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다른 사람이 쓴 제주 에세이

아침부터 오름에 오르다가 지쳐 쓰러진 날

2022.01.25 | 조회 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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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제주에 내려온지 겨우 이틀째지만, 벌써부터 여러 사랑을 받았다. 댓글을 달아준 사람, 답장을 해준 사람, 후원을 해준 사람, 무엇보다도 읽어주는 사람.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온도라는 것들이 있다. 훗날 이 시간을 다시 돌아볼 때, 제주도 한 달 살기와 함께 메일 서비스를, 그리고 이에 응답해준 여러 사람들을 기억하게 될 거였다.

 

매오름 : 작심삼일이 문제

삼일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주 살이는 아직 이틀째지만 메일을 매일 보낸지 사흘이 지났다는 거였다. 아침부터 한 시간 가량 헤매버린 오름이 문제였을 수 있고, 나를 과신하고 마셔버린 맥주 한 캔 때문일 수도 있다. 원래는 탁자에서 썼는데 오늘은 늘어지는 김에 침대에서 재즈를 틀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조명은 모두 꺼둔 채로 노란빛이 은은하게 도는 스탠드만 켜두고 있다. 우선 오름 이야기부터 해본다.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보내는 날인 만큼 제주스러운 활동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멀리 나가기에는 근처 동네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근처에 표선이 있고, 제주스러움이라 하면 당연코 오름이었다. 표선 오름을 검색하니 '걷기 쉬운 오름 추천'이라며 블로그 포스팅이 되어 있었다. 마침 보슬비도 내릴락말락 하는 날씨이겠다, 너무 가파르면 무서울 거 같아 매오름으로 캐스팅했다. 나는 훗날 블로그에 그렇게 포스팅한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데...(?)

정상 거의 다 와갔을 때의 풍경
정상 거의 다 와갔을 때의 풍경

201번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갈 수 있어서 접근성이 좋은 매오름. 초반에는 평지라서 소나무의 피톤치드를 맡으며 흥겹게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경사가 막대해지는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고, 도저히 코로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호흡을 입으로만 하는데 건조해져서인지 입천장이 따가워지고. 피톤치드가 이리도 매운 공기였나. 공기도 안 돌고, 피도 안 도는 오름을 느끼며 내 체력이 정말로 망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져있다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져있다

자연을 걸으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생각보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하니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개운했다. 생각이 들지 않는 시간도 내게는 필요했다. 가만히 있어도 별별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고, 대체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끌어올려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걷기 명상'이란 게 있다고 들었다. 걸으면서, 풍경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거랬다. 명상에는 종류가 많았다. 나는 좀이 쑤셔서 가만히 앉아 눈을 감는 건 도저히 못하겠더라. 대신 글쓰기 명상은 잠시 시도해보았다. 그마저도 손이 아파서 그만두었지만. 매일 아침 오름을 오르며 걷기 명상을 하면 좀 나을까.

꽤 괜찮은 눈싸움이었어
꽤 괜찮은 눈싸움이었어

오늘은 오름을 오르다가 노루인지, 고라니인지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가야 할 길에서 갑자기 두 마리가 휙 나타난 것이다. 한 마리는 바로 반대편 숲속으로 빠졌지만 뒤따라오던 한 마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우린 서로 눈싸움을 하듯 눈을 마주보았는데, 내가 지고 말았다. 솔직히 고라니가 내게 뛰쳐들어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피할 수나 있을까? 유명하지 않은 오름이라 내가 사고를 당해도 바로 신고해줄 사람이 없을 거 같은데...

오름에 오를 땐 야생동물을 주의합시다.

 

라바북스 : 나의 일상이 뭐가 재미있다고

제주도 한 달 살기 메일을 시작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다. 어떤 방식으로 연재를 하면 좋을지 머리를 싸매가며 여러가지를 실험해보았다. 먼저는 편지 형태를 생각했다. 구독자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친근한 반말 컨셉이었다. 극강의 어색함과 강제로 쥐어짜내는 감성 느낌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돌고 돌아 내가 가장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오리지널 에세이로 정착되고야 말았다. 어떻게든 구독자들을 웃겨주고 싶었다.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게 목적인데, 무엇이 재미있는 글인지 알 수가 없다. 역시 시장조사나 소비자 심리가 제일 어려운 것이지.

처음에는 에세이를 우습게 보았다. (에세이를 쓰는 모든 분들에게 사과 인사 말씀 올립니다.) 적당한 감성 한 스푼 섞어서 일상을 얘기하면 되는 게 아닌가. 마치 브이로그마냥. 참고로 제주도에 와서 브이로그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실패하는 중이다. 아니, 아직 준비하는 중이라고 정정해본다. 그런데 카메라 구도부터 연출까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나의 일상을 어디까지 담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관련 없는 과도한 TMI는 사람을 지치게 할테니까. 그런데, 일상의 무엇을 써야 하지. 나는 일상이 별 재미없는 사람인데.

