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말 가을의 끝자락이 된 것 같습니다.
단풍은 붉게 물들었고, 기온은 아래로 떨어져
쓸쓸함조차 남지 않을 만큼 몸을 시리게 합니다.
올해도 이제 2달밖에 남지 않은 것이
때로는 당혹스럽고,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정신차리고 나면 어느새
올해가 다 갔다는 편지를 여러분께 쓰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아직 2024년이 2달이나 남은 시점이지만,
저의 지난 한 주는 2024년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첫 30대는 어땠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스스로 가지곤 했던 것이죠.
제가 이러한 생각을 했던 이유는
읽던 책의 한 문장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81p)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라는 말이 제게 왜 그리 크게 닿았는지는 모르지만
제 마음과 생각 깊숙한 곳에 박혀, 자리를 잡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이 있을까?
‘나의 삶은 어떠했을까?’ 싶은 생각이 마음과 머리에
깊게 박혀 있던 지난 한 주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한 주간의 고민과
나름의 생각들을 던져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담긴 내용을 가져와
제 생각까지 더해서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아갑니다.
나무는 가을에 낙엽이 지고 낙엽은 땅으로 떨어져
새로운 자양분이 되어 겨울을 지내고,
겨울이 지나 새로운 순이 돋고 꽃이 피었다
이내 찾아온 고단한 여름이 지나
다시 열매를 맺는 순환의 삶을
나무는 살아갑니다.
나무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지금이야 우리가 워낙
반려견, 반려묘라 하여 야생성이 사라진
동물들이겠으나 그 동물들 역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아가며
순환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은
순환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영역의 삶을 살아가지요.
때때로 그것은 문명이라 불리기도 하고
혹은 그것을 ‘사회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듯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등장하는 이반 일리치 역시 그랬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진짜 즐거움은 중요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신사 숙녀들을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작은 만찬을 여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39p)
이반 일리치는 성공한 정부 관료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아버지처럼 그도 안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보좌관을 거쳐 판사가 되었고, 능력도 좋아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습니다. 적정한 재산을 가진 아내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죠. 그리고 삶에서 낙이라고 한다면사람들과 작은 만찬을 열고 카드게임을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제게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주중에는 나름의 일을 하며 지내고,
주말에는 작은 모임과 만남을 가지고 취미라 불리는
낙으로 주말을 가득 채우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늘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 말이죠,,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낙을 위해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고,
낙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 대신 성공에 집착하며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으며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육체적 고통은 우울증으로 번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악화시키게 되지요.
그리고 그때 이반 일리치는 생각합니다.
“’내 모든 삶, 내 의식적인 삶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전에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마땅히 살아야 했던 삶을 살지 못했으며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려고 했던 눈에 띄지 않았던 충동, 그가 즉시 억눌렀던 그런 충동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일, 삶의 방식, 가족, 사회적 및 직업적 이해관계 역시 모두 거짓일 수도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86p)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이 어쩌면 전부 가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실은 자신의 온전한 기쁨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는 자신을 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고위층과 어울리면 자신 역시 고위층으로 보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좋은 아내와 결혼하면, 좋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라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부당하다 여겨지는 것들이 보여
그것들에 대해 반박하고픈 마음이 들었을지라도
그 충동을 억눌렀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늘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지금, 죽음 앞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전부 거짓이었음을 느끼고
자신의 모든 노력의 무색함을 느끼며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죠.
무수히 많은 정보와 다양한 소비,
그 안에 나뉜 계층과 계급.
이것들은 과연 이반 일리치의 삶에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저는 요즘 러닝을 취미이자 생존의 무기로 사용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러닝화 계급도’라는 인스타 피드를 보게 되었습니다.
러닝화 별로 가격 및 성능에 따른 계급도를 만들었던 것이죠.
생각해보면, 늘 우리 주위에는 이런 것들이 만연했던 것 같습니다.
서,연,고,서,성,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알만한 계급도 아닐까요?
겨울이 오면 패딩 계급도가 나오고,
봄이 되면 봄에 꼭 입어야 하는 매해의 패션 계급도가 만들어집니다.
물론 그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며
패션업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전부 무색한,
당장의 삶이 끊어진다면 전부 거짓이 되어버릴 것들에
우리의 마음과 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제가 그랬던 것은 아닌지 고민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정말 ‘진실되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박수, 누군가의 인정에
더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요?
내가 입는 옷, 내가 입는 차, 내가 사는 집.
이 모든 것들이 늘 누군가의 비교대상으로 남아
때로는 나를 기쁘게 하고 때로는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무엇이 되어있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오랜 시간, 우리의 곁을 지켜온
변하지 않고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온
톨스토이의 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것이 실은 ‘거짓’이라고 폭로합니다.
더 좋은 옷을 입는다고 나의 삶이 오래 연명되지 않고
더 좋은 차를 탄다고 나의 삶이 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결과로 받아들이 무엇을
합리화하면 안되겠지만,
나의 소비가 나를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과연 정말 ‘진실되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박수, 누군가의 인정에
더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요?
이번 한 주는 이 고민을 함께 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나의 삶의 주도권이 정말 나에게 있는지,
혹은 나의 삶의 주도권이 몇 명일지도 모를 타인의 시선에 있는지 말입니다.
혹 타인의 시선에 나의 삶에 주도권과 선택력이 행사된다면
다시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다음 주에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담긴 인사이트의 나머지 내용을 가져와
‘진실된 나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전달드리려 합니다.
이번 한 주를 살아가시면서,
타인의 시선에 의한 선택이 아닌
나 자신의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한 주가 되시기를,
그리고 그 속에서 진실된 기쁨을 누리시는 한 주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행복한 하루, 행복한 한 주 되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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