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빈은 시간의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지금이 이른지 늦은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일에는 이제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략)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중략) 오래 벨수록 레빈은 점점 더 자주 무아(無我)의 순간을 느꼈다. 그럴 때면 더는 손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낫이, 스스로를 온전히 의식하며 생명으로 가득 찬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그리고 마법처럼,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음에도 일이 절로 반듯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져 갔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3부 5장 중에서

지난 8월부터 정말 오랜만에 진행한 그룹 조향수업이 마무리되어 갑니다. 석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여섯 명 정원의 수업이었는데요. 이렇게 큰 규모의 수업은 처음으로 구성해 보았는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참여자들이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도 동시에 제가 한 분 한 분 세심하게 지도해 드릴 수 있는 최적의 규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도통 아무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으시던 참여자분들과 함께, 조향은 물론 사는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었던 긴 휴가와 같은 시간이었네요.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몰입’의 경험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참여자분들에게서 비슷한 경험담을 자주 들었는데요. 수업 중에는 처음 경험하는 향의 세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는데, 집에 돌아가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하시기도 하고, 다음 날에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헬스장에 다녀온 듯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무거웠지만 동시에 개운했다 하시기도 하고요. 향을 맡는 동안 대체 여러분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기분 좋은 몸살을 경험하셨던 걸까요?
관련된 연구 자료들을 찾아보던 중, 우선 '생각 회로의 피로도 증가'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프랑스 파리 뇌연구소에서는 어려운 판단을 몇 시간 동안 이어가는 과정에서 전전두엽에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탐산(glutamate)이 쌓인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연구진은 이 축적을 피로의 생리적 실체로 보았습니다. 냄새를 맡는 행위는 숨 쉬듯 자연스럽지만, 조향 수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수십 가지에 이르는 향료의 노트를 파악하고, 후각 경험을 언어로 변환하여 묘사하고, 다양한 기준과 비교군 속에서 특징을 세분화하여 기록하고, 최적의 비율을 찾기 위해 미세한 영역에서의 조정을 해 나가는 과정의 연속이니까요. 즉, 조향 수업은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생각 회로를 두세 시간에 걸쳐 최대의 출력으로 돌리는 셈이니, 지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요.
2004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수면을 연구해 온 신경과학자 줄리오 토노니(Giulio Tononi) 교수의 연구팀은 낮 동안 새로운 과제를 익힌 사람들이 밤에 어떤 수면을 취하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날 밤 가장 깊은 잠에서 나타나는 느린 뇌파가 바로 그 과제에 쓰인 뇌의 영역에서 국소적으로 더욱 강해졌고, 파동이 강할수록 다음 날의 수행이 좋아졌다는 결과까지 얻었습니다. 후각 훈련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참여자분들이 조향 수업이 있던 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는 경험은 뇌가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조용히 복습하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헬스장의 비유 또한 의외로 과학적 근거가 분명했습니다. 후각 훈련은 뇌의 구조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경험이거든요. 2013년 프랑스의 한 연구팀은 조향사와 퍼퓸 스쿨 학생들의 뇌를 MRI로 촬영했습니다. 실험의 결과, 냄새를 의식적으로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는 안와전두피질(orbitofrontal cortex, OFC)의 일부에서 조향사들의 회백질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차이는 경력이 길수록 커졌습니다. 일반인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회백질이 줄어들지만 조향사들에게서는 그런 현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연구팀은 조향사들에게 물리적 후각 경험 없이 향을 상상하게 하는 실험도 진행했는데, 긴 경력을 가진 조향사일수록 관련 영역의 활동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숙련된 뇌일수록 적은 에너지를 들여 동일한 일을 해낸다는 것입니다. 헬스장에 처음 간 사람은 다음 날 계단 한 칸을 오르는 일조차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지속해 온 사람은 훨씬 높은 강도의 운동도 거뜬한 것처럼 말이지요.
나를 낯선 환경에 놓아보는 일은 이처럼 뇌 건강에 생각보다 크게 이롭습니다. 2014년 미국의 한 연구팀은 노인들에게 디지털 사진 찍기 등 새로운 기술을 석 달간 배우게 했는데, 이 실험에 참여한 노인들이 익숙한 취미 활동만 지속한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몰입 FLOW』의 저자로 유명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에 따르면 실력이 주어진 과제나 목표를 넘어선 순간 몰입은 권태를 향하여 갑니다. 레빈의 낫이 스스로 풀을 베던 행복한 순간도, 서툴던 손이 막 익숙해지려는 그 경계에서 찾아온 것 아니었을까요?
사업을 시작한 뒤로 저는 단 한 순간도 머리를 쉬지 못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쉬는 날에도,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는 아침에도,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나 낯선 길을 걷고 있어도 생각은 언제나 일로 수렴하여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휴식하려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더 시끄러워지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게다가 조향사로서 긴 경력을 쌓아 온 저는 꽤나 오랜 세월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거나 스승 혹은 선배로부터 배워야 하는 입장에 놓인 적이 없었습니다. 흔치 않은 직업인 조향사, 그중에서도 천연 향료를 주요 원료로 다루는 조향사는 더욱 희귀하니까요. 그렇기에 언제나 제 작업이 기준이 되었고, 제가 향하는 곳이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디제잉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는 디제이들이 활동하는 클럽에서 자주 밤을 새울 만큼 음악을 오래 즐겨 왔지만, 제가 디제이가 되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는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한 디제이 활동을 통해 마침내 일 생각을 스위치오프 할 수 있었고, 해묵은 권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목표를 높이고, 낯선 장비 앞에서 연습을 반복하며 너무나도 오랜만에 초심자가 된 것이었지요.
데뷔 후 처음 몇 해 동안은 오직 그 밤의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두세 시간 동안 플레이에 집중했는데, 그 시간만큼은 일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으로도 닿지 못했던 ‘머리가 맑은 상태’를 처음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상태를 '몰입(flow)'이라 불렀습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하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반응이 곧바로 돌아오며, 과제의 난도가 실력보다 약간 높을 때 우리는 시간과 자의식을 잊을 만큼 그 행위에 깊이 빠져든다는 것이지요. 플로어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돌아오는 디제잉은 그 조건을 고스란히 갖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태원의 클럽에서 저는 수토메 아포테케리의 대표도, 조향사 소피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저는 그저 디제이 토미(TOMY)였지요. 처음 만난 클러버들이 다가와 음악이 너무 좋다는 말을 건넬 때에는 신데렐라가 된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사회심리학자 패트리샤 린빌(Patricia Linville)은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할수록 스트레스가 줄어든다는 연구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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