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15. 플리즈 노 핑퐁

세점사이의 열다섯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04.17 | 조회 256 |
2
|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열다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봄 호도 벌써 절반이 지났네요!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지금 두꺼운 파란색 손목 보호대를 차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일을 많이 했더니 몇 년 전에 잠잠해졌던 건초염이 재발한 모양이더라구요. 병원에서는 엄지를 감싸는 손목보호대를 주고 일주일치 약을 줬습니다. 사실 회복을 위해서는 쉬는 것이 제일이겠습니다만 프리랜서의 일이라는 건 아무래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으니까요. 나름대로 중요한 시기를 보내는 중이어서 그것도 그것대로 쉽지 않더라구요. 아마 그런 생각들이 손목을 요 모양이 될 때까지 끌고온 걸테죠.

 

아마 이전에도 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을 거예요. 너무 바쁜 와중에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였을 겁니다. 나름대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건 늘 너무 쉬워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본인만큼 본인 말을 잘 듣는 존재는 사실 없잖아요. 언제나 모두를 부추기며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언제나 정신을 차려보면 낭떠러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왜, 커피 얘기를 할 때 진짜커피와 가짜커피를 나누잖아요. 친구들과 만나거나 쉬면서, 혹은 여가를 즐기면서 마시는 커피는 진짜 커피, 생존을 위해 카페인 수혈을 할 때 마시는 커피는 가짜 커피라고들 하더라구요. 저는 삶에 진짜커피를 남겨두기 위한 나름의 아침 루틴을 가지고 있는데요, 아침에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디저트 사진을 찍는 게 그렇습니다. 진짜커피를 위한 휴일을 간-혹가다 만들기도 해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ㅎㅎ...) 그럼 오늘은 제 진짜커피 사진들을 보여드릴게요. 사실 저 커피 사진에도 진심이거든요.

커피머신을 막 집에 들이고 신나서 찍곤 하던 사진이에요. 그 중에서도 이 사진은 참 좋아하는데, 빛의 느낌과 쨍한 컬러, 단정한 구도가 여러 모로 마음에 들었답니다. 친구가 디자인한 잔인데 예뻐서 참 좋아했는...데...깨져서 이젠 없어요 슬퍼라....
커피머신을 막 집에 들이고 신나서 찍곤 하던 사진이에요. 그 중에서도 이 사진은 참 좋아하는데, 빛의 느낌과 쨍한 컬러, 단정한 구도가 여러 모로 마음에 들었답니다. 친구가 디자인한 잔인데 예뻐서 참 좋아했는...데...깨져서 이젠 없어요 슬퍼라....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랍니다. 카페 이름이 'useless adult' 여서 왠지 찔리는 구석이 있었어요. 커피를 시켜놓고 정지돈 작가의 산문집을 읽었습니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랍니다. 카페 이름이 'useless adult' 여서 왠지 찔리는 구석이 있었어요. 커피를 시켜놓고 정지돈 작가의 산문집을 읽었습니다.
이건 최근 사진인데요, 너무 좋아하는 가수인 김수영님의 콘서트 굿즈로 나온 잔에 커피를 담아 마시는 모습이에요. 팬심을 제외하더라도 잔이 너무 예뻐요!! 멀리 있는 황색 덩어리는 딸기크림빵이랍니다.
이건 최근 사진인데요, 너무 좋아하는 가수인 김수영님의 콘서트 굿즈로 나온 잔에 커피를 담아 마시는 모습이에요. 팬심을 제외하더라도 잔이 너무 예뻐요!! 멀리 있는 황색 덩어리는 딸기크림빵이랍니다.
제주도에 놀러가서 찍은 커피!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잔을 쥐고 있는 친구 손이 정말 예쁘죠.
제주도에 놀러가서 찍은 커피!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잔을 쥐고 있는 친구 손이 정말 예쁘죠.
'포트레이트 커피 바'라는 카페에서 찍은 잔 사진입니다. 아니 마침 가방에 접사용 렌즈가 있지 뭐예요. 커피도 맛있고 카페도 예쁘고 잔도 멋져요. 한 번 가보시길 권합니다. 
'포트레이트 커피 바'라는 카페에서 찍은 잔 사진입니다. 아니 마침 가방에 접사용 렌즈가 있지 뭐예요. 커피도 맛있고 카페도 예쁘고 잔도 멋져요. 한 번 가보시길 권합니다. 
저의 유일한 해외여행 경험인...코타키나발루. 너무 더워서 비틀거리듯 스타벅스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맞았어요. 사실 해외여행을 가서 스타벅스에 간 것도 좀 우스운 일이지만 더 웃겼던 건...저 커피컵에는 '분리배출'이라는 한국어가 써있었다는 사실...혹시 코타키나발루 특별 메뉴가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런 건 없더라구요. 그냥 프라푸치노를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
저의 유일한 해외여행 경험인...코타키나발루. 너무 더워서 비틀거리듯 스타벅스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맞았어요. 사실 해외여행을 가서 스타벅스에 간 것도 좀 우스운 일이지만 더 웃겼던 건...저 커피컵에는 '분리배출'이라는 한국어가 써있었다는 사실...혹시 코타키나발루 특별 메뉴가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런 건 없더라구요. 그냥 프라푸치노를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일상의 별의 별 순간들을 모두 카메라로 찍는답니다. 일상을 이렇게 쁘띠하게 남기는 건 의미있는 일이지만 느린 일이기도 하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쓴 글을 보내드립니다.


