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글을 써야 되겠어

비와 관련된 어떤 추억

2021.03.05 | 조회 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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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비와 관련된 어떤 추억

"난 글을 써야 되겠어”

“누가 널 더러 글 쓰지 말랬어?”

“그러니까 난 내 글을 써야겠다고!”

“글 쓰라고, 언제든 써 누가 뭐래?”

“그런데 널 보면 더 이상 슬프지 않아"

"갑자기 뭔 소리야?”

“난 글을 써야 되겠어. 네 옆에 내가 없으면 좋겠어, 난 슬퍼야 한다고! 날 버려줘 내 팽겨 처 달란 말이야”

“넌, 마지막까지 참 잔인한 말만 하는구나"

그녀는 의자 한 쪽에 놓인 회백색 가방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그동안에 쌓인 모든 울분을 비워버리듯이……

그녀와 내가 만나던 곳은 늘 광화문 교보문고 에세이 코너였다. 그 누가 먼저 도착하든, 우리는 매대 앞에 서서 책을 읽으며 상대방을 기다렸다. 소설과 수필을 좋아한다던 그녀는 작은 가방 안에 피천득의 수필집이나 이상문학상 수상집 그리고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넣고 다니곤 했다.

“그렇게 몇 권씩 넣고 다니면 어깨 아프지 않아?”라고 내가 물어보면 그녀는 언제나 같은 말로 웃으며……

“가벼운 내 머리가 더 부끄러울 뿐이야”라고 대답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였다.

우린 책을 좋아했고 간절하게 공상에 빠졌으며 책에 관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무엇보다 원했다. 책 한 권을 정해놓으면 완독할 때까지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이야기를 나눌 때면, 주인공과 작가에 관하여 그 누구보다 열띤 토론을 나누는 긴밀한 사이기도 했다.

“하루키는 말이야. 번역자에 따라서 조금 맛이 다르긴 한데 유쾌하면서도 위트가 뛰어난 것 같아”라고 그녀가 말하면,

“맞아, 먼 북소리에서 그런 기운이 특히 두드러졌던 것 같아. 시작부터 조르지오와 카를로의 비유라니, 아무도 자신의 지친 구석과 냉소함을 그렇게 유쾌하게 표현해낼 수는 없을 거야. 난 그런 하루키가 스스로를 멋쩍게 여기면서도 읽는 사람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만드는 분위기. 그 자체가 너무 좋아”라고 내가 대답하곤 했다.

우린 이렇게 작정하고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작가에 관한 이야기로 그러다 글에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며 작정하고 밤을 새우다 잠들곤 했다.

어느 날, “내 글을 한 번 써볼까?” 내가 물으면 그녀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데?”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그 ‘어떤’이라는 부분에서 늘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글쎄, 어떤 글을 써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쓰는 일이 직업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어”

“세상이 바뀐다는 건 뭘까? 우린 언제나 세상의 기준인 셈이니, 이미 세상은 바뀌는 중이 아닐까. 네가 오늘 어제와 다른 것처럼 우린 세상에 어울리기 위해 애써 바꾸려고, 모순적인 얼굴을 세상에 억지로 보여주며 사는 건 아닐까? 지금 이 모습이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 같은 거라고 착각하며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글 쓰는 일이 직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직업이 된다면 나는 세상을 바꿔 놓을 만큼, 어쩌면 내가 실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 물의를 빚은 거라는 어떤 결과 침묵하는 것이나, 인정하는 것이 되려나, 글을 쓴다는 것은…… 이 말은 내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뜻이었다. 가난한 복학생에게 글 쓰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것이라, 책 살 돈이 없어서 대형서점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는 사람에게 글 쓰는 일이 직업이라, 내가 취업하는 날만 기다리는 가족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글을 쓴다면, 그것도 직업으로 글이 목적 그 자체가 된다면?

“신춘문예에 몇 번 도전을 하려다 말았어. 소설을 몰래 쓰기도 했고 시도 써봤어. 밤에 혼자 일기를 쓰다 나도 모르게 시를 쓰게 되더라. 그런데 써놓고 보면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로만 가득 찬 문장들 뿐이었어. 나는 그 문장들을 목구멍 깊은 곳에서 억지로 게워놓고 그 눈치 없는 녀석들의 가지런함들을 애써 교정하려 했지, 하지만 그 교정 작업이란 것이 막바지에 이를 때마다, 불투명한 미래만 더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어. 그러니까 그 일이란 것은 내 미래를 완벽하게 무효하게 만드는 일일뿐이었던 거야”

나는 그녀에게 며칠 전에 쓴 글이라며 노트 한 권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노트를 받더니 나지막하게 읽기 시작했다.


밤 아래 쉴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루는 조급하게 만료됐다. 어딘가를 가려다 말고 다시 어딘가에 진입하고 나오기를 반복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차라리 소년에게 질문을 건네볼까. 그래서 갈 길은 더 멀어지는 걸까. 네가 한 번씩 흐느낄 때마다 내 그리움은 말라간다. 한 걸음씩 흔적을 지워가며.

빈 동네, 까마득한 별빛, 충만한 언덕에 올라 혼자 별을 보노라면 깊은 생각에 빠진다. 어제에 이어 생각은 오늘 새롭게 갱신되지만 난 여전히 불충분하다. 그런 무효한 생각을 자주 하고 아주 가끔 언덕 위에서 큰 숨을 쉰다. 나에게 밤은 황폐하게 다가온다. 어른 같은 생각을 비춰도 여전히 내 생각은 12살쯤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하루는 곧잘 낡은 색으로 포장이 되고 그늘은 하늘색으로 진다. 어떤 그리움, 석연찮은 미소가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다 국화차를 끓인다. 부드럽고 매스껍다, 온기란 녀석, 쩍쩍 갈라져서 한구석에서 거드름만 피우고 있구나.

