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는 2026년 6월부터 신입 수시채용 공고에서 '4년제 학사 학위 이상'이라는 자격 요건을 전면 삭제했습니다. 고졸도, 전문대졸도 4년제 졸업자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것도 설계 같은 핵심 R&D 직무에서, 수시채용으로는 이례적인 세 자릿수 규모로 뽑습니다.
뉴스만 보면 오히려 기회가 열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학력 안 본다니 좋긴 한데, 그래서 내가 붙을까?" 한 매체의 표현을 빌리면 "기대 속, 합격은 글쎄"였습니다.
이 온도차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학력 기준이 사라지는 건 채용이 관대해졌다는 신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학력 기준이 사라지고 있다
먼저 이게 SK하이닉스 한 곳의 실험이 아니라는 걸 봐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6개 이상의 주가 대다수 공무원직에서 학위 요건을 없앴습니다. 미국 인사관리협회(SHRM) 조사에 따르면 고용주의 28%가 최근 2년 사이 학위 요건을 공식적으로 완화했습니다. 링크드인이 자사 채용 데이터를 들여다본 결과, 유료 채용 계정을 쓰는 리크루터는 후보자를 학위보다 스킬로 검색하는 비율이 5배 높았습니다. 회계처럼 보수적이던 직군조차 학위 요건 없는 공고가 있는 공고보다 5.5배 빠르게 느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도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SK하이닉스의 학력 폐지는 그 흐름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일 뿐입니다.
최태원 회장은 "AI 시대의 능력은 학력과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미래 인재의 조건으로 꼽은 건 학위가 아니라 세 가지였습니다. 스스로 질문하고 본질을 파고드는 힘, 기술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힘, 다름을 이해하고 협업하는 힘.
학위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학력은 간접 지표다
왜 회사들은 그동안 학력을 봤을까요.
학력이 곧 실력이라고 믿기 때문도 일부 있겠지만, 다른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채용은 짧은 시간 안에 수백, 수천 명의 역량을 추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한 명 한 명의 실제 문제 해결력을 다 검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장은 빠르게 추정할 수 있는 간접 지표를 써 왔습니다. 그게 학벌, 연차, 직함입니다.
이건 역량 그 자체가 아닙니다. 역량을 압축해 놓은 파일에 가깝습니다. "이 학교를 나왔으니 이 정도는 하겠지", "7년차니까 이 정도는 다뤄봤겠지", "리드였으니 사람은 이끌어봤겠지." 세부 내용을 풀어보기 전까지는 압축 파일을 믿는 겁니다.
문제는 이 파일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기술이 바뀌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3~5년 전의 경력이 지금의 역량을 보장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AI 도구를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의 생산성 격차는 같은 연차 안에서도 크게 벌어집니다. 학벌이 좋아도 지금 시장이 원하는 문제를 못 푸는 사람이 있고, 학벌이 평범해도 정확히 그 문제를 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간접 지표의 예측력이 무너지면, 시장은 결국 원본을 요구합니다.
학력이 사라지고 들어오는 것
여기서 많이들 '학력이 사라졌으니 조금 더 수월해지겠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간접 지표가 빠진 자리에는 더 직접적인 측정이 들어옵니다.
SK하이닉스도 학력 요건만 지웠지, 평가를 지운 게 아닙니다. 서류 이후 7월에 SKCT와 AI 역량 검사를 봅니다. 학력이라는 1차 필터가 사라진 만큼, 직접 측정하는 도구가 그 자리를 메웁니다.
링크드인이 자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더 날카롭습니다. 공고에서 학위 요건이 사라지는 속도는 빠른데, 실제로 학위 없는 사람이 합격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느립니다. 선언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있는 겁니다.
이게 취준생들이 "합격은 글쎄"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학력 칸이 사라졌다는 건 "이제 아무나 붙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학력 뒤에 숨어서 평가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평가받는가가 바뀐 거지, 평가가 쉬워진 게 아닙니다.
같은 정책, 다른 결과
두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한 사람은 좋은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동안 서류는 늘 통과했습니다. 통과의 이유가 실력인지 학벌인지는 본인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학력이 사라지면, 그 사람은 자신을 통과시켜 주던 이유 하나를 잃습니다. 결국 든든한 방패 하나가 없어지는 꼴입니다.
다른 사람은 학벌 때문에 서류에서 번번이 걸러졌습니다. 실제로 문제는 잘 풀지만, 그걸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생깁니다.
이처럼 같은 정책이 두 사람에게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이건 '관대해진 채용'이 아니라 '재평가된 채용'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누군가에게는 보호막이 사라집니다.
그럼 무엇을 보는가?