친구들과 만나면 일상 얘기를 먼저 꺼낸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물꼬가 트인다. 오래 만나지 않은 사이일수록 말할 게 많다. 몇 년 간의 업데이트를 최대한 압축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난 너무 간소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 "남자친구랑 사귀고 있어." 끝. 싸운 일이라던가, 어떻게 만났던가라는 썰은 상대가 질문을 해야 겨우 나오는 편이다. 우역곡절 학교 생활을 하고 있어도 "그냥 잘 지내지" 정도로. 말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라고 변명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만 아는 이 이야기들이, 상대에게도 재미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누구라도 재미있게 들을만한 썰을 몇 가지 만들어서 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금세 동난다.

라바북스 외관
라바북스 외관

대체 제주도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 걸까? 레퍼런스를 조사할 겸, 독립서점으로 향했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라바북스'였다. 버스로 40분가량 가면 길가에 서점이 하나 있다. 라바북스로 들어가면 일반 서적부터 독립서적까지 다양하게 구비가 되어 있다. 서점 주인분이 재량껏 배치한 책들을 살펴본다. 표지를 펼쳐둔 책들이 아마 잘 나가거나, 추천하는 것이겠지. '에디터 픽'이라며 메모가 붙어 있는 책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서점주인분에 대한 명확한 믿음이다. 우선 세 가지 책을 어떤 걸 샀는지 보여주고 싶다.

세 개의 책과 인센스 스틱
세 개의 책과 인센스 스틱

① 제주 에세이 : 서른두 살, 안식년을 가져보았다

② 연애 에세이 : 휴가 없는 사랑

③ 매거진 : Achim(아침) 19호

제주 에세이를 끈질기게 골랐다. 몇 문장만 보아도 작가의 문체나 감성이 전체적으로 보인다. 아무 페이지나 펼친 다음에 찬찬히 읽어본다. 편집 감성에 절여 있어서 그런지 자간이 잡혀 있지 않은 책은 가독성이 떨어져 보기 힘들었다. 짧은 산문처럼 된 에세이(한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감정만 들어간 것들은 읽기에 버찼다.

그렇게 고른 '서른두 살, 안식년을 가져보았다'는 저자가 퇴사하고 146일간 기약없는 제주살이를 하면서 쓴 것이다.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매일이 성실하게 적혀 있었고, 감성적이려고 애쓰지 않았는데도 그 안의 작가만의 감성이 잘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 사기였다. 글도 잘 쓰는데 사진을 이렇게 잘 쓰면 안 되지. 모든지 다 잘 하는 사람은 분명 신발끈은 묶지 못할 거다.

작가는 담담하게 오늘 무얼 했는지, 무얼 생각했는지를 말했다. 자연스럽게 퇴사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녹아내렸는데 그 진솔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이런 글을 좋아하는구나. 누군가의 삶이 담백하게 그려진 것들. 자신의 고민의 흔적을 과장은 없되, 숨기지도 않고 풀어낸 문장들. 

그래서 오늘의 메일은 이 책에서 영감을 받고 구성을 달리 해보았다. 나와 닮은 글을 쓰고 싶다. 자연스럽게 쓰이고, 흘러가듯 읽히는 그런 글을. 아직은 멀었지만.

 

나, 벌레보다 힘 셀지도?

집에 돌아와서 방청소를 하던 중에 무언가가 내 눈에 띄었다. 검정색의 자그마한 물체가 창문에 붙어 있던 것이다. 파리인가 싶었다. 파리 정도라면 창문을 열어 내쫓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걔 주변을 툭툭 쳐봐도 날지 않는 것이다. 다시 자세히 보니까 더듬이가 있다. 더듬이가. 바선생은 다행히 아니었지만, 누구인지 특정조차 할 수 없는 그 자그마한 물체 때문에 몸이 확 굳어버렸다.

까맣고, 동그랗고, 긴 더듬이가 두 개 나있다. 몸을 웅크린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내 설명부터 하자면 플랑크톤과 싸우다가 질 거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니는 세상 최약체다. 요즘 초파리는 잡을 수 있지만 맨손으로 절대 못 잡는다. 모기도 못 잡는다. 파리는 쫓을 수만 있다. 근데 내 얼굴로 날라들어오면 쓰러진다. 

창문에 자세히 보면 있습니다. 아 있다고요.
창문에 자세히 보면 있습니다. 아 있다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했다. 남아있던 종이 박스 쓰레기로 팍! 친다음 창문에 붙은 시체를 두루마리 휴지로 둘둘 싸서 팍! 집고 팍! 변기통에 넣었다. 시체가 제대로 눌러붙었는지 보지도 않은 채 변기물을 내렸다. 나... 정말 큰 일을 해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오늘의 먹부림

당케올레국수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민속촌 근처

보말칼국수(10,000\)
보말칼국수(10,000\)

관광객들에게 맛집으로 소문이 난 '당케올레국수'집을 찾아가보았다. 표선면에서 어디가 제일 맛집인가 하니, 보말칼국수로는 여기가 딱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칼국수가 유명하고, 그 다음은 보말죽인데 면이냐 밥이냐의 차이란다. 칼국수에도 밥이 조금 들어가있어 죽을 체험해볼 수 있다.

