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누가 그녀를 ‘호구’라고 판단하는가?
<세기말의 사랑> 2024, 임선애
바둑에서 유래한 ‘호구(虎口)’는 같은 색 돌 세 점이 진을 치고 한 방향만 트인 형국이 마치 ‘입을 벌린 범의 입속’과 유사하다고 붙여진 단어입니다. 상대방의 먹잇감이 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 다시 말해 어수룩하여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을 호구라고 명명하며 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호구가 되지 말자는 일종의 운동(?)같은 경향이 짙었습니다. 물건을 구매하거나 식당을 찾을 때 ‘호갱(호구 고객의 줄임말)’이 되지 않으려고 유튜브나 카페를 찾아보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리뷰나 후기를 보며 내가 치루는 가격이 합당한지 계산하지요. 결국에 호구 당하지 않아서 안도하거나 만족도가 올라가고, 그 반대의 경우 호구당했다며 자책하는 모습은 꽤 일상적인 거 같습니다.
현실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인지, <세기말의 사랑>(임선애, 2024)의 영미(이유영)는 몰래 짝사랑하는 회사 동료 도영(노재원)을 위해 ‘호구’를 자처합니다. 밤샘 삯바느질로 번 돈으로 도영이 빼돌린 회삿돈을 메꾸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세상이 망할 수도 있다는 1999년 12월 31일 밤, 아무도 몰래 회삿돈을 메꾸던 경리과장은 경찰에 붙잡힙니다.
그래서 <세기말의 사랑>은 흑백처럼 답답해 보이는 순애보 영미의 일생을 그리냐 하면 큰 오산입니다. 영화는 교도소에서 9개월 간의 형을 살고 나오는 영미를 총천연색으로 보여주면서 사실 그녀가 신고다녔던 단화가 상큼한 연분홍색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걸치고 다녔던 스웨터가 색색의 털실로 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교도소로 영미를 마중 나온 도영의 아내 유진은 어쩌면 제3의 호구로 영미를 발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영미와 유진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영미는 호구’라는 도식이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서사가 흘러가는 원동력은 ‘돈’입니다. 많은 경우 돈을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따로 있긴 하지만, <세기말의 사랑>에서는 돈을 빌려쓰는 사람과 대신 갚아주는 사람으로 나누어지죠. 영미가 호구라는 도식은 바로 남이 쓴 돈을 대신 갚는다는 지점에서 판단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미는 대신 돈을 갚다가 형을 살고 나와서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짝사랑하는 도영이 잡혀가면 그를 볼 수 없으니까 몰래 돈을 갚아가던 선택이 자신이 어수룩해서, 혹은 어리석어서 잘못 판단했던 거라고 스스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은 그녀를 달리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차분히 한 장 한 장 돈을 세는 영미는 작지 않은 공장의 경리과장이었고 그런 영미가 셈에 어두운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영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호구 당해주는 것, 그로 인한 위험까지도 감내하고 책임질 줄 아는, 그런 용기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반면, 당당하게 호구를 여럿 부리는 유진은 알면 알수록 비밀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밝혀질 때마다 유진이 정말 호구를 부렸던 것인지 당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호구를 당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주체적인 선택을 했는지 그 여부가 아닐지요. 주체적으로 선택한다면 그 결과까지 수용하고 책임진다는 것이니까요. 의외로 유진은 소중한 사람을 읽지 않기 위해 상대의 수치는 눈감아주고, 눈물은 안으로 삼키는 성숙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세기말의 사랑>은 제2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에서 상영했던 <69세>를 연출했던 임선애
감독님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69세>에서도 예리하게 파고든 소재를 섬세하게 연출하며 묵직한 질문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는데 <세기말의 사랑>은 우리의 편견에 묻혀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끌고 나와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난 왜 도영이를 구하고 싶었을까?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
유진의 읊조림은 집에 오는 길에도 계속 맴돌았지요.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상대를 애정하는 마음이 너무 커 나의 모든 것을 던져 상대를 구원하고 싶은 마음.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충만해지는 관계를 엿본 것 같습니다.
모기책방 시즌 1 OPEN !
모기책방은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와 함께 책을 읽는 방’입니다.
❙ 기간: 2024년 3월 19(화) – 5월 28일(화) / 격주 화요일(총6회)
❙ 시간: 저녁 7시-9시 30분
❙ 장소: 빅퍼즐문화연구소(마포구 홍익로5길 43, 2층)
❙ 모임 형식: 세미나(참여자 중 발제 담당자 지정)
❙ 진행자: 최 은 영화평론가. 모기영 부집행위원장
❙ 인원: 10명 내외
❙ 참가비: 모기영 정기후원자 5천원 / 비후원자 5만원
❙ 신청기간 및 방법: 2024.2.6.(화)-2024.3.12.(화) 구글 폼
https://forms.gle/TfZCjDD57tLSST4M8
3개월 간, 이런 책들을 읽습니다.
3/19 『다시, 성경으로』(레이첼 헬드 에반스, 바람이불어오는곳, 2020) **읽고 오세요!!**
4/2 『무례한 기독교』(리처드 마우, IVP, 2014)
4/16 『누가 포스터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제임스 K. A. 스미스, 도서출판100, 2023)
4/30 『문화의 신학』(폴 틸리히, IVP, 2018)
5/14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김용규, IVP, 2023) (1)
5/28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 (2)
이런 분들이 오시면 좋습니다.
+기독교와 문화를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싶은 분
+기독교와 대중문화, 두 세계에서 분투하시는 중인 분
+모기영과 함께하고 싶은 분
+모기영의 미래가 궁금하신 분
[참고사항]
+첫 모임은 발제 대신 각자 책(『다시, 성경으로』)을 완독하고 오셔서 감상을 나누는 시간으로 진행하고, 2-6회차 발제자를 선정합니다.
+5,6회차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는 영화를 각자 감상하고 와서 타르콥스키 영화와 책을 함께 논할 예정입니다.
Q.‘시즌2’가 있나요?
모기책방 시즌2는 6월-8월 중 시즌1에 이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읽는 책의 목록은 달라집니다.
그간 주간모기영 ‘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를 통해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를 응원해 주시는 관객분들과 소통할 수 있었는데요, 이번 회차를 마지막으로 주간모기영 필진에서는 물러서기로 했습니다. 한국영화의 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요즘 한국영화’라는 코너를 접는 게 아쉽지만,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책임이 필요한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거 같아서 내려놓습니다. 모기영의 프로그래머로는 계속 자리할 예정이니 영화제에서 만나 뵙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 박일아
편집디자인 : 강원중
2024.02.24.토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주간모기영에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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