데 또 개발하고, 10년 동안 싸워서 ‘이제 끝났다’ 했는데 또 개발하고 하는 식으로요. 특히 강원특별법이 시행되면서 도지사에게 개발 권한이 집중되었고요.
사람들은 강원도와 원주가 낙후되었고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는 정말 강원도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까 궁금해요. 제가 만난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살고 싶어 했거든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이웃들을 만나고, 오랫동안 어떤 공동체와 함께 살아왔는데, 왜 그 공동체를 다 파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홍천 얘기인데, 할아버지가 심은 잣나무로 가족들이 먹고 살고 해왔는데, 그런 것들을 다 잘라 버리고 고향에서 내쫓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정작 그렇게 해서 생산된 전기는 홍천 주민들이 하나도 쓸 수 없고요. 착취당하는 거죠.
그저 개발 대상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오래된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 좀 더 지속 가능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그런 투쟁들에 많이 연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Q8.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나 최종 목표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것 같아서,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최대한 느슨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오랫동안 하고 싶어요.
지역에서 오래 살아남아서 부당한 일이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고, 상처받은 소수자들이 모여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싶습니다. 저희가 극장 앞에서 절박하게 싸웠던 것처럼, 많은 곳에서 지금도 그렇게 싸우고 있는데요. 그런 곳에 함께하면서 목소리를 키워 주는 단체로 오래 남았으면 해요.
Q9. 마지막으로 못다 한 말이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A.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말 궁금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냥 모른 척하고 사는 것 같아요. 기후위기를 넘어 재난에 가까운 멸망이 가까워 오고 있고, 사람들은 점점 더 양극화되고 서로를 혐오하고 있어요. 너무 큰 흐름이다 보니 직시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때일수록 내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잖아요. 저 한명이 전쟁을 멈추거나 파괴를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무력해지지 말고 내 주변에서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하자. 그리고 지치지 말자. 꾸준히 작은 것부터 계속해 나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꿀떡|한 지붕 아래, 두 가족
가정의 달로 불리는 5월, 그중 21일은 ‘부부의날’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이는 건전한 가족문화의 정착과 가족해체 예방을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입니다.
이렇듯 가족의 결속과 단합을 중요하게 여기는 국내 정서에 따라 높아지는 이혼율과 낮은 출생률 해결을 위해 정부는 다양한 정책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이성애와 혈연 관계로 이어진 ‘정상성’에만 국한되어, 그 범주 밖의 가정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벽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을 벗어나,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동시에 이러한 삶의 형태를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하자는 목소리도 함게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의 꿀떡에서는 새로운 탄생 속에 있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개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입양 가족
: 오래전부 존재해 온 가족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혈연 중심 사회에서 편견의 시선이 존재하며 입양 관련 제도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성혼
: 우리나라는 아직 동성 부부의 법적 혼인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대만과 태국이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며 아시아에서도 합법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기에, 국내의 동향에 관심이 쏠리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생활동반자법
: 결혼이나 혈연관계로 맺어지지 않았더라도, 서로를 반려자로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돌봄 관계와 공동체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최근 들어 자주 논의되는 추세입니다.
잠깐, 꿀떡까지 잘 챙기셨나요? 😎
오늘 범레터는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보며, 앞으로 나아갈 곳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는 여러 이야기를 담았는데요. 속도가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한 발짝씩 움직이는 사회가 되면 좋다는 소망을 품고 마무리해 보려 합니다.
요 며칠 비가 오고 날이 다시금 서늘해진 듯하네요. 큰 일교차에 건강 유의하시고, 늘 행복한 일이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다음 범레터에서 다시 만나요 🐯
📧 6월 26일, 다음 범레터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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