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아홉 번째

세점사이의 아홉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2.10.31 | 조회 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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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아홉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어제는 정말 끔찍한 참사가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네요. 정말 많은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떠오르지만, 어떤 말을 보태기보단 조용히 애도하기로 했습니다.

 

고통스럽고 슬픔에도 하루종일 그 안에 침잠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침잠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고 우리를 슬픔에 중독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일들을 마주할 때 억지로라도 일상을 마주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제 일상 속의 순간들에 대한 사진들을 준비해 봤어요. 최근 며칠 사이의 사진들이에요.

가끔,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날 때가 있어요. 작업실로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는 그런 날. 그런 날이면 드립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정말 좋아하는 순간인데 매번 얼마 안 되는 잠에게 져요.
가끔,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날 때가 있어요. 작업실로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는 그런 날. 그런 날이면 드립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정말 좋아하는 순간인데 매번 얼마 안 되는 잠에게 져요.
저는 서울시청-회현역 구간의 동네를 정말 좋아합니다. 분주한 느낌이 한껏 느껴지는데, 건물들도 정말 서울스러운 맛이 물씬 살죠. 
저는 서울시청-회현역 구간의 동네를 정말 좋아합니다. 분주한 느낌이 한껏 느껴지는데, 건물들도 정말 서울스러운 맛이 물씬 살죠. 
며칠 전에는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까지 가버렸습니다. 중간에 환승을 했어야 했는데 환승역을 놓쳐버린 거예요. 다행히 십 분 정도만 기다리고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까지 가버렸습니다. 중간에 환승을 했어야 했는데 환승역을 놓쳐버린 거예요. 다행히 십 분 정도만 기다리고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친구와 함께 간 카페에서 먹은 바나나 푸딩이에요. 정말 맛있었지만, 제 안의 마지막 양심은 혹시 이러다 당뇨병 같은 게 생기는 것 아닐까? 하는 자괴감을 불어넣었죠.
며칠 전에 친구와 함께 간 카페에서 먹은 바나나 푸딩이에요. 정말 맛있었지만, 제 안의 마지막 양심은 혹시 이러다 당뇨병 같은 게 생기는 것 아닐까? 하는 자괴감을 불어넣었죠.
어제는 사촌형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작은 카메라를 들고 결혼식에 참석했어요. 빛이 마침 좋은 날이어서 길거리 사진도 조금 찍었습니다.
어제는 사촌형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작은 카메라를 들고 결혼식에 참석했어요. 빛이 마침 좋은 날이어서 길거리 사진도 조금 찍었습니다.
같은 날의 가을 색깔.
같은 날의 가을 색깔.

오늘 글은 예전에 써 두었지만 어디에도 공개한 적 없는 글입니다. 원래는 책을 내면 그 책의 첫 글로 하려고 해두었던 글인데, 프로젝트가 흐지부지되면서 갈 곳이 없어진 글이에요. 부모님이 바쁘셔서 저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는데요, 그래서 외할머니와 감정적으로 각별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생각을 정리하며 쓴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불행은 자주 무례하다. 노크도 악수도 없다. 소설을 배울 때 상상했던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는 많이 달랐다. 꽃묶음이 뭉그러지는 모습으로도 불행을 예고해주던 소설 속의 친절한 세계와 달리 이쪽 나라의 법칙에는 개연성이 없었다. 

시니컬한 척을 좋아하다 보니 불행은 갑자기 닥치는 법이라는 말을 종종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젠체가 초연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은 똑똑한 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가 와서야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셔서는 안 되는 분이었다. 

 

2020년이 끝나기 며칠 전의 일이다. 여름이 오기 전에는 잠잠해질 줄 알았던 코로나는 12월에도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가하게 되신 지 오래셔서 요양병원에 계셨다. 당신께서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새벽에 일어나 급히 병원에 갔지만 코로나 감염 우려로 그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1층 로비에서 몇십 분간 가만히 서 있다가 사망진단을 받아들었다. 장례식장을 예약했다. 사람들은 많이 오지 않을 것이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거의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의 삶을 선명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렴풋한 마음으로도 얼추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삶은 쉽지 않았다. 고난이 자주 닥쳤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밤에 당신의 옛날 이야기들을 자주 해주셨다. 십대의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 분께서도 그걸 아셔서 나중에 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하셨다. 소설로 쓸 것이 아주 많다고도 덧붙이셨다. 

소설로 쓸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삶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의미함을 이제는 안다. 정말로 할머니의 이야기들은 길었다. 그리고 많은 밤의 이야기들 속에서 할머니는 항상 굳세고 성실했다.

 

신이 성실한 면접관이었다면 할머니에게는 행복한 삶이 약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편은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는 끝까지 힘든 병을 앓으셨다. 지독했다. 

그나마도 마지막에는 갑자기 발생한 코로나 사태가 겹쳐 요양 병원에 면회조차 가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장례식장마저 조용했다. 그래도 코로나에 걸리신 것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말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랬더라면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이라고 말하기엔 그 안도가 슬픔에 비해 너무 얕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세계는 자주 이쪽을 지나쳤다.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비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던데, 이럴 거라면 신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겠다 싶었다. 하기사, 개연성 없는 비정한 끝을 바라본 것이 할머니뿐이었을까.

 

평택에 납골당을 모신 뒤 의정부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신이 없는 세계를 생각했다. 신 없이 고난과 마주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뿐이었다. 신으로 해석되는 우연을 기다리거나, 그냥 일단 걷거나. 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할머니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돌아보면 분주함이 내일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노력은 자주 배신당했다. 고난이 교훈이 되는 일도 잘 없었다. 그러나 주저함이 마법을 부르지도 않았다. 어쨌든 나아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 문이 열리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뿐이었다. 하늘이 밀어주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최선은 나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게 한다. 그 뒤에는 발자국이 남았다. 확실히, 하늘은 해주지 않았던 일이다.

 

할머니는 많은 이야기들을 하셨지만 그 분께서 유독 여러 번 반복하신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여섯 살, 일곱 살이었을 때쯤의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어느 날 집에서 아주 먼 곳에서 길을 잃으셨다. 집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셨다고 한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가만히 울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직접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찻길과 전봇대를 따라서 걷고 걷고, 또 걷고. 아주 먼 길을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집이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고 하셨다. 어디에서부터 걸어왔는지에 대해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고도.

 

길은 자주 불행할 것이다. 하지만 걷는 수밖에.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 신이 존재했다면 우리의 노력은 그가 멋지게 빚어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게 되어버렸으니,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제 우리 뿐이다. 우리는 어쨌든 전보다 앞에 있겠지. 신이 돕지 않는 세계에서도. 우리는 우리를 도울 것이다. 나는 나를 도울 것이다. 


덧붙여, 아쉬운 소식을 전합니다. 세점사이의 이번 시즌은 다음 주의 레터를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총 열 회를 채우고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더 다듬어진 모양새를 갖추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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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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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ver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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