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작품은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다. 의도, 우연, 그리고 한계. 옛날 루시드 폴을 인터뷰했을 때 그가 들려준 이야기다. 여기서 특히 한계에 주목하게 된다. 능력의 한계, 여건의 한계, 시간의 한계 등등. 두 번째 요소인 우연도 한계의 영역과 교집합을 이룬다고 볼 때, 이는 꽤 복잡하고 심오한 이야기다.
<쇼잉 업>을 보고 루시드 폴의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른 이유가 뭘까. 이 채도 낮고 기승전결이 희박한 영화가 결국 ‘일상이라는 한계’를 가리키고 있어서가 아닐까. 주인공 리지는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예술가로서 자신의 성역 같은 작업 공간을 침범받는 것에 예민하고, 전시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을 드러내지만, 그런 과정 역시 일상이라는 평범한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일상을 완벽하게 통제할 길은 없고, 마감은 어쨌든 닥쳐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 막판 전시 오프닝 리셉션의 소소한 소동은 모든 것이 망쳐지는 난장판이 아닌 활기처럼 느껴진다. 비둘기가 날아간 뒤 리지의 표정에 떠오른 것은 홀가분함이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삶이든 예술이든 불완전한 조각 같은 세계를 빚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누군가의 대사가 암시하듯 무엇이든 자신의 손을 떠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시간이 온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처럼.
수십 번이나 한 이야기를 또 하자면, 평범하든 특별하든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있어도 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한계가 없다면 그 자리에서 번민할 뿐이다. 오지도 않을 신과 같은 판가름을 기다리면서. 영원히 처음을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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