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의 말줄임표 | 할머니가 원톱으로 나오는 웹툰

매주 수요일은 덕질 경험기부터 음악/영화/웹툰 리뷰에 이르기까지, 저의 동료들이 쓰는 아티클이 실립니다. 오늘은 강남규 필자가 느낌표,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또한 그 이야기를 말줄임표로 읽을 때에야 이해하게 되는 콘텐츠에 대해 얘기합니다.

콘텐츠에서 노인은 의외로 발견하기 어렵다. 잘해야 조연, 대체로는 단역 정도의 비중. 캐릭터도 한정적이다. 젊은 주인공에게 인생의 지혜를 전하는 현자, 혹은 누군가의 다정한 (조)부모. 가끔 남성 노인 배우들은 흥미로운 역할들을 맡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이라든지), 여성 노인 배우들은 전형화된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배우 김혜자씨가 열연한 <눈이 부시게> 정도가 그나마 할머니를 새롭게 조명한 대표적인 이야기랄까. 

물론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배우들이 맹활약하는 콘텐츠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노인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다. 왕년의 주연급 배우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역 배우로 활동하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배우를 쓰지 않는 콘텐츠, 특히 웹툰에서 노인을 찾긴 정말 어렵다. 웹툰이라는 영역은 아직까진 젊은 사람들의 전용구역 같은 느낌이고, 그러니 노인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노인의 이야기를 열망하는 나 같은 독자가 있다.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담기지 못하는, 노인들의 이야기에만 담길 수 있는 어떤 독특한 감정이 있다. 나는 그 감정을 사랑한다. 노인들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측면도 있다. ‘틀딱’ 같은 노골적인 노인혐오가 판치는 시대니까.

고령화 시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배제하고는 ‘공동체’를 고민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콘텐츠가 중요한데, 콘텐츠의 사회적 역할이 '낯선 타자의 삶을 대리체험하면서 이해와 공감에 다가가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뻔하고 따분한 얘기일까?

어쨌든. 이런 점에서 최근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팬인데 왜요>는 특별하다. 할머니가 원톱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노인을 스테레오타입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즉 인생의 지혜를 전하는 현자도 아니고, 누군가의 조부모도 아니다. 이 만화의 주인공, 77세 할머니인 ‘윤순’은 아이돌을 덕질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한정수량 굿즈를 몸에 두르고, 아이돌 생일 광고 앞에서 사진을 찍고, 생일 카페 투어를 하는 찐팬.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윤순은 우리 시대 할머니들이 으레 그래왔듯 어릴 때부터 가족을 위해 일하다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과 결혼해 집안일을 도맡아 살아왔고, 자식들이 결혼해 나간 뒤에는 남편과 둘이 살며 억압된 삶을 살아온 여성이다. 오직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

그런 윤순이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아이의 핸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아이돌 그룹 ‘라이트’의 노래를 듣고 ‘덕통사고’를 당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직 9화(미리보기 포함)까지밖에 나오지 않아 확실친 않지만, 스마트폰조차 없었던 윤순이 아이돌 코어팬이 되어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 줄거리인 듯하다. 윤순이 유튜브를 보기 위해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스트리밍을 위해 음악앱을 설치하고, 음악방송을 시청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아참, 윤순이 덕통사고 당한 노래의 노랫말은 이렇다. “다른 이가 원하는 대로, 다른 이가 이끄는 대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다 보니 어느새 남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내가 있어. 나는 어디에 있는 건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 건지. 갈 길을 모른 채 멍하니 서서 울고만 있어.”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본 적 없었던 윤순을 울린 노랫말. 그렇다. 이 작품은 자기를 위해 살아본 적 없는 할머니가 아이돌 덕질을 매개로 뒤늦게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노인의 이야기로 이만큼 새로우면서도 유의미한 게 또 있을까.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진 덕질의 권리를 기꺼이 노인 세대와 공유하면서, 덕질이 흔히 오해되고 조롱받듯 마이너하고 음침한 무엇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뜨거운 위로이며 주체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소중한 일이라는 사실을 노인 세대를 통해 낯설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젊은 작가가 노인 세대에 화해와 연대의 손길을 내밀면서, 젊은 세대의 덕질에 대한 오해를 걷어치우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셈이다. 노인 이야기 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웹툰계에서 보기 드문 성취다.

그러나 솔직히 아쉬운 점이 많다. 상황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고, 대사는 너무 직설적이며, 주변 인물들의 성격 또한 너무 전형적이다. 모든 상황과 대사, 캐릭터들이 오직 해당 에피소드의 핵심 주제를 전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텐데,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워할 것 같다는 조급함인지, 매화 주제 전달에 서두르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특별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연재 초기라 조급할 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보다 풍성하고 (노인들의 삶처럼) 천천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지금은 노인 독자들이 이 웹툰을 보게 될 일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노인들도 웹툰을 읽으며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 그런 때가 꼭 왔으면 좋겠다.

※ 수요일 코너 안내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4명의 필자들이 돌아가며 글을 씁니다. 월 1회 연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사정에 따라 주기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답니다~;;;)

1) 핑크블러드의 덕후 마음: 덕후 마음은 미지의 신세계...? 요즘 덕질은 '포카'가 핵심인데, 그걸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보다 이 판에 막 빠져든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궁금하지 않나요? '핑크블러드'가 그런 얘기를 씁니다.

2) 랜디 서의 음악 리뷰: 입체적인 음악 감상을 위한 가이드. '시사인'과 '위버스 매거진', '아이돌로지'에 글을 쓰고, 저와는 '360리뷰'를 진행한 랜디 서 평론가가 주목하는 싱글/앨범 리뷰입니다.

3) 임희윤의 북유럽 가이드: 어디가서 아는 체 하기 좋은 이야기. 동아일보 임희윤 기자가 쓰는 북유럽 음악 가이드입니다. 북유럽의 여러 장르부터 앨범 아트웍에 이르는 광범위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4) 강남규의 다시 보기: 언제나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콘텐츠든 비즈니스든 결국 함께 사는 문제니까요.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 강남규님이 쓰는 영화/드라마/웹툰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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