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생각의 숲 김혜원입니다.
소설가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지 R. R. 마틴이 한 말이에요.
'건축가'는 첫 못을 박기 전에 설계도를 그리고 '정원사'는 씨를 심고 무엇이 나오는지 본다고요. 마틴 자신은 정원사 쪽이라고 했습니다. 소설가 E. L. 닥터로도 비슷한 말을 남겼어요. 소설 쓰기는 밤에 운전하는 것과 같아서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만큼만 보이지만 그렇게 끝까지 갈 수 있다고요.
정원사의 말은 늘 이렇게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숲에서 저는 작가들에게 건축가 쪽을 권해요. 정원사가 틀려서가 아닙니다. 처음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설계도가 있는 편이 훨씬 멀리 간다는 걸 이번 여름에 눈으로 봤기 때문이에요.
지난주 여덟 편 중 결말까지 쓴 초고가 두 편 도착했습니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요. 오늘은 이야기 전체를 보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 뉴스레터 하단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시놉시스 탬플릿이 있습니다.
시놉시스라는 설계도
생각의 숲에서는 쓰기를 위한 기본 강의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그 중 5강은 시놉시스예요. 1강부터 4강까지 배운 메시지와 인물과 플롯과 배경을 한 장에 묶는 시간입니다.
시놉시스는 글의 소개가 아닙니다. 소개는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글이고 시놉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드러내는 글이에요. 그래서 결말도 써야 합니다. 즉 시놉시스는 독자용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위한 설명서입니다. 나중에는 출판사에 이야기를 제안하는 문서가 되기도 하고요. 400자에서 600자 안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말이 되게 흘러가는지 어디에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까지 보여야 합니다. 막막한 작가들에게는 세 단락 공식을 줍니다.
첫 단락은 설정과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 주인공이 누구이고 어떤 세계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무슨 일이 생기는가
둘째 단락은 전개와 중간점과 위기. 주인공이 무엇을 하려 하고 무엇이 막고 어디서 상황이 뒤집혀 최악의 순간에 이르는가
셋째 단락은 절정과 결말.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무엇을 만들고 처음과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흐름은 창의적이진 않지만 가장 안전한 공식입니다. 이걸 왜 먼저 쓰게 할까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 확인하려고
쓰다가 방향을 잃었을 때 돌아올 지도로
그리고 합평 때 서로의 전체 구조를 빠르게 나누려고
그중 첫 번째가 제일 커요. 700자 안에서 이야기를 한 번 끝까지 펼쳐 보는 것. 그게 시놉시스입니다.

체크리스트에서 비어있던 두 칸
시놉시스 템플릿 맨 아래에는 자가 점검 일곱 칸이 있어요. 다음과 같은 질문들입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한가?
원하는 것이 있는가?
방해가 있는가?
행동하고 선택하는가?
중간에 전환점이 있는가?
처음과 달라졌는가?
결말이 명확한가?
이 단계에서 글이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놉시스 역시 초안이고 집필하면서 바뀌는 게 당연하니까요. 다섯 개 이상이면 제출해도 된다고 말해 줍니다.
그중 한 작가(C작가라고 부를게요)의 7월 시놉시스는 다섯 칸에 표시가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두 칸이 전환점과 결말이었어요.
8월 말 초고에서 정확히 그 두 칸이 바뀌었습니다. 시놉시스에서 주인공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사건은 온라인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었어요. 초고에서 그 사건은 무대 위로 옮겨 갔습니다.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일로요. 결말도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책에서 만나시면 좋겠어요.

왜 무대였을까요. 온라인에서 다친 아이는 무대에서 회복할 수 없어요. 상처가 난 자리와 일어서는 자리가 다르면 결말이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C작가는 사건을 무대로 옮기면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같은 자리에 놓았고 그러자 비어 있던 전환점 칸이 저절로 채워졌어요. 시놉시스를 쓸 때는 몰랐고 초고를 쓰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빈 칸이 어디인지 알았기 때문에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어요. 계획표의 빈 칸은 이야기의 약한 자리입니다.
설계도는 감정을 가두지 않습니다
구조를 먼저 잡으라고 하면 대개 마음속에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자유롭게 못 쓰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저는 반대라고 생각해요. 설계도는 감정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감정을 풀어놓기 위한 조건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처음 소설을 쓰는 사람은 한 문장을 쓰는 동안 여러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해요. 이 장면이 어디로 가는지. 이 인물이 왜 이러는지. 이 문장이 좋은지. 이 셋을 한꺼번에 머리에 올려놓으면 대부분은 셋 다 흔들립니다. 심리학자 로널드 켈로그가 1988년에 이걸 실험했어요. 글을 쓰기 전에 개요를 잡은 사람과 바로 쓴 사람을 비교했더니 개요를 잡은 쪽이 더 빨리 쓰지는 않았지만 완성한 글의 질이 높았습니다. 이유는 개요가 머리의 부담을 덜어 줘서 쓰는 동안 문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요.
5강에서 작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논리적인 뼈대를 만드는 과정을 건너뛰지 말라고요. 학업과 쓰기를 병행하는 작가들에게는 이게 오히려 지름길입니다. 시놉시스가 확정되면 그다음엔 직감과 감정에 충실하게 써 내려갈 수 있어요. 순서가 중요해요. 구조를 먼저 세워 두면 쓰는 동안 구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 비로소 감정이 문장으로 나와요.
이번 여름에 제가 읽은 원고들에서 그걸 봤습니다. 시놉시스를 결말까지 쓴 작가들은 8월에 원고도 결말 근처까지 갔어요. 시놉시스를 첫 단락에서 멈춘 작가는 8월 초안도 첫 번째 고비 앞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설계도가 없어서 재능이 모자란 게 아니에요. 재능이 갈 길을 모르면 첫 번째 막힌 자리에서 속도가 느려지는 겁니다. 저는 앞으로의 기수에서도 이 방식을 계속 밀고 나가볼 생각입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 쉽게, 더 깊은 곳에서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저의 역할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설계도를 그린 작가일수록 설계도를 잘 배신해요.

