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여섯 번째

세점사이의 여섯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2.10.10 | 조회 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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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여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기온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집니다. 지난 주 레터에서는 '이제는 외투를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당장 이번 주가 외투를 입지 않으면 추운 날씨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 주에는 내피가 들어간 옷이 필요해질까요? 잠깐 있으면 또 금방 겨울이 될 겁니다. 이렇게 기온이 훅훅 떨어지니 사실 좀 당황스럽기도 해요. 이 레터는 가을동안 보내겠다, 하고 선언한 거긴 한데 어디부터가 가을이고 어디부터가 겨울인지 아직 못 정해놨거든요. 언제부터가 겨울일까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젠 두 개의 계절과 두 번의 환절기가 남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환절기는 더 짧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9월까지도 꽤 더웠잖아요. 극지방 기온이 올라 대류가 약해지면서 더운 공기를 밀어내는 바람이 약해졌다고 해요. 이 험한 기후위기의 시기를 마음 덜 아프게 살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여름과 겨울을 사랑해야 할 텐데, 아직은 환절기에 더 마음이 많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주에는 여름을 미화하는 사진들을 보여드릴게요.

 

여름하면 역시 여름 구름이죠.
여름하면 역시 여름 구름이죠.
그리고 푸른 바다와
그리고 푸른 바다와
긴 노을과
긴 노을과
붉은 박명
붉은 박명
그리고 짧기에 낭만적인 밤이 있는 계절.
그리고 짧기에 낭만적인 밤이 있는 계절.
나의 삶보다 태양이 느리게 흐르는 계절.
나의 삶보다 태양이 느리게 흐르는 계절.
가장 깊은 빛의 계절.
가장 깊은 빛의 계절.

 

오늘의 글은 사실 예전에 쓰인 글입니다. 하지만 워낙 좋아하는 글 중 하나여서 글을 고친 뒤에 보여드려요. 많이 읽히지 않은 글들 중 제가 좋아하는 글들이 좀 있는데 그걸 보여줄 방법이 없을까 하고 가끔 생각합니다.


너의 체온 만큼

진로 희망 설문에 당당하게 소설가를 적어 내던 때가 있다. 잠깐의 꿈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 기간은 꽤 길었다. 심지어 이과를 지망하던 먼 옛날에마저 언젠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슴 한 켠에 두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소설을 써서 친구들과 돌려 읽기도 했고, 자습시간에 선생님 몰래 소설을 쓰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가 최고였는데, 지금 글 쓰는 양을 생각하면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썼었나 싶다. 소설 쓰는 동아리의 회장이 되기도 했었고, 아무리 엉망진창인 퀄리티라지만 그 바쁜 시절에 장편을 하나 쓰기도 했었고. 그놈의 소설!

그렇게 열심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손에서 놓은 계기는 좀 어처구니없다. 군대에서 책 읽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던 시절,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두 등장인물 사이에서 미세한 감정이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둘 바깥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설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글들을 읽은 경험이나 압도적인 능력의 차이를 느꼈던 순간들은 적지 않았지만 유독 그 소설을 읽고서 느낀 절망감은 각별했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소설은 그런 사람의 몫 같았다.

세상에는 뛰어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서점에 가면, 혹은 인터넷에서 스크롤을 조금만 내려 보면 멋진 글들이 넘쳐났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그럴 수 없다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뒤로 한동안은 마음을 내려놓고 콘텐츠의 즐거운 소비자로 지냈다. 순수한 소비자의 입장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뛰어난 것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그저 좋았다. 내가 만든 것들의 꼴을 보고 착잡할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면 애초에 장래희망에 소설가 같은 걸 적어내는 일은 없었겠지. 텍스트를 써내는 건 내게는 꼭 숨 쉬는 일 같았다. 습관 이전의 문제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서 글 쓰는 일에 완전히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나는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로 쓴 글들이 소설은 아니었지만 숨을 쉬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글을 다시 쓰게 되었기에 이전의 그 고민들은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뛰어난 작가들이 너무 많았고, 나는 확실히 그들만큼 뛰어나진 않았다.

더 나아지고 싶었다. 뛰어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만족스러울 만큼 해내지 못한다는 것도 참기 힘들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은 간절하다. 하지만 방법론이 문제였다. 과연 나는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생각했다.

종종 사진을 어떻게 잘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정의하고, 닮아가고, 나아지는 과정에 대해서 말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내용물은 간단하다. 우선 ‘잘 찍은 사진’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해야 한다. 잘 찍은 사진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구체적이지 않은 데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잘 찍은 사진’의 모습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본인이 생각하기에 잘 찍은 사진들을 찾고, 그 후 그것들을 잘 찍은 사진이라 정의하라고 말했다. 자, 그럼 정의. 다음은 닮아가는 과정이었다. 어떤 사진을 닮은 최종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진들을 왜 잘 찍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 사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그건 구도의 활용일 수도, 색깔의 조합일 수도, 순간의 포착일 수도 있다. 그 방법을 계속 생각하며 내 사진과 그 ‘잘 찍은’ 사진을 닮아가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은 더 말할 게 있나? 그 방법론을 바탕으로 더 나아지는 것.

