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구독자님이 재즈에 막 뛰어드신 분이라면, 혹은 주변에 재즈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는 분이 있으시다면 이 레터를 추천합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강의를 통해 해설하며 날카롭게(!) 갈고 닦았던 '재즈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정리해보았어요.
재즈의 구조 : 수미상관
'수미상관'이란 처음과 끝이 동일한 문학적 기법을 말하죠. 재즈 음악이 거의 수미상관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곡을 예로 들어볼까요? 가령 <Fly Me to the Moon>을 연주한다면, "Fly me to the Moon~" 에서 "In other words, I Love You" 까지의 구간을 헤드(Head)라고 부르는데요. 헤드 구간이 끝나고 나면 Fly me to the Moon의 멜로디를 전부 다 제거하고 형식과 코드 기반은 그대로 유지한 채 연주자들이 새롭게 그 위에 멜로디를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재즈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즉흥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이죠.
그런데 즉흥 연주에도 나름의 순서가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색소폰이나 트럼펫처럼 음을 하나밖에 낼 수 없는 단선율 악기가 먼저 솔로를 시작합니다(이들을 Front Man이라고 하기도 하죠). 뒤이어 기타나 피아노처럼 여러 음으로 화성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하구요. 끝으로 드럼이나 베이스 같은 리듬 섹션이 즉흥 연주를 펼치죠(이들을 Side Man이라고 하기도 해요). 보통 리듬 악기가 연주를 할 때는 곡의 형식이 잘 들리지 않거나, 따라가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에 Trade라는 장치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트레이드는 네 마디나 여덟 마디씩 다른 악기들과 리듬 섹션 악기들이 서로 주고 받는 연주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연주 순서가 매번 똑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헤드를 연주 했는데 '왠지 베이스가 먼저 나오면 좋을 것 같아' 하면서 베이시스트가 먼저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고, 트레이드를 색소폰&피아노, 보컬&기타가 진행할 수도 있는거죠.
즉흥 연주를 얼마나 길게 할건지도 미리 정해 놓지 않습니다. 멜로디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만큼의 길이를 'Chorus' 라고 부르는데, 한 코러스만 연주하고 다음 주자로 넘어갈 수도 있고 10~20 코러스까지 연주하면서 자유로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어요.
연주자들이 번갈아가며 즉흥 연주를 다 했다면 이제 다시 헤드로 돌아가야 할 차례입니다. '수미상관' 하는 거죠. 다시 한 번 Fly me to the Moon의 멜로디가 등장 한다면 '이제는 연주가 끝을 향해 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라이브 클럽에서 연주자들이 손을 들어 사인을 주거나 머리를 가르킨다면 "다시 헤드로 돌아가자"는 뜻이랍니다 🙂
물론 좋은 음악은 이런 외부의 개입 없이 좋은 소리를 쫓아가는 음악이겠지만, 급박한 상황이나 연주를 끝내려는 신호로서 이런 은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보컬 재즈가 좋은 이유
저는 재즈의 구조를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컬이 있는 재즈를 듣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왜냐면 보컬이 있는 재즈에서는 명확하게 멜로디와 가사가 있는 구간이 있고, 가사가 있는 헤드와 즉흥 연주의 부분이 명확히 분리됨을 느낄 수 있거든요. 즉흥 연주가 계속 이어지다가 다시 보컬이 가사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아, 아웃 헤드로 들어갔구나' 하는 것을 쉽게 알 수도 있구요.
물론 보컬이 스캣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고, 즉흥 연주에 가사를 붙이는 Vocalese 라고 하는 테크닉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듣는 재즈의 8~90%는 이렇게 [헤드 - 즉흥 연주 - 헤드] 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만 계셔도 훨씬 재즈를 듣는데 이해가 편해질 것입니다 :)
연주자를 향한 응원👏
재즈 라이브를 관람하게 될 때는 박수를 굉장히 많이 쳐야 합니다. 헤드 연주에 뒤이어 등장하는 '즉흥 연주' 라는 것은 연주자가 그때그때 떠올리는 감정과 느낌,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인데요. 이 한 코러스 한 코러스의 연주를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이야기에 동의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연주자들의 즉흥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보내주면 연주자들도 더욱 힘차게 연주를 이어갈 수 있답니다! 그러니 재즈 라이브에서는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주세요👏👏👏
즉흥 연주는 어떻게 하는걸까? 🧐
악보도 없이 긴 호흡의 연주를 술술 뱉어내는 재즈 연주자들을 보며 신기함을 느껴보셨나요? 저 즉흥 연주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걸까요?
사실 재즈의 솔로 연주만 즉흥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대화 또한 사실은 즉흥적이죠. 예를 들어 제가 어느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한다면 그 연설의 내용을 하나하나 준비해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것을 읊을 수도 있겠지만, 특정한 주제와 핵심적인 메세지만 정해두고 즉흥적으로 살을 붙여가며 이야기를 전개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모든 순간에서 Improvisation 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단지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다를 뿐이죠.