C작가가 그랬습니다. 시놉시스에 온라인 사진이라고 써 놓았기 때문에 그게 안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계획이 없었다면 안 맞는다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그냥 막혔겠지요. 계획이 있는 사람은 막힌 자리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압니다. 계획이 없는 사람은 막힌 자리에서 표류해요. 둘 다 바뀌지만 하나는 수정이고 하나는 표류입니다.
계획은 배신당하라고 있습니다.
쓰기 전에 알 수 있는 건 이 이야기가 말이 되는가까지예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가는 오직 쓰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시놉시스는 그 배신을 미리 허락해 두는 문서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배신하기 위해 계획을 합니다.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않고 빈 칸 두 개를 남긴 채 제출하게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정원사 마틴도 닥터로도 결국 끝까지 갔습니다. 다만 그들은 소설을 수십 년 써 온 사람들이에요. 반대편에는 롤링이 있습니다. 《해리 포터》를 쓰면서 장마다 어느 인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표로 그려 두고 썼어요. 헤드라이트만 보고 밤길을 가려면 그 길을 여러 번 가 봤어야 합니다. 처음 가는 길이라면 롤링처럼 지도를 들고 가는 게 맞다고 처음 쓰는 작가들에게 꼭 말하고 싶어요.

아이의 계획이 바뀔 때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건 이 문장 하나입니다. 계획은 약속이 아니라 확인용이다.
아이가 세운 계획이 바뀌면 우리는 먼저 이유를 묻습니다. 왜 바꿨어?라고요. 그 질문에는 계획이 약속이었다는 전제가 들어 있어요. 약속을 어긴 사람에게 하는 질문이지요. 그런데 아이의 계획 대부분은 C작가의 시놉시스와 같습니다. 계획은 약속이 아니에요. 이게 말이 되는지 살펴보는 자료일 뿐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왜 바꿨어? 대신 뭐가 안 맞았어?라고요. 앞의 질문은 아이를 변명하게 만들고 뒤의 질문은 아이가 발견한 것을 말하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바꾸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자기 생각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해보기 — 아이가 이번 학기 계획을 바꿨다면 한 번만 이렇게 물어봐 주세요. "뭐가 안 맞았어?"
시놉시스 세 단락 공식
- 설정 +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 — 누가 어떤 세계에 살다가 어느 날 무슨 일을 겪는가
- 전개 + 중간점 + 위기 — 무엇을 하려 하고 무엇이 막고 어디서 뒤집혀 최악에 이르는가
- 절정 + 결말 —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무엇을 만들고 처음과 어떻게 달라졌는가
400~600자 · 현재형 · 감정 대신 행동 · 결말까지. 일곱 칸 중 다섯 개면 제출.
함께 읽기 — 오늘의 두 권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민음인 (원작 1997 · 개정 한국어판 2024) — 구조를 먼저 세우는 쪽의 교과서. 두껍지만 3장까지만 읽어도 됩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1》 파리 리뷰 인터뷰, 김진아·권승혁 옮김, 다른 — 닥터로의 헤드라이트 이야기가 실린 권. 정원사들의 말을 들어 보고 싶다면.
시놉시스 탬플릿
지난주에 약속드린 템플릿을 오늘부터 하나씩 열어 드립니다. 첫 번째는 C작가가 빈 칸 두 개를 남긴 채 제출했던 것과 같은 형식입니다. 세 단락 공식과 일곱 칸 체크가 들어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면 내 구글 문서에 사본이 생겨요. 아이와 같이 채워 보셔도 좋고 부모님의 올해 계획을 넣어 보셔도 좋습니다.
시놉시스 템플릿 내 사본 만들기: https://docs.google.com/document/d/1_3SsHND2a35UQ6ENPVtMZY62-3jX2vJwciuqPNpv2Cg/copy
다음 주에는 이야기 한복판에서 주인공을 바꾼 작가를 만납니다. 다음 주에는 무엇을 해도 형이 더 잘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를 만납니다. 주인공의 심장이 되는 주인공의 결함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생각의 숲에서,
김혜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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