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Alex
여러분은 군대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고된 작업, 인간관계, 고립된 생활 등 여러 답이 나올 것 같은데요.
제게는 '까라면 까는' 문화였습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 정하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런 장면을 자주 봤습니다.
이 방식의 진짜 문제는 사람이 생각을 멈춘다는 데 있습니다. 위에서 정해주면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요. 편합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생각을 멈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계급이 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방식 그대로 결정을 내립니다. 제가 본 군대는 그렇게 다 같이, 하향평준화되고 있었습니다.
군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윗사람의 말에, 혹은 다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압박은 어느 조직에나 있습니다.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은 대개 '유별난 사람'이 됩니다.
래퍼 칸예 웨스트는 한 인터뷰에서 세상을 향해 목이 터지도록 자기 생각을 외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개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생각이 틀렸더라도 말입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개인이 왜 다수의 의견과 사회적 합의에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미국의 철학적 뼈대를 세웠다고 평가받는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기 신뢰>입니다.
다소 거친 글입니다. 저는 그 점이 좋았습니다.
재밌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에디터 픽!
- 인간이 되려는 자는 순응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선함에는 날이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함이 아니다.
-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의견대로 살기는 쉽다. 고독 속에서 자기 의견대로 살기도 쉽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군중 한가운데서도 고독의 독립성을 완벽한 온화함으로 지켜낸다.
- 순응하지 않으면 세상은 불쾌감이라는 채찍으로 당신을 때린다.
- 지금 생각하는 바를 단호한 말로 하라. 그리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바를 다시 단호한 말로 하라.
에세이
본 아티클은 <Self-Reliance>의 내용을 번역 및 편집한 글임을 밝힙니다.
인간이 되려는 자는 순응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불멸의 영예를 거두려는 자는 '선'이라는 이름에 가로막혀서는 안 되고, 그것이 정말 선인지 따져 물어야 한다. 결국 신성한 것은 자기 정신의 온전함뿐이다. 먼저 자기 자신 앞에서 떳떳해져라. 그러면 세상의 지지가 따라온다.
아주 젊었을 때 존경하던 조언자에게 했던 대답이 기억난다. 그는 교회의 소중한 옛 교리를 들이밀며 나를 끈질기게 설득하곤 했다. 내가 "온전히 내면을 따라 산다면 전통의 신성함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충동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온 것일 수도 있네." 나는 대답했다.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그때는 악마를 따라 살겠습니다."
내 본성의 법칙 말고는 어떤 법도 내게 신성할 수 없다. 선과 악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너무도 쉽게 옮겨 붙는 이름일 뿐이다. 유일한 옳음은 내 본성에 맞는 것이고, 유일한 그름은 내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반대 앞에서도 자기 외의 모든 것은 이름뿐이고 덧없다는 듯 처신해야 한다.
우리가 휘장과 직함, 거대한 단체와 죽은 제도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는지 생각하면 부끄럽다. 점잖고 말 잘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내게 영향을 주고 나를 흔든다.
나는 꼿꼿하고 생기 있게 나아가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거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악의와 허영이 박애의 외투를 걸쳤다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성난 편견에 찬 자가 노예제 폐지라는 관대한 대의를 내세우며 바베이도스에서 온 최신 소식을 들고 나를 찾아온다면, 왜 이렇게 말하지 못하겠는가.
'가서 당신 아이나 사랑하시오. 당신 집 장작 패는 일꾼이나 사랑하시오. 너그럽고 겸손하시오. 그런 품위부터 갖추시오. 수천 마일 떨어진 흑인들을 향한 이 믿기 어려운 다정함으로 당신의 냉혹하고 매정한 야심을 덧칠하지 마시오. 먼 곳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집안에서는 악의일 뿐이오.'
이런 인사는 거칠고 무례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사랑을 가장하는 것보다 아름답다.
선함에는 날이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함이 아니다.
사랑의 교리가 칭얼대고 징징댈 때는 그 해독제로 증오의 교리를 설파해야 한다. 내 천재성이 나를 부르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형제도 멀리한다. 문설주 상인방에 '변덕'이라고 써 붙이겠다. 결국에는 변덕보다 조금은 나은 무엇이기를 바라지만, 해명하느라 하루를 다 보낼 수는 없다. 내가 왜 사람을 찾고 왜 멀리하는지 이유를 대리라 기대하지 마라.
