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생각의 숲 김혜원입니다.
여름동안 작가들의 시놉시스와 원고 초안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는 '학교폭력'입니다. 지금까지 모인 원고의 상당수 역시 어떤 형태로든 따돌림과 소문과 무리의 압력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폭력은 우리가 뉴스 또는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보는 자극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작가들이, 또 대부분의 십 대들이 피부로 더 따갑게 느끼고 있는 학교폭력이란 한 방의 큰 사건이 아니에요. 작은 사건들의 합입니다.
같은 조가 된 아이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것. 익명 게시판에 초성 하나가 올라오는 것. 무리에서 한 발 물러난 날 아무도 부르지 않는 것. 이런 작고 일상적이고 그래서 어른 눈에는 잘 안 보이는 압력이 교실을 채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어제 교육부가 올해 첫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냈습니다. 초등 4학년부터 고3까지 319만 명이 답했어요. 피해를 당했다는 응답이 2.9퍼센트로 2013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았습니다. 그런데 가해했다는 응답은 0.8퍼센트로 오히려 줄었어요. 교육부는 같은 행위를 두고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의 인식이 벌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당한 사람은 늘고 한 사람은 줄었다는 건 폭력이 작아지고 흩어졌다는 뜻이에요. 우리 작가들이 쓰고 있는 바로 그 크기로요.
작은 사건들의 합
왜 이렇게 됐을까요. 요즘 아이들이 예민해서라는 말도 있고 영악해져서라는 말도 있고 선생님의 권위가 없어져서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것도 틀리진 않지만 어느 것도 답은 아닐 거예요. 이유는 복합적이고 어른들이 그 이유를 놓고 공방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숫자 몇 개만 더 보겠습니다. 작년 조사에서 피해가 일어난 장소 1위는 교실 안이었어요. 28.6퍼센트. 복도가 16.5퍼센트로 그다음입니다. 시간은 쉬는 시간이 29.6퍼센트 점심시간이 21.5퍼센트. 폭력은 수업 사이의 틈에서 어른이 없는 몇 분 동안 일어납니다. 그 몇 분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또래예요.

캐나다 연구진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125시간 녹화한 적이 있습니다(Hawkins·Pepler·Craig, 2001). 괴롭힘의 88퍼센트가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났어요. 그중 또래가 끼어든 경우는 19퍼센트였습니다. 나머지 81퍼센트는 지켜보고 있었어요. 학교폭력이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피해자와 가해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세 번째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의 숲 3강에서 작가들에게 갈등에는 세 층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눈에 보이는 싸움인 외적 갈등. 마음속 싸움인 내적 갈등. 그리고 규칙과 문화와의 충돌인 사회적 갈등. 세 번째 층의 질문은 이거예요. 왜 아무도 이 문제를 말하지 않지. 우리 작가들이 쓰는 이야기는 대부분 이 세 번째 층에서 벌어집니다.
방관자를 쓰는 아이들
이번 시즌 원고에서 제가 특히 눈여겨본 건 발화자의 시점이었습니다. 피해자를 쓴 작가도 가해자를 쓴 작가도 있지만 방관자의 눈으로 쓴 원고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한 작가(B작가라고 부를게요)는 5월의 이야기 설계 단계에서만 해도 주인공을 여섯 명으로 잡았습니다. 학교 안의 모든 갈등을 여섯 명의 눈으로 교차시키려고 했어요. 한 달 뒤 시놉시스에서 여섯은 한 명이 됐고 그 한 명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었습니다. 유일한 주인공으로 남은 건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졸업하는 게 목표인 아이입니다. 작년에 한 번 당한 적이 있어서 올해는 일부러 등수를 올리지 않는 아이. 그 아이가 전학 온 전교 1등과 같은 조가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흥미진진한 전개입니다.
B작가의 원고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장소는 급식실입니다. 괴롭히는 아이가 지나가고 남은 아이들이 전부 식판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자기한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저는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어요. 어떤 공기인지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그 공기를 아는 어른이 저만은 아닐 거예요.
아마 요즘 아이들 대부분은 한 번쯤 방관자가 됩니다. 어제 날짜의 교육부 조사에서는 학교폭력을 목격한 학생 중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31퍼센트였어요. 위로하거나 도와줬다는 응답 33.1퍼센트와 거의 같습니다. 학년이 오를수록 커져요. 초등 26.6퍼센트 중학 35.5퍼센트 고등 36.1퍼센트. 푸른나무재단이 따로 한 조사에서는 목격 후 가만히 있었다는 응답이 54.6퍼센트였고 이유 1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습니다.
방관자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쓰는 사람이 많다면, 그들 역시 그 숫자 안에 있던 경험이 있었겠지요. 이 글들은 어떤 불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고 다음에도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불안이요.

