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미친 짓을 벌이자

불확실성과 가능성을 사랑합니다.

"We came to Seoul to learn many things."

얼마 전 글로벌 브랜드의 VIP를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NDA를 써서 브랜드 이름과 강연 주제는 말할 수 없지만 10명 정도의 노련한 임원들과 매우 즐겁게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 장소는 강남의 어느 공유 오피스였다.

그런데 특히 흥미로웠던 건 그들의 일정이었다. 3박 4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한 그들은 을지로, 홍대, 성수, 용산 등 '힙한 동네'를 둘러볼 예정이라고 했다. 그냥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각 동네의 브랜드 스토어, 인기 카페, 라이브 클럽과 디자이너 샵 등을 방문해 그 장소를 운영하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 유명한 곳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언더그라운드라고 해도 좋을 공간들이었고 과연 '찐'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제대로 된 곳들이었다.

이렇게 동선을 짠 이유를 묻자, '서울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들에게 '서울'은 생각보다 중요한 도시였다. 과연, 일반 여행자가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의 임원의 입장에서 '서울'은 트렌드의 중심이자 다양한 외국인이 머무는 도시였다.

사실 나도 몇 년 전부터 실감하던 변화다. 2002년부터 2020년까지 홍대앞을 거점으로 살았던 나는 그동안 인디 음악 씬의 흥망성쇠를 비롯해 카페, 디자이너 브랜드, 서브컬쳐 붐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2021년부터는 성수동에 살면서 지난 4년 간 성수동이 어떻게 바뀌는지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특히 체감하는 변화는 언어다.

홍대앞에 살 때에도 외국어를 많이 들었다. 단골 술집에서 매일같이 만나던 영국인, 호주인 친구들도 있었고, 외국인들이 제작해 배포하던 로컬 잡지(주로 홍대앞의 클럽과 바를 소개하는)도 있었다. 2002~2010년 무렵 홍대앞 거리에서 영어를 듣는 건 거의 일상적이었다. 이들은 주로 1년 이상 장기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로 서울에 몇 개월 머물거나, 서울의 학원이나 학교에서 외국어 강사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2010년 이후에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등장했다. 길거리를 비롯해 카페나 술집에서 늘상 일본어와 중국어를 듣게 되었다. 성수동에서도 외국어를 자주 듣는 건 마찬가지지만, 살짝 다르다.

"Want to try it on?"

점원이 내게 물었다. 나도 모르게 "예스, 쌩큐."라고 대답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뭔가 잘못된 걸 알아차린 점원이 당황하면서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우리는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며칠 전 성수동 편집샵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2년 전만 해도 이런 경우가 흔하진 않았다. 요즘은 자주 겪는다. 성수동만 그런 게 아니다. 서울 곳곳에서 이런 경우가 흔해졌고, 능숙한 외국어로 안내하는 한국인 점원들도 자주 본다.

작년 기준, 서울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연세대,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의 교환 학생들도 최고 규모를 갱신하고 있다. 이전까지 중국에 치중되던 유학생들도 미국인으로 바뀌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티 서비스도 활황이다. 합정, 홍대에서 에이비앤비를 운영하던 지인들 중에는 일찌감치 외국인 유학생 대상의 게스트하우스로 업종을 변경한 사람들도 있다. 최소 6개월은 예약이 차 있다고 들었다.

나도 2년 전부터 다양한 외국인들을 만나고 있다. 주로 링크드인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은데, 일단 서울을 방문하는 케이팝 팬들이 많다. 그들은 주로 케이팝 팬이면서 동시에 브랜드, 페스티벌, 레이블, 에이전시 등 업계 종사자들이기도 하다. 뉴욕, LA, 시카고, 모스코바, 런던, 베를린, 프라하, 도쿄 등 출신 도시도 다양했다. 그들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케이팝 공연, 팝업 스토어, 케이팝 클럽, 음악 방송 등을 다니며 팬 문화를 즐겼다.

다음으로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음악,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관계자들 뿐 아니라 뉴욕타임즈, CNN, BBC, 블룸버그, 파이낸셜타임즈 같은 미디어 기자와 PD들도 있고 (앞서 언급한 대로) 인사이트 트립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VIP들도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서울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강조했다. 덕분에 그들 관점에서 '서울'을 다시 보게 된다. 이건 좀 신선한 경험이다.

