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중캉의 생태주의로 영화읽기
<다운사이징>(2017)과 탈성장(degrowth)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2017년도 영화 <다운사이징>은 사람의 질량을 줄이는 기술이 개발된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체의 크기를 줄인 덕분에 쓰레기와 오염물질의 배출이 줄어들 뿐 아니라 더 적은 자원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아이디어를 담은 이야기이죠. 위기에 빠진 지구도 구하고 더 부유한 삶을 누릴수 있게 해주는 다운사이징 기술은 영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기 시작합니다. 중산층 서민으로 팍팍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폴 부부도 인생의 새출발을 꿈꾸며 다운사이징을 감행하죠. 하지만 시술 도중 생각이 바뀌어버린 아내 오드리가 폴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되면서, 소인국에 외롭게 남겨진 한 남자의 분투기가 시작됩니다.
<다운사이징>은 감독의 이전작들에 비하면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상당히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히기도 하고 특히 환경에 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가지고 온 영화이기에 그에 관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다운사이징 = 구조조정?
혹자는 ‘다운사이징’이라는 제목이 기업의 구조조정을 뜻하는 경제용어 downsizing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금융위기 등으로 수많은 사람을 벼랑끝으로 내몬 비인격적인 구조조정의 풍경이 영화가 그려내는 자본주의의 이미지와 겹쳐보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영화속에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다운사이징 사회에 관해 던지는 푸념이 꼭 현실사회에서의 ‘탈성장(de-growth)’논의에 대한 백래쉬와 닮아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다운사이징은 세계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개인 소비는 이미 수십억 달러 줄었고 건축, 자동차, 주택, 방위 산업도 타격이 큽니다.”
“중대한 사회 변화에는 성장통이 따르잖아요. 하지만 현재 상태라면 지구상 인류는 멸종할 거예요.” (TV에 출연한 토론자들의 대화)
‘다운사이징’을 탈성장, 혹은 그린뉴딜이라는 기후경제학의 용어로 바꾸어도 별로 어긋나지 않는 대화입니다. 폴의 친구들은 집이 팔리지 않는다며 투덜대고, 작아진 사람들은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없으니 투표권을 줄여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당장 나에게 닥치는 경제적인 부담이 인류가 처한 위기보다 중요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근시안을 표현하는 대목이겠습니다.
줄어들지 않는 탐욕의 크기
“환경을 위해서? 웃기시네. 부자들만 누리던 걸 가지려고 그러는거지. 대단한 사업 아이템이야.”
- 소인국 레저랜드의 사업가 두샹의 대사
크기가 줄어든 폴이 살아가는 곳은 소인들의 유토피아로 여겨지는 레저랜드입니다. 영화는 (저를 비롯한 보통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소인세계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물리법칙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에 소인국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탐욕과 불평등의 그림자에 주목하고 있지요. 부유한 백인의 집을 청소하는 유색인 노동자들, 장벽 바깥의 비위생적이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는 하층민들, 심지어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로 다운사이징을 당한 희생자들이 등장합니다.
조금은 전형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영화의 설정은 결국 우리 인류가 당면한 위기가 인구과잉이라는 수량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제의 본질은 끝없이 누리고자 하는 욕망, 불평등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무감각함, 개인의 안락한 삶 이외의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협소한 세계관에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신기술로서 해결하려 했던 인류의 문제는 진척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영화속 세계는 대멸종의 도래를 멈추지 못합니다. 흥청망청 각자도생하느냐, 세상을 등지고 지하 벙커로 들어가느냐 두가지의 선택지만 남은듯 보이지요.
꽃과 나비, 그리고 녹란
실물 크기의 꽃을 들고 두샹의 파티에 참여한 폴은 나비를 좋아하는 베트남출신의 인권운동가 녹란에게 운명처럼 이끌립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어가 짧아 명령조로 말하게 되는 녹란의 언어가 마치 폴의 세계를 향한 절대자의 정언명령처럼 들린다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녹란의 명령어는 지루한 안정 속에 갇혀 있던 폴의 일상을 고통받는 세계의 이웃들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지요. 녹란을 통해 폴은 개인의 만족이 당연한 가치로 여겨지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새로운 삶의 맛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영화의 종착지는 폴이 녹란과 함께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지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유한 세계로부터 나오는 방대한 잉여물을 극빈한 세계로 전달하는 일일 뿐입니다. 비록 불합리한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고 때로는 그 까마득한 격차 앞에서 울분이 터져나올 법도 하지만 녹란은 우울해하고 절망하는 대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꿋꿋이 해나가는 인물로 그려지지요. 폴은 지구를 구할 신기술도 인류를 구원할 지하벙커도 아닌 녹란과 함께하는 삶의 자리에 머무르기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결말은 혹 우리가 당면한 구조적 위기를 외면하고 미시적 차원의 선행에 갇혀버린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기술과 정치가 닿지 못하는 인간성의 본질을 꺼내어주기에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폴은 자신의 세계에서는 더이상 쓸모가 없었던 재활치료 기술을 녹란의 세계에 있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에게 이미 충분히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삶. 어쩌면 탈성장주의가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영화가 충실히 그려낸 이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체념과 받아들임 사이에서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에서 지난 9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지구평균기온은 산업혁명 이전 대비 1.5도 상승선을 이미 돌파하였고, 이 추세대로라면 올해 안에 2도 상한선 까지도 넘길 것으로 예측이 됩니다. 과학자들이 예견해온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 그 한복판에 우리 세계가 처해 있는 것이지요.
지하벙커로 가는 길과 현실의 세계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던 폴의 모습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마음이 참으로 오갈 데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 멸종으로 치달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소망은 이웃들의 팔을 붙잡고 사랑과 화평을 만끽하는 것이리라는 말을 건냅니다. 이것은 일종의 포기일까요? 아니면 더 깊은 영성의 발현일까요. 복잡한 심정으로 뜨거워진 봄날의 창밖을 바라봅니다.
글 /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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