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29. 가득보다는 덜

세점사이의 스물아홉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3.11.13 | 조회 134 |
0
|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스물아홉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뉴스레터가 끝나기도 전에 겨울이 와 버렸네요. 급격히 곤두박질쳐버린 날씨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더플코트를 입고 집 밖을 나섰다가 이게 맞나, 하고 회의감이 들었어요. 세점사이 이번 가을 호이번 주, 다음 주 딱 두 회차 남았는데요, 얼마 안 남았지만 열심히...! 이야기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처음 사진을 찍을 때 남산타워를 프레임 가득 담는 게 꿈이었는데요, 좀 우습죠.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글 바로 보여드릴게요.


가득보다는 덜

남산타워를 꼭 화면 가득차게 찍고 말겠어. 그게 카메라를 처음 막 손에 쥐었을 때의 다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지만 원래 유의미한 것보다도 당장 할 수 없는 것에 오기가 생기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 사진을 처음 시작한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달이 크게 찍히는 렌즈를 사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면, 처음에는 다들 그런 욕망이 있는 모양이다. 사진을 막 시작한 내 손에 있는 렌즈는 a6000 카메라와 세트로 파는 조그만 번들 줌 렌즈 하나였다. 요즘 아이폰의 기본 카메라 정도 넓이부터 세 배 줌 넓이까지 딱 커버할 수 있는 렌즈였는데, 어쨌든 그 만큼이 내 손에 닿는 가장 좁은 화각이었어서인지 나는 거기에 좀 집착하는 사람이 됐다.

처음 카메라를 든 2017년부터 2018년까지의 사진들은 대부분 번들 줌의 최대 줌 화각에서 찍었다. 가끔 다른 화각을 사용한 사진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화각대를 쓰지 못해 사용한 차선책인 경우가 많았다. 그게 인물이나 정물 촬영에서 적절한 프레임 통제를 위해 즐겨 사용되는 85mm 화각이라는 것은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알든 모르든간에 그 프레임의 넓이가 가진 정갈함은 꽤 마음에 들었다. 한 쪽 눈을 감고 집중하는 만큼의 범위가 사진 안에 담겼다. 집중한 만큼 담기는 쾌감이 있었달까. 맘에 안 드는 것들을 시야 밖으로 빼낼 수 있었고, 입체감에서 오는 수직수평의 틀어짐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결국 아예 그 화각대만 찍히는 단초점 렌즈를 샀다. 그 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온갖 건물들의 일부를 담았다. 매일 다니던 학교, 남의 집 처마, 모르는 빌딩 꼭대기. 모두 정갈했다.

가득 채운 수직수평을 참 좋아하던 시기
가득 채운 수직수평을 참 좋아하던 시기
아니면 요런 것
아니면 요런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걸로 남산타워를 꽉 차게 찍을 수는 없었다. 공기가 깨끗한 날이면 학교에서 남산타워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분명 볼 수 있는데, 내 카메라로는 그게 콩알만하게 찍혔다. 내한공연 티켓팅을 어설프게 성공한 기분이었다. 그 손톱만한 남산타워를 볼 때마다 엄청나게 확대되는 대포 렌즈에 대한 동경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게 있으면 정말 많은 걸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강가를 거니는 새, 보름달, 저 멀리 있는 구름, 높은 곳의 나뭇잎, 먼 산의 봉우리, 그리고 남산타워.

꿈이 이루어진 것은 2019년 가을쯤이었다. 탐론의 100-400mm 렌즈를 구매했는데, 핸드폰으로 치자면 4-16배 구간까지 줌이 되는 초망원 렌즈였다. 내 카메라에 사용하려면 센터에서 업그레이드를 받아야 했는데 탐론 제품을 취급하는 서비스 센터는 마침 충무로, 남산타워가 코앞에 보이는 동네에 있었다. 업그레이드를 받자마자 카메라에 렌즈를 끼워 남산타워 쪽을 찍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프레임 가득 2400만 화소짜리 남산타워 사진이 생겼다. 그게 끝이었다. 남산타워가 그다지 예쁘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것을 그 때 절절히 느꼈다. 몇 년간 절절히 원했던 사진이었는데도 그 사진은 인스타그램에 올리지도 않았다.

한 번의 실망으로 가득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는 않아서 이후로도 나는 그 커다란 렌즈를 잘도 매일매일 가지고 다녔다. 어디를 갈 때마다 백팩 가득 그걸 들고 다녔다. 이제는 일로 하면서도 그러기가 힘든데 그 때는 정말 열정 하나로 다녔던 것 같다. 사각을 가득 채우겠다는 꿈. 뭔가를 가득 찍고 싶다는 열망은 꽤 자주 충족되었고, 만족도는 대체로 낮았다. 마침내 맘에 드는 사진들이 나온 건 의외의 상황에서였다. 그 렌즈로도 대상을 가득 담을 수 없을 때 비로소 프레임 안이 보기가 좋았다. 그런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로 남아 있다. 그제야 나는 초망원에 대한 꿈을 놓을 수 있었다.

