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창의 따옴표
다른 세상을 보는 구멍, 스포츠
<F1 더 무비>(2025)
"넌 전두엽이 덜 자랐어. 위험을 감지하질 못하잖아"
<F1 더 무비> (2025)
촉망받는 레이서였던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는 끔찍한 사고로 몸이 망가졌고 자신의 경력을 마감한 채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30 여 년을 익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오랜 절친인 루벤에게 레이싱 세계로 복귀를 제안 받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최하위 팀인 에이펙스에 합류하여 꿈에 그리던 F1 대회에 도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으니, 그의 몸이 이미 레이싱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이펙스에는 이미 조슈아라는 젊은 천재 레이서가 있었고, 개성이 강한 둘의 손발이 맞지 않아 팀 내 갈등이 커졌고, 설상가상으로 에이펙스의 차량 성능도 트랙을 50번 이상 돌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사회는 실적도 안나오는 골치 아픈 이 구단을 빨리 매각하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이번 이 마지막 대회가 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들은 어떤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이들이 시도할만한 어떤 대안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모든 것이 막혀 답이 보이지 않는 순간을 돌파하는 힘은 역시 '광기'뿐임을 관객은 알고 있습니다. 소니는 영화 초반을 자신의 광기로 이끌어 갑니다. 여주인공 케이트는 통제가 안되는 소니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플랜C는 카오스네요" 영화는 그 지점을 파고 들어 '충격-갈등-타협-기적'이라는 광기의 사이클을 무난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또라이' 같은 모험심 때문에 주목 받았으나 역시 그 광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그래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원하는 왕년의 베테랑과,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려는 의욕 넘치는 루키로 설정됩니다. 선배의 불안은 적중했고, 후배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공식대로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고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며 이야기를 훈훈하게 마무리합니다. 감독(조셉 코신스키)이 <탑건:매버릭>을 연출한 사람이라 어쩌면 지상판 탑건을 만들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영웅 서사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셰인'은 소년을 뒤로 하고 말을 타고 유유히 산을 넘어갑니다. 이제 스승의 시대가 거(去)하고, 소년의 시대가 래(來)하는 것입니다. 엔딩 크레딧 장면에서 스승은 이제 사막을 횡단하는 거대한 차를 타고 괴성을 지르며 새로운 위험으로 뛰어듭니다.
대부분의 정신현상은 방어기제라는 라캉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태동하고 뿜어져 나오는 실재의 세계는 너무 강렬하고 충동적이라 정신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히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작은 구멍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막연하게 실재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철학자들은 그 구멍을 '대상a'(라캉), '사건'(바디우), '예술/시네마'(들뢰즈) 등으로 부릅니다. 영화도 그 구멍을 통해 너머를 들여다보는, 실재의 일부를 상징계로 끌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면을 통해 대상을 보고 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심연을 보고 있는 것이죠. 영화에서도 주인공 소니는 언제나 얼음물 속에 자기 몸을 담그는데 그것이 그의 심연입니다.
인간을 최고의 속도로 달리게 하는 스포츠인 레이싱은 실재의 문을 열고 사람을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합니다. 레이서는 달리는 동안 0.1초 단위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온 몸을 하나의 기계로 인식하고 신속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도박입니다. 이성보다 본능과 욕망이 먼저 작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잘못 내려진 결정의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신체가 감당해야 합니다.
"넌 전두엽이 덜 자랐어. 위험을 감지하질 못하잖아" 자신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경력을 끝내버린 경험이 있는 소니는 젊은 조슈아를 질책합니다. 전두엽은 경험을 축적하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선배는 광기의 끝을 알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조슈아 역시 동일한 시련의 과정을 겪으며, 마침내 정신이 광기를 통제하는 단계의 레이싱으로 들어섭니다. 현실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뇌가 고도로 진화한 영역이 피질/전두엽인데, 그것은 좀처럼 성숙해지기 어렵습니다. 그 성숙은 깨달음으로 연결되고, 언어화되어 저장되는데, 소니는 자신이 다다른 균형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느리면 부드럽고, 부드러우면 빠르지"
영화를 보며 관객은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속도(비행기가 가장 빠르지만 비행은 경기가 아니며 속도가 체감되지도 않죠)를 체감하며 실재의 구멍에 빠져드는데, 그 속도라는 것은 한 사람의 역량이 아닌 모든 현대 기술의 집약이라는데 매력이 있습니다. 레이서의 실력 뿐 아니라, 엔진의 성능, 차의 형태, 도로의 온도와 경사, 공기의 저항과 기후, 타이어를 비롯한 수천 개의 부품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해야 최고의 속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 속도를 구현하면서 인간은 고대 전쟁터에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원시적 광기를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차와 함께 석양에 서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의 포스터는 올림푸스 신전의 제우스를 연상시킵니다.
실재의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모든 창조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것(다른 피조물과 신의 중간 어디쯤의 공간)을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생각하는 것(사피엔스) 말고, 실제로 인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진 것은 '던지는 것'과 '차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월등한 어떤 동물도 인간보다 잘 던지고 차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구와 축구에 열광합니다. 인간은 다른 네 발 동물들보다는 느리지만 기계의 힘을 빌려 극강의 스피드 또한 구현해 냈습니다.
들뢰즈의 말대로 예술의 역할은 지각 불가능한 것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며, 현실태에서 잠재태(실재)로 내려가 다시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구상이나 추상은 현실 세계에서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니는 조슈아에게 광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이성과 광기의 경계에서 어느 한 쪽으로 흡수되지 않고 끊임없이 유혹과 싸우며 견디는 것, 이것이 예술가의 삶이고, 영화라는 매체의 적정한 자리일 것입니다. 잠재태에 치우치면 소위 '예술 영화'가 되고, 현실태에 치우치면 '상업 영화'가 되어 버린다고 하지만, 영화의 성격이 어떠하든 그것을 보며 자기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니, 시종일관 속도에 중독되는 이런 영화로 자신의 광기를 달래보는 것도 가끔 누릴만한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 : 최규창
편집 디자인 : 모기영 편집부
2025년 7월 19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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