사회보다 더 닫힌 곳에서 현명함을 실험하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존 듀이였는데요, 원문은 축소판이 아니라 배아였습니다. 《학교와 사회》(1899)에서 학교는 "축소된 공동체, 배아 상태의 사회"가 될 기회를 얻는다고 썼습니다. 사회가 될 씨앗이라는 뜻이지 사회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학교는 사회의 씨앗이라기보다 사회보다 더 폐쇄적인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회에서는 관계가 망가지면 떠날 수 있습니다. 교실은 배정되고 1년 동안 같은 서른 명과 하루 여덟 시간을 보냅니다. 사회에는 위아래가 있어서 나이가 다른 사람 사이로 빠져나갈 틈이 있지만 교실은 전부 같은 나이라 서열이 수평 안에서 만들어져요. 그리고 사회는 여러 잣대로 사람을 보지만 교실은 성적 아니면 인기라는 한두 가지 잣대로 모든 관계를 줄 세웁니다.
일본 사회학자 나이토 아사오는 《이지메의 구조》에서 이걸 군생질서라고 불렀습니다. 아무 인연 없는 또래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방에 묶어 두면 그 안에서 바깥 사회의 규칙과는 다른 질서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 질서에 맞추면 분위기 파악 잘한다는 말을 듣고 맞추지 않으면 튀는 아이가 됩니다.
《교실 카스트》를 쓴 스즈키 쇼는 교실 안 서열을 카스트에 빗대면서 더 아픈 지적을 했어요. 교사들이 그 서열을 권력이 아니라 능력으로 보고 학급 운영에 활용한다고요.
이런 곳에서 아이들은 계산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서면 다음 표적이 될까. 기록에 남을까. 등급에 손해가 날까. 작년 조사 뒤에 한 교사가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학생들이 불이익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아예 외면하는 게 현명한 대처가 되고 있다고요.
푸른나무재단 조사에서는 피해 학생이 도움을 청한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응답이 33퍼센트였습니다. 몇 년 사이 수치는 세 배가 됐어요.
아이들은 이 구조 안에서 현명함이 무엇인지 실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실험의 답을 어른이 가르치고 있어요. 그게 지금 학교의 한 단면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다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지금의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듣는 환경에서, 예전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괴롭습니다.
영국 연구진이 12세에서 16세 2천여 명을 조사했더니 괴롭힘을 목격한 경험은 직접 당하거나 가한 경험과 별개로 정신건강 위험을 높였습니다(Rivers 외, 2009). 방관자도 다쳐요. 미국 심리학자들은 이 괴로움의 구조를 다원적 무지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아이가 속으로는 괴롭힘을 반대하면서 옆 아이의 침묵을 보고 남들은 찬성한다고 믿는 상태예요. 그래서 자기도 침묵하고 그 침묵이 또 다른 아이에게 같은 신호가 됩니다. 급식실에서 식판을 내려다보던 아이들이 전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B작가 원고에는 이보다 더 서늘한 순간이 하나 있습니다. 작년에 당했던 서술자가 어느 날 피해 학생을 보며 이렇게 생각해요. 저 아이가 조금만 양보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피해자였던 아이가 가해의 논리를 자기 안에 들여놓는 순간을 정확히 적은 문장이었어요. 저는 심장이 내려앉았습니다. 줄 세우는 교실에서 오래 살면 줄 자체를 의심하는 대신 줄에서 튀어나온 사람을 탓하게 된다는 걸 이 작가는 담담하게 쓰고 있었습니다.
줄 세우기가 만드는 건 경쟁만이 아니었어요. 침묵도 만듭니다. 그다음에 이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는 작가의 몫이라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너무 어둡게만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계산과 괴로움은 아이가 커 가면서 한 번은 지나는 통과의례이기도 해요. 어른인 우리도 지나왔고 그때 무엇을 배웠는지 지금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겪었는가보다 그 경험을 어떻게 소화해서 삶에 반영했는가가 남는 법이지요. 다만 문제는 그 통과의례를 아이 혼자 지나게 두는 것이고 그 안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것입니다.
맞서는 것과 증언하는 것
옳고 그름을 가리고 실천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건 흔들리지 않아요.
아까 그 캐나다 연구에는 뒷부분이 있습니다. 또래가 끼어든 19퍼센트의 경우 중 57퍼센트에서 괴롭힘이 10초 안에 멈췄어요. 핀란드는 이 사실 위에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통째로 세웠습니다. 가해자를 바꾸는 게 아니라 옆에서 보는 아이들을 바꾸는 프로그램이에요. 78개 학교 8천 명을 나눠 실험했더니 피해 경험이 3분의 1가량 줄었다고 합니다(Kärnä 외, 2011). 맞서는 일에는 힘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큰 힘이.
다만 맞서 싸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아닙니다.
조사표에는 목격자의 선택지가 둘뿐이에요. 말렸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거나.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증언하는 것. 아는 것.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보고 기억하고 말하는 것.