플리즈 노 핑퐁

바깥세상과는 쿵짝이 영 안 맞는다. 세상은 내게 너무 빠르다.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다림이라면 질색이고 도파민 분비체계는 이미 엉망이어서 인내심은 짧다. 그냥 내가 너무 느릴 뿐이다. 그러니까, , 하면, 한참 있다, . 형편없는 내 반응속도는 어릴적부터 나를 자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체육시간을 싫어한 이유다. 특히 구기종목을 싫어했다. 공은 너무 빨랐으니까. 공을 잡거나 피하는 일, 아니면 날아오는 공을 라켓으로 쳐내는 류의 일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 우직하게 힘을 쓰는 일은 차라리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건 느려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천천히 반응하는 몸은 지치기도 천천히 지쳐서 나는 내가 왠지 단단한 사람이 된 기분마저 느꼈다.

다행히도 어른이 된 뒤 해야 하게 된 일들은 탁구공보다는 느리게 닥쳐와서 내게 몇 초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런 일들에는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다. 타고난 성정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으로, 나는 다양한 상황의 대처법을 준비해 놓는 타입의 사람이 됐다. 어떤 일이든 그럴싸한 첫 시작에는 남들보다 조금 긴 시간이 걸리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임기응변의 고수 행세를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입을 싹 씻은 뒤 달변가의 모양새를 한다.

언제였더라, 누군가 나에게 능청스러운 사람이라기보단 다양한 순간의 레파토리가 모두 준비된 사람에 가까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체를 간파당한 느낌이어서 가슴이 철렁했다. 유창한 달변 뒤에는 당황스러운 식은땀들이 있다. 어릴 때는 그래도 땀은 안 흘렸는데, 나이가 드니 정말로 식은땀이 겉으로 보이기 시작해서 당황을 숨기기 위해서도 또 애를 먹곤 했다. 그래서 능숙해 보이는 일에는 빠르게 지친다. 몇 시간 정도 지나면 금방 될 대로 되라는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여전히 나는 주로, 느리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이제 제법 능숙한 어른이 되었다라고 말해준다고 해도, 나는 그 사실만은 바꾸지 못한다. 가까운 친구들과 대화할 때면 나는 대화가 끝난 지 삼십 분은 된 주제에 뒤늦게 아! 하는 생각을 내놓곤 한다. 내 친한 친구들은 거기에 익숙하다.

좋아하는 가수의 팬 톡방에 몇 년째 들어가 있다. 그 가수의 콘서트가 끝나면 언제나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이 와락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것들을 보면 조바심이 난다. 핸드폰으로는 사진을 잘 찍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콘서트가 끝난 뒤 작업실에 가서 카메라에 있는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고, 그 뒤에 다시 선정과 보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제서야 콘서트의 흥분이 가신 대화방에 나는 사진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때까지 나는 콘서트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인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건 한 템포 느리게 감탄하는 일이다. 삼십 분을 넘긴 화두에 뒤늦게 감탄사를 내뱉듯이.

