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으로 태어난다면
하고 싶은 일 딱 한 가지
그댈 사랑만 하고
바라지 않는 거야
그대를 좋아하기만 하고
사랑하기만 실컷 하고
바라지 않는 거야
보고 싶다 생각은 들어도
보고 싶다고 그대에게
말하지 않는 거야
그대 귀찮지 않게
내가 신으로 태어난다면
그대에게 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야
모 커뮤니티에 소일거리로 음악을 가끔 올렸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적 관심종자라서, 사람들이 모르면서 좋아할 만한 곡을 애써 골라 올리고 추천과 댓글을 퍽퍽한 일상의 낙으로 삼았다. 내가 뭘 올릴지 기대한다는 소수의 팬도 생겼다.
지금은 영화감독이기도 한 싱어송라이터 신승은의 <내가 신으로 태어난다면>을 올렸을 때, 그런 팬 중 한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이름의 이니셜이 M이었나 N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N이라고 치자. 아무튼 노래가 너무 좋다고 했다. 다음날에 그녀의 댓글이 또 달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들었는데 가사가 너무 좋단다.
N은 그 뒤로도 며칠에 걸쳐 댓글을 달았다. 결과적으로 좋다는 말이었다. 이 노래를 매일 듣고 있고, 신승은의 다른 음원을 전부 다운받아서 들었고, 다른 곡도 좋긴 하지만 이 노래만큼은 아니라고 했다. 발로 치는 수준의 기타로 이 곡을 직접 치면서 불러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지막 댓글에서 그녀는 말했다. “이 가사를 내 인생 모토로 삼고 싶네요.”
N은 이 노래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아니, 나도 좋아하는 노래이긴 하지만, 인생의 모토라니. 무슨 대단한 연주나 폭발적인 보컬이나 세련된 편곡이 있는 곡도 아닌데. 차라리 질그릇처럼 성기고 투박하기까지 한 노래인데. 어떻게 이 노래는 언어에 주술이 실린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강력하게 파고든 건지 궁금했다.
나중에 N을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대화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향, 연애 상담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사랑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상대의 사랑이 너무 큰데 자신은 늘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힘들다고,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보통은 반대 아니야?) N이 바라는 건 상대에게 모든 걸 내던지는 사랑이라고 했다. 영혼의 한 가닥마저 상대의 것이 되고 싶다고.
어쨌든, 그런 대답에서 그녀가 신승은의 노래에 꽂힌 이유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현되기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것도.
***
사랑이 뭐냐는 물음처럼 성가신 게 없다. 너무 고색창연해서 멸종한 줄 알았는데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물음이다. 그럴 때면 “사랑이 꼭 뭐여야 해요?”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모두 별개의 존재로 태어났다면, 사랑은 무엇을 부르는 이름일까. 그 답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천 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잔들 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사랑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는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행위는 일종의 간섭이자 침범이라고. 따지고 보면 사랑처럼 선제공격과 응전이라는 단순한 원리에 따르는 게 없다. 거기에 은밀한 전투와 한심한 승리, 지루한 소모전, 유서 깊은 동맹들 따위가 부가적으로 따를 뿐이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최소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랑이라면, 결국에는 타인의 영역에 대한 간섭 또는 침범이 된다. 하거나, 아니면 당하거나.
왜 굳이 ‘신’일까. 내가 아닌 타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신으로 태어난다면, 이라고 신승은은 거창하게 전제한 걸까.
사람은 자기 삶이 거쳐 온 표식을 무의식중에 달고 다닌다. 그것은 사랑을 하는, 다시 말해서 타인을 간섭하고 타인에게 침범 당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폭력적인 사람은 폭력적으로 사랑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 사랑한다. 약한 사람은 약하게 사랑하고, 비굴한 사람은 비굴하게 사랑한다.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위험하다. 상대를 간섭하고 침범하지 않으니 상대에게 줄 것도 받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그 자체가 모순의 형용, 네모난 동그라미와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이라도 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바람일 것이다.
<내가 신으로 태어난다면>을 다시 들어본다. 가만가만 따라 불러보니 뭔가 사무치게 처연하다. 참 슬프기도 한 노래다. 사랑만 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인간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인 강인함이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니까. 신으로 태어나야 할 수 있을 법한.
***
당신은 날 일반인으로 만듭니다
자유롭지도 않고 쩨쩨하고
회사에 가서 돈을 벌고 싶게 만듭니다
월급날에는 외식하고
하루 종일 문자하고 하루 종일 연락하고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친구들한테 푸념하고
꽃다발을 선물하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심지어 왜 그 사람 만나냐고 심술부리고 삐지고
당신은 날 일반인으로 만듭니다
전화를 못 받아 미안하다 말하고
구질구질한 연애를 하고 싶게 만듭니다
바람 피우면 큰일 날 것만 같은
집 앞까지 찾아가고 딱 오 분 보고 돌아오고
심지어 얼굴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당신은 날 일반인으로 만듭니다
지금 난 자유로운 영혼이 아닙니다
지금 난 고작 사랑이나 합니다
신승은의 다른 노래, <당신은 날 일반인으로 만듭니다>를 처음 듣고 조금 놀랐다. 공연을 할 때마다 관객들을 실신 직전으로 몰아가는 드립과 해학 안에 이런 솔직하고 섬세한 통찰이 있었구나 싶어서.
이 노래는 <내가 신으로 태어난다면>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말하자면 대구를 이루는 노래 같다. 주석이라고 해도 되겠다. 자신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정서나 감각이 일반인과 태생부터 다르다고 믿어온 예술적 자의식에 충만한 자들에게, 말하자면 스스로를 신처럼 에고 트립을 해온 예술종자들에게, 고작 사랑 따위 때문에 일반인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진다는 것은 생경한 기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랑 같은 비논리적이고 비생산적인 짓을, 리처드 파인만 스타일로 말하자면 인간이 얄팍하고도 애매하게 정해놓은 약속에 불과한 것을 굳이 하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이 세계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라는 걸 비참할 정도로 확인받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 진부하면서도 창조적인 거짓말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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