방관자는 곁에서 본 사람이고 목격자는 눈으로 친 사람이고 증인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실태조사는 셋을 전부 목격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작가들이 쓰고 있는 건 이 세 단어의 차이예요. B작가의 서술자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쓰고 있는 작가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소설 속 서술자가 아직 하지 못한 일을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침묵의 양은 보통 어른이 셉니다. 통계를 내고 알기 위해서죠. 이를테면 31퍼센트 같은 숫자입니다. 침묵의 내용은 그 안에 있던 아이만 알아요. 그걸 쓰는 순간 방관자는 증인이 됩니다.
방관자를 1인칭으로 정직하게 쓰려면 자기 안에서 그 생각을, 문장을 꺼내야 합니다. 저 아이가 양보했으면 됐을 일이라는 생각을 서술자에게 시키려면 작가가 그 생각을 한 번은 해 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글을 쓰면서 마주치는 건 나도 그 계산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종이에 적는 순간 그 계산은 학교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됩니다. 자기 것이 된 생각만 바꿀 수 있어요. 저는 그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5호에서 줄 세우기에 반응하는 세 번째 방법을 서술이라고 했는데요, 침묵에 반응하는 방법도 셋입니다. 학교는 아이가 나가는 걸 막을 수 있어요. 쓰는 건 못 막습니다. 구조를 바꾸는 건 어른의 몫이고 그동안 아이가 넓혀나갈 수 있는 출구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 대들이 쓰는 글을 읽는 어른들이 꼭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이 어린 작가들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요.
그리고 그런 글을 계속 보는 저는 아무래도 먼저 쓰인 미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만 이 마음을 곱씹게 됩니다.
십 대 작가들의 글을 가장 먼저 읽는 건 저에게도 정말 특별한 경험입니다. (이 글을 빌어 작가님들에게 전해요, 고맙습니다. 모두 잘 하고 있어요!)

아이가 학교 이야기를 할 때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건 세 번째 질문입니다.
아이가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보통 첫 번째 층만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 누가 그랬어. 가끔 두 번째 층까지 갑니다. 너는 어땠어. 그런데 세 번째 층은 거의 묻지 않아요.
그때 다른 애들은 뭐 했어. 모두들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질문은 방관을 잡아내고 탓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아이가 침묵의 내용을 말할 수 있는 첫 자리를 만드는 질문이에요. 31퍼센트의 아이들 대부분은 그 질문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면 아이는 목격자로 대답하고 다른 애들은 뭐 했냐고 물으면 그제야 나도 가만히 있었다는 말이 나와요. 그제서야 대화가 시작됩니다. 혼내는 대화가 아니라 왜 고개를 숙였는지 그 계산을 같이 들여다보는 대화입니다.
서울의 한 중학교 416명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방관자가 되는지 편드는 사람이 되는지를 가르는 요인 중에 어른과의 관계가 있었어요. 교사와 관계가 좋은 아이 그리고 나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적은 아이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아이 옆에 있는 어른이 변수였고요. 집에서 한 번 소리 내어 말해 본 침묵은 이미 침묵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교실에서 두 번째로 말할 수 있어요.
침묵에 반응하는 세 가지
- 방관 — 곁에서 본다. 조사표의 31퍼센트
- 개입 — 말린다. 끼어들면 절반 넘게 10초 안에 멈춘다
- 증언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말한다. 우리 작가들이 하고 있는 일
함께 읽기 — 오늘 나온 책들
《이지메의 구조》 나이토 아사오 지음, 고지연 옮김, 한얼미디어 (2013) — 학교라는 닫힌 방이 어떻게 자기만의 질서를 만드는지.
《교실 카스트》 스즈키 쇼·혼다 유키 지음, 김희박 옮김, 베이직북스 (2013, 절판·도서관 소장) — 교실 안 인기 서열이 왜 고정되는지, 교사가 그것을 어떻게 묵인하는지.
《학교와 사회》 존 듀이 지음, 송도선 옮김, 교육과학사 (원작 1899 · 한국어판 2판 2022) —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의 원문. 축소판이 아니라 배아라는 말.
작가들이 갈등의 세 층위를 적는 종이가 있습니다. 플롯 보드라고 불러요. 다음 호부터 생각의 숲 작가들이 실제로 쓰는 템플릿을 하나씩 열어 드리려고 합니다. 생각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함께 해볼까요?
오늘 심을 한 가지 생각
이번 주에 아이에게 이렇게 물어봐 주세요.
"요즘 너희 반에서 다들 알면서 아무도 말 안 하는 게 뭐야?"
그 대답이 아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다음 주에는 생각의 숲 또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게요. 시놉시스에 적었던 사건이 초고에서 완전히 다른 사건으로 바뀐 이야기예요. 계획은 왜 배신당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생각의 숲에서,
김혜원 드림.
생각의 숲 다음 기수 소식이 궁금하시다면, 홈페이지를 둘려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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