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가는 뮤직바가 생겼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진짜로 음악을 사정없이 좋아하는 티가 나는 곳이라서 좋다. 얼마 전에는 내가 조규찬의 ‘어느 수집광의 편지(그림자를 판 소년에게)’를 신청했더니 바로 블랙스트릿의 ‘No Diggity’를 이어서 틀어주시는 센스와 내공에 감탄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곡이 있는 조규찬의 5집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너무 좋아하면 오히려 할 말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조규찬이 그렇다. 그의 앨범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해본 적이 지금껏 없는 것 같다.
조규찬의 5집은 1999년에 나왔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어느 수집광의 편지’는 사실상 ‘No Diggity’를 원맨 아카펠라로 리폼한 버전처럼 들린다. 전반적인 곡의 전개, 브릿지에 때려 넣는 피아노 샘플링까지 빼다 박았다. 문제는 이 앨범은 절반가량이 이렇다는 것이다. ‘포유류’를 듣다 보면 어느새 마이클 잭슨의 ‘Man In The Mirror’로 저항 없이 넘어간다. 조규찬을 좋아하는데 ‘포유류’는 몰랐다는 모 뮤지션은 내가 들려줬더니 극대노를 하더라. 어떻게 조성까지 그대로 갖다 쓸 수 있냐고. 상대적으로 과감하게 넘겨짚자면 ‘몽’은 스팅의 재지한 노래들이, ‘Moonlight Club’은 프린스가 팔세토 창법으로 부르는 간드러지는 알앤비 발라드가 살짝 겹쳐지는 식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찬스라이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5집은 꽤나 혼란스럽다. 그의 한계를 알 수 없는 보컬, 압도적인 재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제일 좋은 앨범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레퍼런스에 꺼림칙해지는 것이다. 예전에 조규찬에게 이 부분을 직접 물어본 적이 있는데, (내가 그때 질문이 서투르기도 했지만) 그는 퍽 불편한 기색이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뮤지션들에 애정을 그런 식으로 담으면 안 되냐는 뉘앙스로 답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정도라면 오마주라기에는 과하지 않나. 시카고의 오마주인 2021년작 ’Back To You’ 같은 곡과 비교하면 차이는 분명하다.
천리안 음악동호회 게시판에서 나를 뼛속까지 ‘찬빠’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영대 평론가도 예전에 이런 맥락의 리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는 높은 수준의 테크닉만을 자랑하는 5집의 방향성이 다분히 과시적이라고 비평했다. 나도 처음에는 과시라고 느꼈는데, 그런 의심의 나름 합리적인 증거로 이 앨범은 오토튠을 쓰지 않고 녹음했다. 어지간하면 튠을 배제하는 게 조규찬의 평소 방식이긴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크레디트에 박아놓은 앨범은 내 기억으로는 5집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후 조규찬에게 들은 이야기와 인터뷰 등등을 종합해보면서 그보다는 시니컬함에 가까웠을 거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가장 마음이 황폐했던 시기에 만든 앨범이라는 말도 들었다.(머릿곡인 ‘상어’에서 추측할 수 있다) 어쩌면 그 능력에 비해 유독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울화와 염증이 반영된 건 아니려나. ‘그래, 너희가 그렇게 빨아대는 외국 팝처럼 어디 나도 한번 만들어주마’라는 일종의 항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심증이라 일반화는 할 수 없다는 걸 밝혀둔다.
이후 조규찬의 개성과 스타일이 가장 팽팽한 텐션을 만들어낸 6집, 그의 최고 앨범이라고 생각하는 8집,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전혀 무뎌지지 않은 감각으로 뽑아낸 다량의 싱글을 보면, 이런 혼란도 결국 넘어야 할 강이었나 싶기도 하다. 통과의례라고 할까. 어떤 뮤지션을 이야기할 때 경력을 좀 더 긴 관점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너무 당연한 생각을, 새삼 다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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