몇 년 전 나는 [케이팝 제너레이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미국의 음악업계 종사자들을 인터뷰했다. LA에서 뉴욕으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거기서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글로벌 관점에서 케이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글로벌이 뭐죠? 나는 LA(혹은 뉴욕)에 있어요. 내가 아는 건 LA(혹은 뉴욕)의 상황입니다. 당신이 말한 글로벌이 인터내셔널이란 뜻이라면, 유감이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요. 나는 뉴욕(혹은 LA)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까요."

그때 깨달았다. 아니 실감했다. 미국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대도시로 연결된 경제공동체라는 것을. 특히 뉴욕 같은 상징적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미국인이란 정체성보다 뉴요커라는 정체성이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서울은 한국보다 커요."

홍대앞에 살 때 나는 '스팟'이나 '씬'이란 개념으로 이런 변화를 이해했다. 서울 전반이 아니라 홍대앞이란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은 성수동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전반에서 겪는 일이다. 물론 여전히 동네 특유의 분위기나 그 안에서 작동하는 씬(생태계)은 존재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서울이란 도시 전체를 유행의 최전방에 자리 잡게 하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서울은 한국보다 크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이제까지 서울과 한국은 같은 개념이었다. 서울에서 유행하면 곧이어 지역 대도시에도 유행이 옮겨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서울과 지역의 시간이 다르게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홍대앞이나 성수동, 용산의 인기 브랜드나 매장은 서울 밖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인터넷과 모바일 쇼핑 덕분이겠지만, 문화적 관점으로 봐도 어떤 시차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서울과 한국의 시간 축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제까지 한국이라는 단일 개념으로 트렌드를 이해했지만 점점 서울과 부산, 제주, 강원 등 도시별로 문화적 변화를 바라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론 오히려 긍정적이다) 결과적으로 서울은 서울의 시간을 살고, 지역은 지역의 시간을 산다. 어디는 더 빠르기도 하고, 어디는 아예 무관하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서울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서울에는 글로벌 브랜드의 지사나 사무소도 대거 들어와 있다. 최근 구글에 입사했다고 알려준 지인은 성수동 사무실로 출근한다고 했다. 구글/유튜브를 비롯해 스포티파이, 메타, 넷플릭스 같은 소셜미디어나 콘텐츠 플랫폼도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021년에 홍콩에서 서울로 아시아 지국을 옮겼다. 서울은 점점 중요한 도시가 되고 있다.

예전에는 글로벌 트렌드를 이해하려면 무조건 해외 대도시로 가야 했다.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홍콩, 상하이 같은 도시에서 어떤 브랜드와 어떤 아티스트가 어떤 공간에서 젊은이들과 어떻게 만나는지 경험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서울이 그런 도시가 되었다. 언젠가 20대 초반의 베를린 친구에게 독일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너도 알다시피, 베를린과 독일은 달라."라고 말했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베를린과 독일이 다르고, 도쿄와 일본이 다르듯이, 서울과 한국도 다르다.

다를 뿐 아니라, 서울은 한국보다 크다.

"글로벌 진출이 맞는 말이에요?"

이런 관점이 왜 중요하냐면, 우리가 관습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정의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흔히 '글로벌 진출'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서울이 지리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아이코닉한 도시가 된 상황에서 과연 '진출'이 맞는 표현일까? 브랜드, 미디어, 크리에이터, 아티스트 등이 서울로 모이는 지금 우리가 굳이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말해 이제까지의 '글로벌 전략'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하나의 질문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사실 예전부터 도시는 음악과 문화의 핵심 기반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비틀스는 사실 리버풀이란 지역의 인디 밴드였다. 스톤로지스, 스미쓰 등 80년대의 뉴웨이브와 로큰롤을 뒤섞은 맨체스터 사운드는 말할 것도 없고, 힙합은 뉴욕 북부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고, 모타운 사운드는 디트로이트에서 성장했으며, 디스코는 시카고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탄생했다. 시부야케이는 도쿄의 한 구석(스팟)에서 탄생한 음악이었다. 이런 음악 스타일/장르는 그 지역의 아티스트 공동체를 거치며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의 트렌드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어떠한 트렌드가 특정 도시로 수렴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과정에서 도시 브랜드가 만들어지고, 영향력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우리가 그걸 지금 당장 서울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다는 게 새롭다면 새로울 뿐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결국, 문화다. 브랜드 팝업이나 플래그십 스토어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문화는 그보다 아래에서 벌어진다. 글로벌 브랜드의 VIP들이 서울의 언더그라운드 스팟을 돌면서 아티스트를 만나고, 카페 사장과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냥 서울에서 미친 짓을 벌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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