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일곱 번째

세점사이의 일곱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2.10.17 | 조회 245 |
0
|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일곱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지난주에는 서울 패션위크가 있었습니다. 온갖 멋진 모델들과 사진사들이 모두 DDP에 모여 있었죠. 그 행사가 벌어지는 현장 바로 옆 건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저는 부쩍 늘어난 인파에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잠깐 들어갔다 왔는데 기만 빨리고 금방 다시 되돌아 나왔어요) 물론 동대문이 원래 인파가 없는 동네는 아니긴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으니까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인파가 북적북적한 곳, 혹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곳을 워낙에 힘들어하는 편입니다. 대학생 때 기숙사에 살면서는 '어색하게 지내느니 타인으로 지내겠다'고 생각하며 룸메이트들과 학기 내내 한 마디도 안 하고 지내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성격 탓일까요? 저는 풍경 사진을 찍을 때 항상 '고요'를 담고싶어지더라구요. 아마 제가 찍은 풍경들의 테마를 요약하자면 고요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요는 언제나 정적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손을 아프도록 꽉 쥐면 오히려 살짝 진정되는 느낌이 들듯, 어두운 그림자가 사물의 본모습을 드러내듯, 어떤 큰 무게가 혼란을 해소하는 순간 역시 저는 고요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에는 고요한 순간들을 담은 사진들을 보여드릴게요.

촬영이 끝나고 난 뒤 어스름이 지는 골목길을 필름으로 담았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난 뒤 어스름이 지는 골목길을 필름으로 담았습니다.
지하철 바닥에 햇빛이 비치는 모습이 바다의 빙하를 닮았습니다.
지하철 바닥에 햇빛이 비치는 모습이 바다의 빙하를 닮았습니다.
어두운 밤바다.
어두운 밤바다.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옵니다.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옵니다.
제가 정말 맘에 들었던, 제주도 곶자왈입니다.
제가 정말 맘에 들었던, 제주도 곶자왈입니다.
같은 공간이에요.
같은 공간이에요.
숲에서는 계속 파도소리가 들립니다. 내륙이기 때문에 실제 파도 소리는 아니고, 나무들이 바람에 의해 흔들리며 나는 소리라고 해요. 하지만 놀랍도록 파도를 닮았습니다.
숲에서는 계속 파도소리가 들립니다. 내륙이기 때문에 실제 파도 소리는 아니고, 나무들이 바람에 의해 흔들리며 나는 소리라고 해요. 하지만 놀랍도록 파도를 닮았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가운데 불빛이 집 한 채를 밝힙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가운데 불빛이 집 한 채를 밝힙니다.
나무들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무들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제주도의 독립서점입니다.
제주도의 독립서점입니다.
물결이 참 아름답죠.
물결이 참 아름답죠.
제주의 한적한 시골길입니다. 새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제주의 한적한 시골길입니다. 새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왠지 제주도 사진이 많았네요. 제가 제주도를 정말 좋아해서 그런가봐요. 바빠서 올 여름에는 가지 못했지만...슬프네요.

지난주의 글은 예전에 써두었던 글을 살짝 손보았던 글인데요, 이번 주 보내드리는 글은 그 글의 내용에서 모티브를 따와 더 요즘의 이야기로 변화시킨 글입니다. 일종의 답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둘 다 제가 쓴 거지만...)

 


역추산적 섬세에 관하여

인스타그램 사진 계정을 운영해 오면서 꽤 오랫동안 여성 포토로 오해받았다. 촬영 장소에 가면 상대방이 내가 남자라는 사실에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본다. 짜잔, 27세 군필 남성이랍니다. 잠시 민망함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왠지 거짓말을 한 기분으로 카메라를 든다. 그러다가 몇 분쯤 지나면 피식 웃으면서 너스레를 떤다. 아이 참, 저는 스토리에서 군대 이야기를 한 적도 있는 걸요. 요즘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스토리나 게시글의 내용 등에 나를 좀 더 드러내는 편이다.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속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긴 시간동안 내 신상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어서 거기에 불만을 가지거나 하진 않는다. (불만을 가질 소재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그냥 SNS 이용 빈도에 비해 내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벌어진 일 같다. 하지만 내가 본 많은 경우 사진에서 포토의 성별을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왜 그들이 나를 여성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늘 있어왔다. 그래서 피촬영자들에게 종종 묻곤 했다. 왜 제가 여성 포토일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나름대로 다양한 답변이 나왔지만 대부분 그들은 ‘사진이 섬세해서’ 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했다. 그러면 나는 좋은 말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아하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고 넘긴다. 감사한 말씀들이지만, 정작 나는 섬세하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섬세함은 내가 영영 가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덕목이다.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둘로 나뉜다. 나무를 보는 사람이 있고 숲을 보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거친 분류법에 따르자면 숲을 보는 사람 쪽이다. 다만 지독하게 나무를 못 본다는 부연설명을 덧붙여야 하겠다. 펜이나 키보드 같은 도구가 없으면 구체적인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나는 전시회에 가면 작품 하나하나의 구체적 작품론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들을 연속적인 인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기보단 큰 한 선을 타고 흘러가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무슨 이야기들을 종종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회적 대응을 위한 임기응변에 가깝다. 그렇게 연속된 인상을 중첩하고 중첩해서,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어렴풋한 그림을 하나 그린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연속된 흐름을 볼 뿐 한 지점을 꼽는 방법은 잘 알지 못한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건 내가 시의 세계를 어려워하는 이유이며 소소하게 말하자면 내가 블로그를 쓰기 어려워하는 이유이다. 평시에 타인보다 말을 길게 하지만 아주 긴 말은 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섬세는 내 덕목이 아니다.

