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장]
클래식을 하는 성악가 부인을 둔 덕분에 내가 독일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학생, 유학준비생, 솔리스트, 합창단원 또는 오케스트라단원등 사는 도시와 분야만 좀 달랐지, 전부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그들은 모이면 음악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전공분야를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신기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할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던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독일 생활에 적응을 한 만큼, 음악인들과 함께 할 때 나도 나만의 할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독일에서 만난 수많은 음악가들은 상당한 실력이 있음에도 유학에 실패하거나 취업에 실패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독일에 남아 있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왜 그럴까? 그들과의 모임자리가 있으면 어차피 할말도 많지는 않으니 분석하기 시작했다. 실력에 관한 부분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니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잊고 지내는 것 같아 모임때마다 언급하는 것이 있다.
'음악을 소비하는 대부분은 비전공자인데 자신의 실력을 왜 이렇게 전공자들의 평가에만 메달리려 하는가?'
그들이 직접 이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대부분 "모르면 빠져."와 같은 분위기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이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특유의 오지랖까지 합쳐져, 취업이나 유학이 안되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음악 사업을 제안 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안 된다는 이유들만 늘어갔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비즈니스 공부를 하니 음악가들은 나처럼 아무 기술 없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보다 비즈니스에서 훨씬 유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전공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어쩌나. 오지랖이 더 심해졌다. 이제는 모임 때 그저 언급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비즈니스를 하자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희안하게도 아무도 음악 비즈니스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내 부인도 나와 음악사업을 하지 않는다.
왜?
외부적인 이유는 가설에 불과하니 제쳐두고, 내부적으로는 내가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잡놈(또는 잡것)' 의 줄임말. 반대말로는 네임드가 있다. 출처: 나무위키) 비즈니스맨이라 그런 것만 같았다. 부인은 나 혼자 열내면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말하는 것이 안쓰러운지 누가 먼저 이야기 하기 전까지 음악 비즈니스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점점 음악가들 모임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부인의 지인이라며 K씨가 집에 놀러왔다. 피아노 전공이라 했고, 그녀도 다른 음악가들처럼 서글서글하고 이야기도 잘하고, 매너도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저냥 앉아 있으면서 오늘 해야 할일을 생각하며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길 바라던 중, K씨의 말이 귀에 꽂혔다.
"음악 페스티벌 하는 것이 꿈이예요. 어떻게 비즈니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와우! 뭐지? 처음이었다. 음악 비즈니스를 꿈꾸는 음악가. 단순히 당장 공연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고, 취업이나 대학진학이 목표가 아니라 10살인가? 어릴 때 부터 꿈꿔온 자신만의 음악 페스티벌을 열고 싶은 음악가. 갑자기 흥미로워져서 K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꿈을 같이 이루어 봅시다." 인터뷰 후 내가 건넨 제안이었다.
하지만 K씨를 섭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사장의 반대와 음악 분야는 냅두라며 핀잔주는 부인의 눈치, 공연 일정 때문에 바쁘다며 다음에 연락하겠다는 K씨.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나 겨우 여사장과 K씨가 한자리에 모였다.
[여사장]
"남사장님, 이건 알아두셔야 겠어요. 저는 음악하는 사람이랑은 비즈니스 안 합니다."
원래도 단호한 편이지만, 이때만큼 날카롭게 남사장에게 이야기를 전한적도 이제껏 없는 듯하다. 아마 남사장이 이 때 정말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남사장이 처음 음악 관련 매니지먼트 사업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그냥 아이디어 스케치 중 하나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실제로 피아니스트 한 명이 섭외가 되었다고 한다. 별로였다.
'피아노 치는 사람이라고?'
내 주변의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 이겠지만, 나는 원래 꿈이 피아니스트였다,.
그런데 집안에서 반대하고, 스스로 재능의 벽에 무너지고, 그렇게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은 이후로 허무주의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 음악 전공하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가지지 못한 꿈 때문에 그들을 동경하며 가까이 두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내가 음악을 했으면 너희들보다 훨씬 더 잘 했을 수도 있어! 라는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하는 날들도 많았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경제관념이 없어.