저는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재즈 연주자들은 '재즈 언어'를 익혀두었다가 필요한 상황과 의도에 맞게 그 말을 내뱉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언어를 배우는 방식으로 연주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방법이죠.
하지만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좋은 언변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언변을 가진 사람은 주로 자기 이야기의 주제와 핵심을 명료하고 인상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죠.
재즈 연주자들의 목표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 손버릇으로 튀어나오는 불필요한 음들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감정과 메세지만을 악기에 실어서 전달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죠.
저는 어디에선가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가장 좋은 연주는 가장 적은 노트로 가장 많은 것을 전달하는 연주다"
재즈 밴드는 어떻게 구성되는걸까?
재즈라는 음악은 혼자 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닙니다. 피아니스트라면 한 두 시간 정도의 독주회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베이시스트나 드러머에게 한 시간 동안 독주를 시킨다면 퍽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겠죠. 그래서 재즈는 결국 크든 작든 함께 연주하게 됩니다. 2인조를 가르켜서 Duo 연주, 3인조를 가르켜서 Trio 연주, 4인조를 가르켜서 Quartet 연주... 이런 식으로 부르는 옵션들도 다양하죠.
재즈는 하나의 밴드로 롱런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열리는 긱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긱을 리드하는 한 명의 연주자 이름을 따서 ㅇㅇㅇ트리오 이런 식으로 이름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는 주로 리더가 공연 셋 리스트와 방향성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으며, 리허설을 통해서 합을 맞추고 편곡을 더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우선 연주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편리합니다. 자신의 밴드를 꾸려둘 필요도 없고, 모든 연주자가 리더로서 베뉴와 컨택할 수 있기에 일감도 많습니다. 만약 인기있는 베이스/드럼 주자라면 친구들이 불러주는 긱에 출두하는 것 만으로도 매일 밤 연주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매번 다른 연주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 공연이 마음에 들어서 다시 찾았는데, 리더를 제외한 다른 연주자들이 모두 바뀌었다면 그때 그 사운드를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연주를 펼쳤더라도 기록된 음원이나 영상이 없다면 이 팀은 없는 팀이나 다름없는 셈입니다. 물론 이것이 재즈의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요.
재즈는 곧 대화와 같아요👂🏻
으레 하는 말로 음악을 가르켜서 "언어 없는 대화다" 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죠. 저는 실제로 두 명, 세 명, 네 명이서 함께 연주를 하는 과정이 테이블에 앉아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과정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특정한 주제가 있다는 겁니다. 음악에서도 특정한 곡에 대한 해석,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멜로디 등의 주제가 있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강조하죠.
둘째는, 내가 말하는 동안 친구들이 잘 들어주고 리액션 해준다는 점입니다. 언어적으로 맞장구를 쳐주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비언어적 표현 등으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있음을 나타내죠.
재즈 연주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명이 솔로 연주를 하는 동안 다른 연주자들도 거기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컴핑을 찔러 넣거나, 셈여림을 함께 조절하거나, 같은 리듬으로 힘을 실어주거나 하면서요. 그래서 재즈 라이브에서는 악보를 보는 대신 상대방의 연주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연주자들을 볼 수 있죠.
친구와 대화를 할 때에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잘 반응해주는 친구와는 계속 함께하고 싶어지죠? 재즈 팀의 구성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유명한 연주자, 테크닉이 좋은 연주자, 연륜 있는 연주자가 아닌 친구처럼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연주자와 함께 할 때 더욱 즐겁죠.
사실 재즈가 연주되는 순간은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무대 아래의 관객들을 의식함과 동시에, 다른 연주자들을 신경쓰는 경우도 많죠. 처음 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오랫동안 같이 연주했던 사람일지라도 나의 실수나 미숙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 실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서로에 대한 신뢰로, 또 좋은 팀웍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죠.
재즈의 견문을 넓히는 과정
결국 재즈는 여러 버전을 들어보고, 여러 연주자들의 톤과 느낌을 비교해보고, 편곡의 다채로움을 알아가며 견문을 넓혀가는 음악입니다. 한 곡만 가지고도 수 백 개의 새로운 편곡이 존재하고, 매번 연주 때마다 즉흥과 사운드가 달라지니 수 천, 수 만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추천하는 방법은 마음에 드는 헤드를 골라 여러가지 버전으로 들어보는 것입니다. 플랫폼에서 정식 음원으로 발매된 버전, 유튜브에서 커버한 버전, 라이브 연주에서 듣게 되는 버전까지. 일단 내 귀에 재미있고 익숙한 곡들을 기반으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죠.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실제 악기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라이브 클럽을 찾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제 아내는 라이브 연주에서 '표정'을 주로 본다고 하더군요. 표정을 통해 지금 연주가 잘 되고 있는지, 어딘가 불편한 점이 있는지 포착할 수 있다구요. 연주자의 표정이 밝은 상태의 음악은 훨씬 더 매끄럽고 전달력 있게 들린답니다.
올해는 더욱 다채로운 재즈와 함께 해보시는건 어떠세요? 제가 옆에서 친절히 도와드릴게요 😇
+ 행복한 설 연휴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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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와😃 너무 유익한 정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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