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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영국 추리소설, 『사일런트 페이션트』③ 예술 치료,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리다

영국 예술 치료의 탄생과 소설 속 치료사의 딜레마

2026.01.18 | 조회 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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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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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부, 더 그로브 정신병원의 미술실. 한 여자가 캔버스 앞에 서 있다. 6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다. 심리치료사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붓을 움직이며 캔버스 위에 색을 올린다.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지만, 붓이 천에 닿는 소리, 물감이 섞이는 소리, 그녀의 숨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일종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알리시아 베렌슨은 말하지 않지만 그림으로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그림으로 증언한다. 법정에서 할 수 없었던 증언을, 치료실에서 거부한 증언을 캔버스 위에 펼쳐놓는다. 그녀의 그림들은 침묵의 번역이고 고통의 지도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주문이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사일런트 페이션트에서 그림은 단순한 장식이나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소설의 줄거리를 꿰뚫는 진실의 열쇠이며 침묵과 목소리 사이를 잇는 다리다. 이번 주 우리는 그 그림들을 들여다본다. 예술은 어떻게 언어가 되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은 어떻게 한 사람의 증언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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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스티스, 침묵의 자화상

 

테오가 처음 그 그림을 본 것은 인터넷에서였다. 검색창에 알리시아 베렌슨을 치자 가장 먼저 뜬 이미지. 그는 자세히 보기 위해 확대했고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림은 알리시아의 자화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자화상과도 달랐다. 이젤 앞에 벗은 채로 서 있는 알리시아의 피부는 창백했다. 거의 반투명해서 푸른 혈관이 비칠 정도였다. 그녀는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은 것처럼, 유령 같으면서도 시체 같아 보였다.

양쪽 손목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것처럼 신선해 보였다. 남편을 죽인 후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흔적. 아니, 어쩌면 육체는 살아남았지만 다른 무언가는 죽었다는 의미에서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들고 있는 붓에서는 붉은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감인가, 피인가? 그림에서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알리시아에게도 예술과 고통이, 창조와 파괴가 하나로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제목은 알케스티스. 남편을 위해 죽었다가 죽음에서 돌아온 후 침묵한 그리스 신화 속 여인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알리시아는 자신을 알케스티스와 동일시하는 정체성의 선언을 했다. “나는 희생자다. 나는 배신당했다. 그리고 나는 침묵으로 증언한다라는 선언을.

그런데 그림의 한쪽 구석,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작은 과일 그릇이 놓여 있었다. 사과, , 포도. 정물화의 고전적인 소재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일들이 썩어가고 있다. 구더기가 들끓고 부패가 진행 중이다. 완벽해 보이는 것 안의 죽음. 아름다움 속의 썩음.

이는 알리시아의 결혼 생활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완벽한 커플이었지만 안은 이미 천천히, 보이지 않게, 돌이킬 수 없이 썩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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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의 언어

 

테오는 알리시아의 친구이자 화랑 주인인 장-펠릭스 마르탱을 찾아갔다. 그는 알리시아가 남편을 살인하기 전에 그린 것들부터 살인 직후 그린 마지막 작품까지, 그녀의 모든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테오를 작업실로 안내했고 마치 갤러리 투어처럼 하나씩 그림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테오에게 이는 단순한 예술 작품 감상이 아니었다. 그에겐 알리시아의 그림을 분석하는 것이 그녀의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심리 부검과도 같았다.

-펠릭스가 보여준 알리시아의 첫 번째 그림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고 있었다. 자동차 운전석에 죽어 있는 여자. 그 위로 노란 날개를 펼친 큰 새가 차 밖으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알리시아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아니,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그녀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생 그 의심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을 거다. 자신이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았기에, 자신이 엄마를 붙잡을 수 없었기에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 말이다.

두 번째 그림에서 알리시아의 남편 가브리엘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스러운 그림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는 소총이 묶여 있고, 총구가 위를 향해 있다. 마치 자살을 위한 무기처럼 말이다. 이 그림이 살인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테오는 생각했다. 이것이 무의식의 예언이었을까?

세 번째 그림은 숙모 리디아를 그린 것이었다. 침대를 가득 채우고 방 전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육체.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비만을 그린 게 아니었다. 정서적 탐욕과 자기중심성의 초상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 리디아의 집으로 보내진 알리시아는 거기서 사랑도 돌봄도 안전도 소속감도 찾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굶주린 상태로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그림이 바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알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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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치료의 탄생

 

그림은 언제부터 심리 치료의 도구로 사용되었을까? 인류는 동굴 벽화 시대부터 그림을 그려왔다. 라스코의 들소, 알타미라의 손. 그것은 기록이었고 주문이었고 소통이었다. 하지만 치료로서의 예술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개념이다.

20세기 초, 정신의학자들이 환자들의 그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말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그림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이상하고 불안한 그림들,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반복적인 이미지들, 아이들의 솔직하고 무방비한 그림들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은 환자들에게 꿈을 그리도록, 환상을 그리도록,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리도록 권했다. 그는 무의식이 이미지로 말하고 상징으로 소통한다고 믿었다.