음악은 집안에 돈이 좀 있어야 할 수 있는거야.
음악은 재능이 다야. 때문에 노력해도 안 돼.
음악하는 애들은 악기만 열심히 했지, 상식이 없어. 등등
혼자 온갖 선입견을 만들어 내면서 음악가로 피어나지 못한 내 꿈을 정당화 시키고 있었다. 내가 음악을 하지 못한건,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멀리하고, 마치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것이 다행인 것 마냥 온갖 스토리를 만들어 내어 내 찌질한 과거를 정당화 하고자 했다.
그러던 와중에 남사장이 하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악기인 피아노를 다루는 연주자, K씨를 데려왔다.
안그래도 음악하는 사람들이랑은 아무것도 같이 하고 싶지 않아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아보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내 앞에서 K씨가 너무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남사장과 나에게 이런 멘트를 날린다.
"제가 음악 비즈니스를 남사장님, 여사장님과 함께 파트너쉽을 맺고 진행하려고 한다고 주변에 알렸더니 대부분 반응이, 그 남사장이랑 여사장 믿을 만한 사람이냐구, 사기꾼 아니냐고 그러네요. 호호 "
'사기꾼 아니냐구? 나는 솔직히 너가 더 사기꾼 같거든? 남사장이 너 어디를 보고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하는지는 절대로 모르겠지만, 한번 두고 보자구! '
남사장이 K씨를 높게 평가한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인적 네트워크였다.
본인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다.
(그 당시에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K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
사실 K씨의 주변사람들만 우리를 의심스럽게 생각한것만은 아니다. K씨가 본인이 기획하고 있는 음악 페스티벌에 독일 교수진을 섭외할 수 있을거 같다는 말을 나는 사실 믿지 않았다.
"남사장님, K씨의 인적 네트워크가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건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
남사장은 K씨에게 MOU 체결이 가능한 교수진 리스트를 요구했다.
그리고 단 일주일 뒤, K씨는 두 장의 MOU 계약서와 교수 프로필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어떤 교수를 들이밀었나 어디 한번 보자! '
독일 교수진 두 명중 한명은 바이올리니스트, 한명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 전공 담당 교수님의 프로필을 구글에 검색했다. 명반으로 추대 받는 하이든 소나타가 유투브 영상에 올라왔다.
그래도 한 때 꿈이 피아니스트 였던지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는 영상을 꽤 많이 봐 오던 나였기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독일 교수님을 폄하하는건 아니지만, 내가 워낙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의 영상 중에서도 최고라고 평가받는 연주 영상들만 보던 사람이라는 근자감* (근거 없는 자신감의 축약어. 2009년부터 급 확산된 신조어며 민폐로 분류되는 성질중 하나다._ 출처: 나무위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시간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놓고, 별 기대없이 플레이 한 하이든 소나타를 맥북 프로의 사운드로 듣다 보니, 내가 잊고 살았던 감수성 이라는게 되살아 나는 듯 했다.
'어 뭐지? 맥북으로 클래식 처음 들어서 이러는 건가? 왜 이렇게 좋아?'
그리고 바로 이 하이든 소나타를 통해 나는 음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바로 아래에 내가 그 날 K씨에게 보낸 카톡을 공유해 본다.
보이는가? 나의 이모티콘이?
나는 이 때부터 K씨를 내 영혼의 울림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음악인.
진정한 연주자.
능력있는 비즈니스인.
멀티플레이어 등등 내가 가져다 바칠 수 있는 온갖 좋은 표현을 통틀어서 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악은 영혼의 대화이다.
음악은 한계를 뛰어넘고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음악 비즈니스의 세계로 스스로의 한계를 넘고, 세상이 정해놓은 경계를 무너뜨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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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비즈니스.에세이 (27)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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