그치만 그래서 좋았다. 한참 뒤에도 내가 느리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일상적인 순간들에도 그렇다. 맘에 드는 것들을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찍어 스토리에 올리는 대신 카메라로 찍어 다시 한번 골라내는 일. 왠지 그 느린 과정은 숭고하게까지 느껴졌다.

 

열몇살 때쯤 내가 글을 상대적으로 많이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스무살이 넘어가고 나서는 내가 국문학을 전공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글을 많이 쓰는 축의 사람이라는 것을 추가로 깨달았다. 새내기 시절은 지났고 말로 먹고 사는 일을 짧지 않게 해왔지만 나는 여전히 말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보다는 글로 이야기를 전하는 게 편하다. (카카오톡은 힘들다. 편지나 긴 포스팅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전히 맘에 드는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한참 있다가 글을 쓴다. 새벽을 길게길게 녹여가면서.

글은 늘 나보다 느려서 좋았다. 천천히 겪고 천천히 생각한 뒤에 천천히 레일을 까는 일. 그래서 아주 오래 걸리고. 꽤 강한 엉덩이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반응하고 천천히 지치는 사람이라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이 아니었을까 한다. 돈은 가장 못 버는 일들이라지만. 그럼 그것도 숙명이겠지, .

같은 속도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고, 굳이 한 달 뒤의 일들에 대해 쓰는 블로그들을 지켜보는 일. 오랜만에 꺼내본 필름사진들과 예전의 감탄을 새삼스럽게 공유하는 일. 거기에는 당황스럽게 공을 쳐내야 하는 순간도 준비된 레파토리 중 하나를 급하게 꺼내들어야 하는 순간도 없어서 좋았다. 삼십 분 정도는 느려도 감점같은 건 없는 지면들. 이런 곳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버티지 못했겠지.

 

앞으로도 내가 한 템포 느리게 감탄하는 사람으로 살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점을 꽤 마음에 들어한다. 맘에 드는 이야기를 발견하면 우선 메모를 하고, 카메라로 담는다. 그것들을 들고와 편한 공간에서 가장 내 마음에 맞는 방식으로 다듬는다. 그럼 더 오래, 완벽하게 즐거워할 수 있다. 꼭 마시멜로 실험 같다. 마시멜로를 받고 먹지 않은 채 기다리면 하나를 더 준다는. (물론 내가 어렸을 적에 누가 나를 데리고 그런 실험을 했다면 그냥 먹어버렸을 거라는 점도 안다.)

어쨌든 나는 굼뜬 주제에 성격은 급해서 매번 느린 삶을 견디지는 못한다. 경기도에 몇 년을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지하철 늦는 것에 분개한다. 능숙한 1호선 생활자는 핸드폰을 보지도 않으며 시간을 보낸다는데, 그런 건 요원한 듯하다. 나에게 도파민을 챙겨줄 무언가를 찾아 새로고침을 한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느려서 답답하다. 온갖 빠른 것들이 삶을 점령한 시대에서 한참을 뒤쳐져 있다는 사실에 조바심을 느낀다. 오지 않는 답장이 갑갑하다. 밥은 또 빨리 먹어.

밥을 빨리 먹는 바쁜 어른의 일상속에서 나는 능숙하게 준비된 카드를 꺼내들며 핑퐁 게임을 한다. 그러다 틈이 생기면 오솔길로 빠져든다. 거기서 나는 왠지 단단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낀다. 달변가가 아니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걸 허락받은 기분. 쿵 하고 좀 있다가 짝.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점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겨울고양이

    0
    about 1 year 전

    몸은 굼뜬데 성격은 급하다는 부분이 마치 제 인생 같아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ㅎㅎ 그래서 저도 구기 종목 잘 못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같은데, 이게 살면서 가끔은 아쉬운 부분으로 다가오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고작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게 다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잘 나온 사진을 다시 한 번 시간 들여 고르고 뒤늦게 공유하는 편인데, 이 부분도 비슷해서 재밌었어요! 다음 주 뉴스레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ㄴ 답글 (1)

© 2024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