묽은 국물일 줄 알았는데 완전 액체 주르륵 흐르는 국물이었다. 죽처럼 말캉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보말이 어떤 맛이냐하면... 곡식 같은 맛? 건강한 곡식. 이런 맛 묘사가 제일 어렵다. 면은 거의 다 건져먹었고 밥은 조금 남겼다. 대중적인 입맛에 맞춘 칼국수다. 적당히 간간하여 호불호가 크게 없을 듯하다. 확실히 맛있다!

 

도바나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수평 좀 맞춰주었음 좋겠다 내 사진
수평 좀 맞춰주었음 좋겠다 내 사진

노트북하기 좋은 표선 카페를 검색하니 여기가 나왔다. 다른 대형카페들은 책상이 너무 낮거나, 사람이 많아서 노트북하기 부담스러웠는데 여기는 딱 적당하다. 바로 앞에 오션뷰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도 사람이 많이 없었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게다가 의자들이 전부 푹신한 쿠션이 있었다. 테이블 빨리 돌리려고 불편한 의자로 하기 마련인데... 이 부분에서 감동 포인트를 받았다.

구독자 김하물님께서 후원해주신 커피
구독자 김하물님께서 후원해주신 커피

커피보다는 티를 주력으로 하는 곳이다. '가을의 숲'이라는 이름의 차를 골랐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면 티백을 꺼내서 따로 컵에다 따라 마시는 거다. 컵에 따르면 금방 식는데, 주전자 안에 든 차는 여전히 따뜻하더라. 겨울바다의 청취를 느끼고 싶다면 이 카페를 전적으로 추천한다. 노트북하면서 느긋하게 있어도 눈치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몇몇 있었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넓고, 심지어 예쁘기까지 하다.

 


 

오늘은 진짜 조금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면 구구절절 쓰고 싶은 말이 많다. 나는 입보다는 손으로 말하는 타입인가보다.

날이 밝지 않아 오션뷰가 별로 예쁘지 않다. 언젠가 햇살이 쨍쨍해진다면, 윤슬까지 그대로 남은 바다를 찍어보고 싶다.

숙소에서 보이는 오션뷰... 이거 맞나?
숙소에서 보이는 오션뷰... 이거 맞나?

나 분명 휴대폰 좋은 걸로 바꾸었는데 뭐가 문제지?

 

오늘도 감사합니다!

내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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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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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미

    0
    over 2 years 전

    와 침대에 누워 재즈 들으며 에세이라니 넘 좋네요.. 제주에도 고라니인지 노루가 사는군요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신발끈 ㅋㅋㅋㅋㅋㅋㅋ 소소한 질투 넘 깜찍해요 그리고 잔잔하니 재밋어서 걱정 안하셔도 될듯ㅎㅎ 그래도 정이의 썰풀이는 조금 그립네요. 마지막으로 들은 것에서 업데이트가 좀 있을까요? 조만간 만나줘요. 보말칼국수 저도 좋아해요! 제가 갔던 집은 아주 오래된 가게에 밖으로 바다가 보였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 다음에 알아올게요. 그리구 유명해서 이미 알 것 같지만, 명진전복 꼭 가줘요. 버터구이 한 입 먹으면 머릿속에 샹투스가 울리거든요.. 노트북 하기 좋은 카페 정보도 고마워요~~ 오늘도 잘 읽었어요!

    ㄴ 답글 (1)
  • 소라니

    0
    over 2 years 전

    고라니 만난 거 실화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싸움에서 졌다니... 정말 속상한 일이군요! (아마 날씨가 좋았더라면 이겼을지도...) 걷기 명상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는데, 생각이 많은 저로써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항상 생각과 기억이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가 많은데, 걷는 행위를 함으로써 오롯이 내 몸에 집중한다라는 점이 참 건강하다 느껴집니다.. 그리고 책을 3권이나 구매하셨다니, 작가님의 독서량에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글이 수려하게 잘 읽히는 이유가 상당한 양의 독서 덕분인 것 같네요! 이렇게 또 하나 배워갑니다! 에세이에 대한 작가님의 취향도 잘 알 수 있었어요! '특히 다 잘 하는 사람은 분명 신발끈은 묶지 못할 거다.' 라는 문장이 참 좋네요.. 진짜 좋은 문장이었어요! 한국도 날씨가 그닥이었습니다! (제주도도 한국이지만 어쨌든^^;;) 내일은 꼭 맑고 좋은 여행이었으면 좋겠네요 - 그리고 벌레를 잡았다니, 그대는 정말 멋진 어른이 되었군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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