학력 대신 회사는 무엇을 볼까요? 직군마다 쓰는 도구는 달라도, 보려는 것의 본질은 비슷합니다.
입사 후 성과를 잘 예측한다고 검증된 신호는 대체로 네 가지로 모입니다.
- 실제로 만들어낸 결과물 - 직무와 닮은 과제를 끝까지 해내는 능력. 개발자에게는 동작하는 코드, PM에게는 실제로 내린 의사결정과 그게 움직인 지표, 디자이너에게는 문제를 풀어낸 화면이 그 예시입니다.
- 문제를 푸는 과정 - 정답 자체보다, 막혔을 때 어떻게 접근하고 무엇을 의심하는지를 봅니다.
- 설명하는 힘 - 자기가 한 일을, 배경이 다른 사람에게 글과 말로 설명할 수 있는지. 직군을 불문하고 가장 과소평가되는 역량입니다.
- 배우는 속도 - 처음 보는 도구나 도메인 앞에서 얼마나 빨리 감을 잡는지를 봅니다.
그럼 위 신호를 어떻게 볼까요? 측정 방식이 바뀝니다.
이력서 한 줄을 그대로 믿어주지 않습니다. "○○ 능숙"이라고 쓰면, 그걸 뒷받침할 증거를 요구합니다. 개발자에게는 실무와 비슷한 과제처럼 직접 코드를 작성하는 문제, PM에게는 가상의 상황을 던지고 우선순위와 그 근거를 묻는 케이스 인터뷰, 디자이너에게는 포트폴리오를 펼쳐놓고 "왜 이 결정을 했는지"를 끝까지 캐묻는 리뷰.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결과물 뒤에 있는 사고 과정을 직접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한 글로벌 채용 동향 조사에서는 미국 고용주의 87%가 면접 단계에서, 65%가 서류 스크리닝 단계에서 이런 스킬 기반 평가를 쓴다고 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답은 100년 가까이 쌓인 채용 연구에 있습니다.
채용 심리학에는 각 평가 방식이 입사 후 성과를 얼마나 잘 예측하는지를 메타 분석으로 비교한 고전적 연구가 있습니다. 상관계수로 표시되고, 1에 가까울수록 정확합니다.
- 워크 샘플 테스트: 0.54
- 구조화 면접: 0.51
- 학력: 0.10
- 경력 연수: 0.07
학력의 예측력은 워크 샘플의 5분의 1 수준입니다. 결국 회사 입장에서 학력을 보지 않는 이유는, 예측력 낮은 지표를 버리고, 예측력 높은 지표로 갈아타는 합리적 선택인 셈입니다. 같은 면접도 두서없이 보면 적중률이 15~30%에 그치지만, 질문과 기준을 정해 구조화하면 최대 87%까지 올라간다는 후속 연구도 있습니다. 이는 구글이 자사 채용을 구조화 면접으로 바꾼 근거이기도 합니다.
결국 학력이 사라져서 평가는 오히려 더 촘촘하고 더 직접적으로 바뀝니다. 운 좋게 통과할 틈이 줄어드는 겁니다.
CMF 관점에서의 해석
CMF의 세 번째 축은 Capability, 역량입니다. 더 들어가면 "그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증거가 나에게 있는가"입니다.
증거. 이 단어가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시장은 직접적인 증거 대신 간접 지표를 많이 봤습니다. 학벌과 연차와 직함이 "이 사람은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대신해 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증거가 아니라 간접 지표를 관리하며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좋은 회사 이름, 높은 연차, 그럴듯한 직함 같은 것들이죠.
간접 지표의 시대가 저물고 증거의 시대가 오면, 질문이 바뀝니다.
"나는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풀어냈는가?" "나는 몇 년차인가"가 아니라 "그 연차 동안 무엇을 증명했는가?"
세 가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내 이력서에서 학력, 연차, 직함을 모두 가린다고 해 봅니다. 남는 줄에 시장이 살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없다면, 지금까지 무엇을 팔고 있었던 걸까요?
둘째, 나는 지금 간접 지표로 보호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간접 지표 때문에 배제당하고 있습니까? 답에 따라 이 변화는 위협이 되기도,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셋째, "나는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를 학벌이 아니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증거가 지금 내 손에 있습니까? 아니면 만들어야 합니까?
마무리
학벌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빈칸이 아닙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학력이 좋든 나쁘든 똑같이 던져집니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처음 열리는 기회의 문이고, 누군가에게는 처음 사라지는 안전한 방패입니다.
내 이력서에서 학력과 연차와 직함과 같은 타이틀을 모두 지운다면, 시장은 그래도 나를 사고 싶어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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