가득 차지 않았기에 좋다
가득 차지 않았기에 좋다

이제는 초망원 렌즈들을 거의 쓰지 않는다.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쓰지도 않는 법, 이라는 생각으로 일상에서 쓰는 렌즈들은 작고 가볍게 구성한다. 어쩌다 호기심을 참지 못해 구매해도 결국 금방 다시 팔게 되었다. 뭔가를 크게 찍을 필요가 있는 순간 정작 그 렌즈는 대체로 내 손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신, 적당한 집중과 적당한 여백을 줄 수 있는 렌즈들을 선택해 사용한다. 예전에 한참 쓰던 85mm, 혹은 넓음과 집중감 사이에 살짝 걸친 40mm를 애용한다.

사실 85mm100400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망치기 정말 쉽다. 남산타워처럼 멀리 있는 걸 당겨 찍기는 어렵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 특히 사람을 가득 담아 찍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좁은 화각이다. 배경도 잘 흐려진다. 사진 강의를 할 때 늘 망한 85mm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진을 처음 찍는 사람들이 그 렌즈를 끼우면 가장 먼저 찍게 되는 사진들. 피사체는 프레임 가운데에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흐려져 있다. 이미지 안에는 우리의 시선과 판이하게 다른 광경이 담기기에 처음 흥미를 가지기는 좋지만 지속을 권장할 수 있는 류의 스타일은 아니다. 늘 이런 가정을 한다. 당신이 스냅 포토그래퍼이고, 당신의 고객에게 그런 사진 스무 장을 전달한다면. 물론 스무 장 중에 그런 사진 한두 장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분명 광학적 배경흐림이란 건 아름다우니까. 나도 좋아한다. 좋아하다 못해 배경이 흐려진 부분의 질감까지 신경을 쓰겠다고 유리알에 수백만원씩을 투자한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레임 안에는 중심 피사체 외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 명확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실 명확히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중심 피사체 외의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기물들, 정리되지 않은 순간들, 거기서 오는 생명력. 미처 빼내지 못한 것들. 남산타워와 그걸 둘러싸는 도로, , 하늘, 구름 같은 것들.

사진 속의 장면들이 아름다운 데에는 중심 피사체만큼이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주변 사물들의 역할도 크다. 물론 프레임의 정리는 사진에 있어서 중요하다. 하지만 종종 정리가 아니라 표백해버리는 순간이 온다. 표백된 광경 안에 살풍경한 아름다움은 있을 수 있겠으나 따뜻한 장면은 없을 것이다. 나는 주인공 곁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구체적인 사진들이 좋다. 그들의 난잡함이 전면에 나올 필요는 없겠으나 반갑게 살짝 시선을 가져가 주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들이 프레임 안에 깊이를 만들고 내 눈을 지면 위에 오래 붙들어 놓게 된다.

 

한때는 무결을 꿈꿨다. 내 사진 속에 섬뜩한 정적이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직과 수평이 정갈하고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프레임 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뛰어난 장면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의 사진은 그 정적으로 향하는 점근선 위에 있었다. 나는 사진을 꽤 많이 찍었고, 집요한 접근은 나쁘지 않은 속도로 생각하는 바를 실현해 나갔다. 하지만 끝내 얻은 것은 새로운 의문들이었다. 이런 장면들이 왜 담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스쳤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데에 실패했다.

내가 사실 그 정적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제법 최근의 일이다. 내 고요에는 물 흐르는 소리나 풀 사박이는 소리 같은 게 났으면 좋겠다. 저 멀리에서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도 좋다. 그런 조용함. 아주 살짝의 여유. 수직 수평은 엄밀하지 않아도 좋고 먼 것은 멀게, 가까운 것은 가깝게 보였으면 한다. 당장이라도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은 창문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의 고요
내가 좋아하는 만큼의 고요
내가 좋아하는 망원 렌즈 속의 장면들
내가 좋아하는 망원 렌즈 속의 장면들

그럼에도 여전히, 좋아하는 망원 렌즈 사진들이 있다. 85mm, 135mm, 200mm, 400mm. 정확한 화각은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건 그 안에 담긴 광경들이 꽤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액자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듯한 장면들이 있고, 충분히 좁지 않아 미처 프레임 안에서 빼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사진 안에 풍부한 표정이 가득찬 얼굴이 있는 것도 분명 매력적이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보고 웃고 있는지도 알고 싶다. 남산타워 곁의 구름이 궁금하고 달 아래에서 빛나는 도시가 궁금하듯.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점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