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직접 그 사람을 대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입문하면 알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영감을 받으며 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그림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대단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만난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들의 삶과 업적은 저의 세계를 한 단계 넓혀주었습니다.
“김정기” 작가는 첫 순간부터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밑그림 없이 바로 그림을 그립니다. 사람 한 명, 두 명, 열명, 수십 명 정도를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공간을 깨알같이 그림들로 채웁니다. 그냥 대충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보다 더 세밀하고 자세히 그립니다. 그러면서도 예술적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죠. 그 모든 장면을 사진이나 참고 자료 없이 생각 하나만으로 그려냅니다. 초인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그대로 그림으로 재현하는 기인들이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기 작가는 자신의 해석과 견해가 들어간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그의 작품들은 그를 기억력 좋은 사람이 아닌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게 해 주었습니다.
만화가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만화가의 유머를 가지고 있었고 개성 있는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관객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도 그런 그의 독특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이브 드로잉”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이유일 것입니다. 남들이 보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프로 작가가 하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모험이죠. 잘하면 본전, 못하면 엄청난 비난이 예견되는 위험한 게임입니다. 그런 게임에서 김정기 작가는 주위의 모두를 사로잡아버립니다.
천재, 타고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김정기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 역시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 들더군요. 그는 말합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을 잘 관찰했고, 엄청나게 많이 그렸다고.. 이 말속에 얼마나 많은 노력의 고통이 녹아 있을까요? 어쩌면 그의 천재성은 남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실천하는 노력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무덤덤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과정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매력이 넘치죠. 그리는 사람이 재미없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전해졌습니다. 비보가 전해지기 불과 얼마 전에도 그의 라이브 방송을 봤었기에 더 놀라고 비통했습니다. 저는 어느 인터넷 매체의 인터뷰에서 궁극적인 목표를 밝히며 김정기 작가를 언급했었습니다. 그가 하는 것처럼 머릿속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이죠. 그만큼 그는 저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 없다는 것이 저에게 큰 공허함을 줍니다.
김정기 작가의 명성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대단해 보입니다. 그에 대한 관심이 정작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의 마지막 라이브 드로잉도 외국에서였죠. 하지만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그가 좋아하는 그림과 함께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생을 마감하는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사랑하다 죽겠는가? 아니면 증오하다 죽겠는가?" 김정기 작가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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