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생각의 숲 김혜원입니다.
오늘부터 한 달에 한 번 숲길 편지를 보냅니다. 그달의 교육과 글쓰기 뉴스 가운데 부모가 알아 둘 흐름 하나를 골라 깊이 읽는 코너입니다. 첫 주제는 올해 세계 문학계를 연달아 흔든 질문입니다.
"이 글은 누가 썼는가"
국내 언론에는 대부분 짧게만 소개된 소식들이라 이 편지에서 한 번에 정리해 드립니다.
올해 2월 카이로 국제도서전에서 팔린 소설 몇 종에는 이상한 문장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줄거리와 인물을 만들어 달라고 챗봇에게 지시한 명령문이 검수 없이 본문에 그대로 실린 것입니다. 기계가 쓴 책이 서점 매대에 오른 첫 사례였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더 심각한 일이 시작됐습니다. 사람이 쓴 글이 기계의 의심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학상은 더 이상 저자를 보증하지 못한다
올해 AI가 쓴 글일가? 를 두고 일어난 큼직한 사건들을 표로 정리했습니다.
| 때 | 어디서 | 무슨 일이 있었나요? |
|---|---|---|
| 2월 | 카이로 국제도서전 | 챗봇 명령문이 그대로 인쇄된 'AI 소설' 유통, 아랍 출판계 공개 반발 |
| 5~9월 | 커먼웰스 단편소설상 | 수상작에 AI 의혹 제기, 탐지기 '100% AI' 판정. 재단은 기계 아닌 사람의 한 달 재심으로 전원 수상 유지, 문예지 그란타는 10년 협력 중단 |
| 7~8월 | 미국·영국 출판가 | AI 의혹만으로 수백만 달러 계약 연쇄 취소 |
| 9월 25일 | 프랑스 공쿠르상 | Fnac 소설상 수상작가, AI·표절 의혹으로 1차 후보에서 제외 |
| 9월 29일 | 한국 출판계 | "AI는 도구, 저자는 사람" 첫 공동 원칙. AI 사용 정도를 1~3단계로 책에 표시 권장 |
위의 사건표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하나의 연쇄가 보입니다. 2월 카이로에서 기계가 쓴 책이 유통됐고 5월 커먼웰스상에서는 사람이 쓴 글이 기계의 의심을 받았습니다. 여름에는 '의혹만으로' 수백만 달러 계약이 취소됐고 9월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 수상작가를 후보에서 지웠습니다. 같은 달 한국 출판계는 처음으로 공동 원칙을 내놓았습니다. 글의 가치를 지탱해 온 전제, 이 글 뒤에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올해 다섯 번 흔들린 셈입니다.
믿음이 무너진 곳에서 세계가 가장 먼저 꺼내 든 해법은 기계 판정, 곧 AI 탐지기였습니다. 그 해법은 유효했을까요?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탐지기를 가장 먼저 포기한 곳은 탐지기를 만든 회사였다
커먼웰스상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트리니다드토바고 작가 자미르 나지르의 수상작 '수풀 속의 뱀'에 한 AI 전문가가 탐지기를 돌렸고 판정은 100% AI였습니다. 그러나 재단은 기계 대신 사람을 택했습니다. 한 달에 걸쳐 작가와 대화하고 글이 만들어진 경위를 확인한 뒤 내린 결론은 정반대였습니다. 전원 수상 유지.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현지 보도에 따르면 이 작가는 병 때문에 책상에 오래 앉지 못해 음성인식으로 글을 써 왔습니다. 기계가 읽지 못한 사정이었습니다.
탐지기의 성적은 이미 여러 연구와 기관이 기록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아쉽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 누가 | 무엇을 확인했나 |
|---|---|
| 스탠퍼드 연구진(2023) | 비원어민의 토플 에세이를 탐지기 7종에 통과시키자 평균 61.3%가 'AI 작성' 오판정. 원어민 에세이는 거의 전부 정상 판정 |
| 국제 피부과 학술지 실험(2025) | 사람이 쓴 논문을 챗GPT로 문장만 다듬자 75~85%가 'AI 작성' 판정 |
| 밴더빌트대(2023) | 오탐률 1%짜리 탐지기도 교내 7만 5천 건 기준 한 해 약 750명의 억울한 학생을 만든다는 계산 끝에 탐지 기능 중단 |
| 오픈AI(2023) | 챗GPT 개발사가 직접 만든 탐지기를 정확도가 낮다는 이유로 반년 만에 폐기 |
숫자를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스탠퍼드 연구진의 결론은 탐지기가 '낯선 문체'를 AI로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의 글은 열 편 중 여섯 편이 기계 작성으로 오판정됐고 사람이 쓴 논문도 챗GPT로 문장만 다듬으면 열 편 중 여덟 편이 같은 판정을 받았습니다. 밴더빌트대는 업계가 내세우는 오탐률 1%조차 자기 학교 규모에서는 한 해 750명의 억울한 학생을 뜻한다는 계산 끝에 탐지 기능을 껐습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도 자사 탐지기를 반년 만에 내렸습니다. 도구를 만든 쪽과 쓰던 쪽이 차례로 손을 뗀 것입니다.