글에서도 마찬가지의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못할 건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럼 이제 첫 번째 문제를 풀어볼 차례였다. 과연 내가 닮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이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잘 쓴 글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 탁월한 것들 사이에서 닮고 싶은 것을 엄밀하게 골라내는 것은 어찌 보면 고통스러운 일이다. 닮고 싶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멋진 글이면 다 닮고 싶지 뭐.

고민을 거듭하다 내가 그간 잘 쓴 글들을 두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나는 멋진 글, 하나는 아름다운 글. 어느 쪽을 닮고 싶으냐 물어본다면, 아름다운 것들 쪽이었다. 그런 글들은 정말, 문득 튀어나왔다. 책을 펼치며 본 것들도 있고, 책 바깥에서 본 것들도 있었다. 확실한 건, 내가 그것들을 읽으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확신했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글들은 너무 인상깊어서 지금이라도 줄줄 읊어볼 수 있다. 임지은 작가의 ‘연중무휴의 사랑’에 등장한 첫 번째 글(나는 이 글을 읽자마자 내가 이 책을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리스팅해놓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이나, 한승혜 작가가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라거나, 박선아 작가가 학창시절의 풋사랑에 대해 썼던 글이라거나,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라든가, 심너울 작가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에 실린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라거나. 뭐 그런 것들. 아, 정대건 작가의 ‘GV 빌런 고태경’ 도 책꽂이에서 눈에 띈다. 아무튼 뭐 그런 것들. 나는 그 글들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해서 내가 ‘멋지다’보다도 ‘아름답다’를 생각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름다운 글들은 무엇이 다를까?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글들은 마음이 평온해질 만큼 잔잔했고, 어떤 글들은 계속해서 웃음이 나는 위트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글들은 화려했고 어떤 글들은 아주 조용했다. 물론 모두 아주 잘 쓴 글들이라는 최소한의 공통점은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건 멋진 글들 역시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그래, 기술적인 범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일단 알겠다. 그래서 기술 바깥의 것들로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아름다운 글들의 가장 가시적인 공통점이라면 그것들이 구체적인 사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에 대해서 다루는 글은 그 온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뜨거우면 그 글이 부담스럽고 너무 차가우면 그 글에 정이 떨어진다. 사람에 대해 다루려면 결국 그가 가진 결점에 대해서도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다루는 글은 딱 체온만큼의 온도가 좋은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는 결점이 있다. 너무 완벽하다면 너무 완벽하다는 사실이 결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너무 뜨거운 사랑의 시선은 그 결점을 억지로 무시하는 것만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차가운 시선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걸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사람 만큼의 온기가 있는 시선이란, 음, 뭐랄까, 그 중간에 서 있다. 모든 사람이 결점 혹은 한계를 내포함을 인정하는 한편, 그것을 너무 매정하게 바라보지만은 않는 것. 그와 동시에 체념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 말은 쉽지만 사람은 너무 까탈스럽거나 대책 없는 존재라서 직접 해보면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 온도를 가지고 나와 다른 결점을 가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글. 그런 눈빛이라니! 나는 그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 같다.

저 아름다움이 어려운 이유는 저것이 무작정의 중용으로는 닿지 못할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거대한 중용은 가끔 멋지긴 하지만 뭐랄까, 저게 되면 그 사람은 초인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문제를 감내하면서 지속해 나가는 꿋꿋함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대형 세단이 풀 악셀을 밟고 질주하는 걸 난 꿋꿋함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에라 모르겠다, 꺼져라, 이것도 너무 체념적이고. 꿋꿋이 사랑하되 해탈하지는 않는 것. 그런 시선. 뭐랄까, 누군가를 부처님이라 부르는 것과, 사랑의 천재라고 부르는 건 다르니까. 나는 사랑의 천재들이 좋다.

음, 정의를 내려놓고 나니 더 막막해졌다. 내가 무작정 사람에 대해 다룬다고 해서 저 아름다움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조악한 짝퉁 정도나 되면 다행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 아름답게 글을 쓸 수 없다. 그 사람만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사랑할 만한 점이나 그 사람의 결점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까. 결국은 특유의 시선을 가지고 세계를 해석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도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거겠지. 더 많은 데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배우고, 느끼고, 함께하고.

그러다 보면 나 자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별 수 없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글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내기 때에는 꼭 들어보고 싶었던 수업인 소설창작연습을 결국 듣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고 나니 괜히 미련이 남는다. 오랜만에 단편을 쓰고 싶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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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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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굴

    0
    over 1 year 전

    사람에 대한 글은 체온 만큼의 온도가 적당하다는 내용이 참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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