영국에서 예술 치료가 제도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 트라우마에 갇힌 사람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 예술가 아드리안 힐은 결핵 요양원에서 환자들과 그림을 그리가 그리기 행위가 환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회복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예술 치료라고 불렀다.

거의 같은 시기, 예술가 에드워드 아담슨은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지시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저 캔버스와 물감과 시간을 주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년간 침묵하던 사람들, 약물 치료에 반응하지 않던 사람들이 그림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60년대, 골드스미스 칼리지(현 골드스미스, 런던 대학교)에 예술 치료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그리고 예술 치료는 자격증과 윤리 강령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정식 직업이 되었다. 오늘날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는 정신병원, 재활 센터, 학교, 감옥, 그리고 더 그로브 같은 법정신과 시설에서 예술 치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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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스미스, 런던 대학교 본관. 출처: Alex Blandford - Flickr, CC BY 2.0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리다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엔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어떤 경험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로 할 수 없고, 어떤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문장으로 만들 수 없으며, 어떤 기억은 너무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서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을 수 없다.

트라우마를 연구자하는 과학자들은 말한다. 트라우마가 언어 보다 먼저 저장된다고. 뇌의 원시적인 부분, 편도체에, 그리고 몸에. 그래서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종종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말이 그 경험에 닿지 못하는 거다.

하지만 이미지는 다르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원시적이고 더 직접적이다. 우리는 말을 배우기 전에 이미 이미지 익히고 이해한다. 아기들이 단어를 모르지만 얼굴과 색과 형태를 먼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언어를 우회한다. 좌뇌의 검열을 피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다. 손이 움직이고, 색이 섞이고, 형태가 나타난다.

예술 치료사들은 환자에게 무슨 뜻인가요?”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이것을 그릴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이 색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이 그림에 제목을 붙인다면?” 등의 질문을 한다.

또한 그림은 트라우마와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준다. 캔버스 위에 그것을 올려놓는 순간 그 트라우마는 시각적으로 내 안이 아닌 캔버스 위에 있다, 내 속에 감춰져 있어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거다.

알리시아 역시 그랬을 거다. 알리시아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 지는 알리시아 본인만 알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내 뱉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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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예술 치료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아담슨. 출처: DOF69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to Commons by ronhjones., CC BY-SA 3.0

 

소설 속 예술 치료사의 딜레마

 

사일런트 페이션트에서 테오는 병원 측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알리시아에게 다시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말이다. 물론 더 그로브의 동료들은 그녀가 폭력적이고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실제로 그녀는 수감 중인 다른 환자를 연필로 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테오는 계속 자신의 의견을 성찰 시키려 노력했고, 마침내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미술실이 열리고 알리시아에게 캔버스와 물감과 붓이, 그리고 시간이 주어졌다.

놀랍게도 알리시아는 테오의 바람에 응하기라도 하듯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오랫동안 쓰지 않은 언어를 다시 배우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의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붓을 잡는 법을, 색을 섞는 법을, 형태를 만드는 법을.

테오는 이 모습을 큰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림으로 말하기를, 지금까지 침묵으로 감춰 왔던 것을 그림으로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여기서 소설은 복잡해진다. 테오의 동기가 과연 순수한 걸까? 그는 정말로 알리시아를 돕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를 치료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녀에게서 자신이 알고 싶었던 진실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술 치료사들이 따라야하는 윤리는 명확하다. 치료사는 환자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환자의 필요가 중심이어야 한다. 치료사 자신의 호기심, 야망, 집착이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테오는 그 선을 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알리시아에게 집착한다. 그녀의 침묵에, 그녀의 과거에, 그녀의 그림에. 그것은 더 이상 치료가 아니다. 강박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죄책감인가?

우리는 예술을 볼 때 자신의 모습을 그 작품에 투사하곤 한다. 스스로의 경험을, 두려움을, 욕망을. 그래서 같은 그림이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만약 당신이 알리시아의 알케스티스를 보게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느끼게 될 것 같은가?


1. 이번 주 생각해볼 질문들

  • 테오의 집착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치료사가 환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갖는 것, 그 경계는 어디인가?
  • 당신은 언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적이 있는가? 그림, 음악, , 글로?
  • 예술 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받고 싶은가? 왜 그런가? 받기 싫다면 이유가 뭔가?

 

2.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미니멀하고 명상적인 피아노와 바이올린 듀엣. 침묵과 소리 사이의 공간을 탐구하는 음악. 그림을 그릴 때 듣기 좋은.

 

3. 다음 주 예고

  • 함께 읽는 영국 추리소설, 『사일런트 페이션트』4화에서 우리는 알리시아가 수감된 시설의 실체를 탐구할 것이다. 정신병원과 감옥 사이의 공간. 치료와 처벌 사이의 긴장. 그리고 현대 영국 사회가 정신질환과 범죄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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