동시에 피해의 분포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올해 계약이 취소된 두 작가는 모두 흑인이었고 두 사람 다 흑인 작가가 유독 검증대에 오른다고 강하게 항변했습니다. 유독 비원어민이, 음성인식으로 쓰는 장애 작가가 의심을 받게 된다는 이 사실은 AI가 쓴 글을 탐지하는 '기준'에 대한 의문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 보면 탐지기는 평균에서 벗어난 문체를 의심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평균보다 매끄러운 문장 역시 평균에서 벗어난 문체입니다. 잘 쓰는 사람의 글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탐지가 분별의 답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무엇으로 가려낼 것인가에서, 무엇이 저자를 증명하는가로
완성된 글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올해 이 사태를 수습한 두 곳이 같은 답에 도착했습니다.
커먼웰스재단은 탐지기 없이 사람의 재심을 택했습니다. 작가와 대화하고 글이 만들어진 경위를 확인했습니다. 한국 출판계가 9월 말 내놓은 원칙도 기준이 같습니다. 1단계부터 3단계를 가르는 것은 AI를 썼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디까지 검증하고 책임지는가입니다. AI로 교정만 봤다면 인간 저작물이고 AI가 만든 것을 검증 없이 내보냈다면 3단계입니다. 두 기관 모두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봤습니다.
완성된 글만으로는 이제 누구도 저자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은 다릅니다. 처음의 질문, 버린 초고, 고친 이유, 합평에서 받은 말과 그다음 버전. 이 기록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이 기준에 동의하시나요?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합니다.
생각의 숲에서 작가들이 여덟 달 동안 쌓는 것이 바로 이 기록이거든요. 이번 겨울 2기의 책이 나올 때 사람이 썼다는 증명은 완성 원고가 아니라 그 여덟 달이 할 것입니다.

출판계로 먼저 도착한 이 기준은 출판계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기준은 필연적으로 서술형 평가의 확대와 함께 교실로 내려옵니다. 그게 우리가 이 추이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음 차례는 교실이다
서술형과 논술형 평가가 늘수록 교사는 학생의 글 앞에서 출판계와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글은 누가 썼는가.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그 질문에 탐지기는 답하지 못합니다. 답은 글이 만들어진 기록에 있습니다.
기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글이 만들어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기는 세 가지면 충분합니다.
글쓰기 과정이 남기는 세 가지
- 고치기 전 초고 — 버리지 않고 날짜를 붙여 저장해 둔 이전 버전
- 시작 메모 — 쓰기 전에 '무엇이 궁금해서 쓰는지' 적어 둔 세 줄
- 고친 이유 — 다 쓴 뒤 '어디를 왜 바꿨는지' 남긴 한 줄
이 기록은 의심을 막는 안전장치이기 전에, 아이의 생각이 자라는 경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장의 과정을 충분히 남겨두고 있나요?
함께 읽기 — 지난 편지 두 통
질문을 설정으로 바꾸는 법 — 과정의 첫 단추인 '질문 세우기'를 다뤘습니다. AI가 줄 수 없는 바로 그것입니다. 학교 밖에서 학교를 보는 방법 — 한 작가의 질문이 여덟 달에 걸쳐 소설이 된 과정의 실례입니다.
오늘 심을 한 가지 생각
아이가 최근에 쓴 글 한 편을 두고 물어봐 주세요.
이거 쓰기 전에 뭐가 제일 궁금했어?
그 답이 곧 그 글의 저자 증명입니다. 어떤 답이 돌아왔는지 답장으로 들려주세요.
다음 주에는 생각의 숲의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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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가 다룬 보도와 연구:
카이로 도서전(OECD.AI) · 커먼웰스상(Book Riot) · 출판 계약 취소(CS모니터) · 공쿠르(RTBF) · 한국 출판계 원칙(경향신문) · 스탠퍼드 연구(Liang et al.)
생각의 숲에서,
김혜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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