오늘 어떤 선량한 사람이 그랬듯, 가난한 사람 모두를 좋은 처지에 놓아줄 의무가 내게 있다고도 말하지 마라. 그들이 내 가난한 사람들인가? 어리석은 박애주의자여, 분명히 말해두건대 나는 내게 속하지 않고 내가 속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주는 1달러, 10센트, 1센트도 아깝다.
영적 친화로 보아 나와 운명을 함께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필요할 때 감옥에도 가겠다. 그러나 당신들의 잡다한 대중 자선, 바보들을 위한 대학 교육, 지금 많은 예배당이 그렇듯 헛된 목적을 위한 예배당 건립, 술주정뱅이에게 주는 적선, 그리고 수천 가지 구호 단체는 다르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때로 굴복해 1달러를 내놓지만, 그것은 사악한 1달러이며 머지않아 나는 그것을 거부할 만한 기개를 갖추게 될 것이다.
세간의 평가에서 미덕은 규칙이라기보다 예외에 가깝다. 사람이 있고, 그와 별개로 그의 미덕이 있다. 사람들은 용기나 자선 같은 이른바 선행을 하는데, 그 방식은 매일 열병식에 불참한 대가로 벌금을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행위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이나 정상참작의 호소다. 병자와 정신이상자가 비싼 하숙비를 치르는 것과 같다. 그들의 미덕은 고행이다.
나는 속죄하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내 삶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구경거리가 아니다. 화려하지만 불안정한 삶보다는 음조가 조금 낮더라도 진실하고 한결같은 삶이 훨씬 좋다.
나는 내 삶이 건전하고 상쾌하기를, 식이요법이나 사혈 같은 처방이 필요 없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인간이라는 일차적 증거를 요구하며, 사람 대신 그의 행위를 증거로 내미는 호소를 거부한다. 나 자신에게는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하든 삼가든 아무 차이가 없다. 본래 내 권리인 특권에 값을 치르는 일에 동의할 수 없다. 내 재능이 아무리 적고 보잘것없어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며, 나 자신이나 동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이차적 증언은 필요 없다.
내가 신경 쓸 것은 내가 해야 할 일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다.
이 규칙은 실생활에서나 지적 생활에서나 지키기 어렵지만, 위대함과 비천함을 가르는 기준 전체가 될 수 있다.
이 규칙이 특히 어려운 이유는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당신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의견대로 살기는 쉽다. 고독 속에서 자기 의견대로 살기도 쉽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군중 한가운데서도 고독의 독립성을 완벽한 온화함으로 지켜낸다.
이미 생명을 잃은 관습에 순응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신의 힘을 흩어놓기 때문이다. 시간을 잃게 하고 당신이라는 사람의 인상을 흐린다. 죽은 교회를 유지하고, 죽은 성서공회에 기부하고, 정부 편이든 반대편이든 거대 정당을 따라 투표하고, 비천한 살림꾼처럼 남 보기 좋게 식탁을 차린다면, 이 모든 가림막 아래서 나는 당신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만큼의 힘이 당신 본연의 삶에서 빠져나간다. 당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을 알아볼 것이다. 당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를 단련하게 된다. 이 순응이라는 게임이 얼마나 눈 가리고 하는 술래잡기 같은지 생각해 보라.
당신의 종파를 알면 나는 당신의 주장을 미리 안다. 어떤 설교자가 자기 교회 제도 하나의 효용을 설교의 본문이자 주제로 삼겠다고 발표한다. 그가 새롭고 즉흥적인 말을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미리 알지 않는가? 그가 제도의 근거를 검토하는 척 온갖 과시를 하겠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검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가 한쪽 면, 즉 허락된 면만 보겠다고, 한 인간이 아니라 교구 목사로서 그러겠다고 스스로 서약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는 고용된 변호사이고, 판사 같은 그 태도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허세다.