그림자 속으로 도망을 친다. 끝도 없이 질문이 떨어진다. 2천 년? 혹은 3만 년쯤 떨어졌을까? 뒤도 돌아보지 않아도 눈을 뜨지도 않아도 질문은 무언가를 적어내려 간다. 추락하는 속도에 맞게 느리게 달리다 넘어지고 말지만…… 말하자면 나는 구름 위에 손을 얹고 눈꺼풀을 어제에 기댄 채 서성이는 먼지가 된다. 흐느적 시선을 흘리다 위태롭고 또 불안하게 밤바람을 만진다. 그러다 깊은 한숨을 내쉬곤 내일이면 잊을 거야,라고 다짐을 매만진다.

차갑게 식은 공기, 초조하지만 들뜬 이야기들, 모든 허물어진 방구석 같은 녀석들이 내 방으로 진입한다. 한자리를 서늘하게 차지하곤 ‘잘 지내니?’라고 안부를 물으면 나는 헛기침을 하다, 붓 하나를 들고 굵은 선 하나를 그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구름처럼 떠다닐 것만 같다. 나는 달처럼 몇 달을 도는, 말하자면 두려움을 유예시킨 나그네처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너에게 이별을 통지한다. 아마도, 시작과 끝, 두 존재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끝을 찾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 나의 또 다른 짧은 삶을 만지작거린다.


“잘 썼네. 이해할 수 없지만, 깊이가 숨어 있어.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글을 이해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부피감이 존재해. 어쩌면 너 혼자만 번역할 수 있는 글일지도 몰라. 아니, 너 자신도 이해 못 하는 언어라면 어떨까? 이 글을 오직 너만 이해할 수 있다면, 이 글은 어떻게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사생아 신세가 되는 걸까? 그럼 네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그녀가 숨죽이며 말했다.

나는 노트를 다시 받아들고 어떤 궁극의 업적을 이뤄낸 작가의 표정을 짓고 이 글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으니 기억 속에서 완전히 탈출을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부피감이라는 것을 잴 수는 없을까. 내 생각은 얼마나 깊을까. 그 깊이로 뛰어들어서 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면, 나는 종결되지 못한 사건으로 결말을 맞게 되는 걸까. 그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달래려고 나는 글을 쓰는 걸까. 나에겐 고독이 필요했다. 완전하고도 완벽한 고독, 완전무결하며 순결한 고독, 그 누구도 옆에 존재해서는 안 될 고독. 가족이든 사랑이든 그 누구도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무법의 고독, 나에겐 오직 그것이 필요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번호를 확인하지 않았다. 동전 몇 개를 던져놓았으나 얼마나 털어놨는지 기억도 없었다. 맨 뒤에 앉아서 창밖을 물끄러미 관망했다는 것만 분명했을 뿐…… 나에겐 모든 순간이 사치로 돌변하고 있었다. 연애의 사랑스러움이든 가족의 친밀함이든 모두 내가 멀어져야 할 대상들이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느리고 외롭고 쓸쓸하게, 그 고독한 공간에서 혼자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나는 글을 써야 했다. 내 근원 속, 어둡게 생긴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그 인생이라면 남은 시간을 조금이나마 유예시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나의 배고픔을 달랠 유일한 길이 될지도……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그녀와 헤어져야겠다고, 우리에겐 아무런 미래도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가난한, 아니 더 가난하고 눅진한 삶을 살아야 하는 나에게 사랑이란 그저 비참한 결론을 맺도록 오래전에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창밖엔 비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늦은 봄비, 고독한 오후의 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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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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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flower 🌻

    0
    about 3 years 전

    금방 댓글을 썼는데 도착했을까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긴 글도 쓱쓱 그것도 매일 매일요~ 멋지십니다. 외로워야 글이 써진다에 한표!

    ㄴ 답글 (1)
  • 일과삶

    0
    about 3 years 전

    헛 이거 실화아니죠? 작가에게도 사랑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더군다나 글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대화도 잘 통하는 그녀인데 헤어질 이유가 없죠 ㅎ

    ㄴ 답글 (1)
  • 해피

    0
    about 3 years 전

    니체는 진정한 초인이 되기위해서는 고독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더군요. 나를 성장 시키기 위한 헤어짐, 처절한 아픔과 부끄러움이 없이는 작가가 되기 어려울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매일 배워갑니다ㅡ드림부산

    ㄴ 답글 (1)
  • 혜나무

    0
    about 3 years 전

    글쓰기라는 것은 어쩌면 결국 자기애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최적화된 도구이구요.. 알수없지만 알것같은 작가님의 세계를 잠시 엿보았습니다.^^

    ㄴ 답글 (1)
  • 향기

    0
    about 3 years 전

    비오는 날 추억!! 요청한 글 써주셔서 넘 감사드려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인연이 아니었던 거겠죠 그래도 잘 통하는 분과 이별이라니 ㅜ ㅠ 맘아릿... 글을 써야겠다는 그 맘이 지금도 쭉 ing이신... 공심님의 옛추억 한페이지를 본듯해 좋았습니다 감사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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