 

사석에서든 다른 글에서든 여러 번 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는 등장인물들의 다층적 감정 변화가 아주 섬세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감정이 파도라면, 그 파도의 포말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동시에 이 소설이 굉장한 것은 그 포말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결국 파도의 큰 흐름까지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는 그런 감정을 포착할 자신도, 그렇게 포착한 것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자신도 없었다. 내가 쓴 글 속의 인물들은 파도에 휩쓸린 목각인형 같았다. 그들은 해류의 방향을 알려주는 부표 정도는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이 아니라.

그래서 섬세하다는 말 속의 의미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사진을 찍는 작법은 그와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델이 연기할 수 있는 커다란 스토리라인을 주고, 내가 생각하는 바와 유사한 이미지들을 제시한다. 그 스토리라인에 맞게 복장을 세팅하고, 모델은 자유롭게 연기한다. 하지만 내가 만든 무대 위에 있길 바란다. 포징 등에 있어 상세한 디렉션을 하지는 않지만, 빛이 떨어지는 깊이나 각도, 주변 구성의 배치, 시선의 방향, 컬러의 배합 등에 있어서는 집착을 하는 편이다. 섬세함이 세심하고 세밀하게 주의를 미치는 성격을 말한다면, 나의 사진은 섬세함을 역산한 결과물로 봐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세밀한 흐름들이 나의 통제 아래에 있기를 원하는, 통제광적인.

확실히, 소설을 쓸 때도 나는 그런 편이었던 것 같다. 세밀한 감정의 결보다는 문장의 리듬감이나 플롯의 이음매에 집착하는 파였다. 섬세함의 결여로 소설 쓰는 일을 포기하고 옮겨온 사진이라는 영역에서 내가 듣는 이야기가 섬세함이라는 건 조금 이상하고 웃기고 또 슬픈 일이다. 어쩌면 소설을 계속 썼다면, 나도 결과론적으로나마 섬세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조금 젠체하는 주제의 이야기였지만 사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내 일상에 섬세함이라고는 없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스토리의 절반 이상은 실수와 착각에 관한 것이다. 한 달 전의 일정을 미리 짜두는 것은 섬세함의 발로라기보단 내가 할 멍청한 실수들이 만드는 우당탕탕을 어떻게든 완충하기 위해 치는 쿠션에 가깝다. 일정표를 미리 짜지 않으면 착잡함과 불안이 나를 엄습한다. 계획을 종종 운운하고 딱딱한 문장들을 자주 써서인지 MBTI에서 J(계획형)의 화신 같은 걸로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사석에서 나를 만난 뒤 이런 허당이 또 없다고 혀를 차며 돌아갔다. 나의 가장 큰 장기는 계획이 아니라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합리화와 임기응변이다. 나는 내가 움직일 큰 대본을 미리 짜두고 그 안을 사부작거린다.

위에서 사진을 할 때 무슨 작가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것 역시 진실과는 많이 다르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어요.’ ‘아직 괜찮아요.’ ‘찍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다. 내가 만들어낸 흐름에 대한 신뢰(혹은 낭떠러지에 선 신앙)와 그걸 밀어붙이기 위해 사용되는 온갖 임기응변이 내 사진을 구성한다. 그걸 만드는 사람을 멀리서 보면 J의 화신이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을 멀리서 보면 섬세하게 빚어진 사진이 된다. 실제가 그러한가? 자신이 했던 긴장을 어처구니없어하며 돌아간 모델들이 그 답을 알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나라는 사람과 내가 찍는 사진은 많이 닮은 모양새가 되었다. 당연히 의도한 건 아니다. 비대한 자의식을 자랑하는 건 매일 길게길게 쓰는 글들로 족하다. 하지만 문득 드는 의문은, 나를 닮아있는 사진이 종래에는 어떻게든 어떤 모양이든 바깥으로 비치며 어떤 미덕을 모사했듯이, 나의 소설도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섬세할 수 있었을까?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점사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