대부분 사람은 이런저런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이런 의견 공동체 중 하나에 매여 있다. 이 순응은 그들을 몇몇 사안에서만 거짓되게 만들거나 몇 가지 거짓말의 장본인으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안에서 거짓되게 만든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모두 온전한 진실이 아니다. 그들의 2는 진짜 2가 아니고, 그들의 4는 진짜 4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를 언짢게 하고,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자연은 우리가 따르는 당파의 죄수복을 재빨리 입힌다. 우리는 똑같은 얼굴과 체형을 갖게 되고, 점차 더없이 온순한 당나귀 같은 표정을 얻는다. 특히 굴욕적인 경험이 하나 있는데, 이는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바로 '칭찬하는 바보 같은 얼굴', 즉 마음이 편치 않은 자리에서 관심 없는 대화에 응하며 짓는 억지웃음이다. 저절로가 아니라 저급하고 주제넘은 고집에 이끌려 움직인 근육은 얼굴 윤곽을 따라 굳어지며 더없이 불쾌한 감각을 남긴다.
순응하지 않으면 세상은 불쾌감이라는 채찍으로 당신을 때린다.
그러므로 사람은 찌푸린 얼굴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구경꾼들은 거리에서도 친구의 응접실에서도 그를 곁눈질한다. 그 반감이 그 자신처럼 경멸과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가 슬픈 얼굴로 집에 돌아가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군중의 찌푸린 얼굴은 웃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깊은 이유가 없다. 바람 부는 대로, 신문이 지시하는 대로 썼다 벗었다 하는 가면일 뿐이다. 그래도 군중의 불만은 의회나 대학의 불만보다 무섭다. 세상을 아는 굳건한 사람이라면 교양 계층의 분노쯤은 쉽게 견딘다. 그들의 분노는 점잖고 신중하다. 그들 자신이 매우 취약해 소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에 민중의 분개가 더해질 때, 무지하고 가난한 이들이 들고일어날 때, 사회 밑바닥에 깔린 생각 없는 야만적 힘이 으르렁대며 이를 드러낼 때, 이를 신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기려면 관대함과 신앙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우리를 자기 신뢰에서 겁먹고 물러서게 하는 또 하나의 공포는 일관성이다. 과거의 행동이나 말을 떠받드는 태도다. 남들의 눈에는 우리의 궤도를 계산할 자료가 과거 행동밖에 없고,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키기 싫어한다.
그런데 왜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살아야 하는가? 이런저런 공개 석상에서 했던 말과 어긋날까 두려워 왜 기억이라는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는가?
자기 말과 모순된다고 해 보자.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지혜의 규칙은 이런 것 같다. 순수한 기억의 영역에서조차 기억에만 기대지 말고, 과거를 천 개의 눈을 가진 현재 앞으로 불러내 심판받게 하며, 늘 새날을 살아라.
형이상학에서 당신은 신에게 인격이 있음을 부정했다. 그러나 영혼에 경건한 움직임이 일어나면, 설령 그것이 신에게 형상과 색채를 입히더라도 마음과 삶을 다해 따르라. 요셉이 창녀의 손에 외투를 남겨두고 달아났듯, 당신의 이론을 내버려두고 달아나라.
어리석은 일관성은 좁은 마음에 붙어 사는 도깨비이며, 소인배 정치가와 철학자와 성직자가 숭배하는 우상이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차라리 벽에 비친 자기 그림자나 신경 쓰는 편이 낫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단호한 말로 하라. 그리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바를 다시 단호한 말로 하라.
설령 그것이 오늘 한 모든 말과 모순되더라도. "아, 그러면 틀림없이 오해받을 텐데." 오해받는 게 그렇게 나쁜가? 피타고라스도 오해받았다.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도, 육신을 입고 태어난 모든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혼이 오해받았다.
위대하다는 것은 오해받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지가 아무리 이리저리 뻗어 나가도 결국 그 존재의 법칙 안으로 둥글게 수렴한다. 안데스나 히말라야의 울퉁불퉁함도 지구의 곡선 앞에서는 미미하듯이.
그를 어떻게 재고 시험하든 마찬가지다. 인격은 아크로스틱이나 알렉산드리아 시구와 같다. 앞으로 읽든 뒤로 읽든 가로질러 읽든 같은 말이 된다. 신이 내게 허락한 이 즐겁고 참회하는 숲속 생활에서, 앞날도 지난날도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정직한 생각을 기록하자. 그러면 내가 의도하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그 기록이 대칭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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