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첫문장조차 마음에 안 들 때

이런 날은 유독 글쓰기가 싫더라

2022.01.30 | 조회 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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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첫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미 여러 번 메일을 갈아 엎었는데도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쓸 이야기는 많았지만 써지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글쓰기에도 밀당이 필요하다. 감정이 격할 수밖에 없는 소재는 당장 쓰면 안 된다. 감정과 사실과 의견과 상상이 마음대로 혼합 되어버리니까. 시간을 두고 고이 묵힌 이후에 괜찮을 때 꺼내 써야 한다.

스타벅스에서 흑임자라떼를 마시며 메일을 썼다. 이거 존맛탱
스타벅스에서 흑임자라떼를 마시며 메일을 썼다. 이거 존맛탱

많은 작가들이 글쓰기의 비법을 메모로 꼽는다. 휴대폰이 떨어지려고 한다면 빗물이 고인 흙웅덩이에 몸을 던져도 좋을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소중함과는 반대되게 자주 떨어뜨리고, 잃어버리려는 일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휴대폰 메모 안에는 생각의 단상들이 대다수 들어 있는데, 심심할 때 둘러보면 재미있다. 가장 재미있는 건 자기 일기라고 누가 말한 것처럼, 잊고 있던 아이디어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행위는 중요하다. 그래야 무의식에서 떠오르던 소재와 언젠가 맞닿을 때가 되니까 말이다.

힘을 줘서 쓰고 싶은 소재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손으로 흘려보내도 되는 소재가 따로 있다. 한 번 집중해서 수려한 문장을 구사해내고 싶은데 요즘따라 겨우 마감 전에 보내는 게 일상이다. 삶보다는 여행에 집중하고 있다. 제주는 왜이리 가고 싶은 곳이 많은지. 남자친구가 온 김에 렌트카를 빌려 조수석에서 열심히 달리는데, 역시 제주는 뚜벅이에게는 너무한 곳이구나를 다시금 느끼고 있다. 오늘따라 글이 쓰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다. 뚜벅이에게 가혹한 하루를 보냈다.

 

세 번의 휴무, 한 시간의 걸음

오늘은 뚜벅이로서의 삶을 다시 살아보기로 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만나기로 하고, 렌트카로 서귀포 시내까지 우선 갔다. 가고 싶은 카페가 있어 내렸는데 문득 불안감이 솟았다. 이전에 어디 갈지 검색하다가 유독 시내는 일요일 휴무가 많다는 걸 알았다. (참고로 관광지쪽은 수요일 휴무가 많다.) 혹시나 싶어 카카오맵으로 확인을 해보니... '일요일 휴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아직까진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근처에는 가고 싶은 곳이 없어 버스를 타고 옆 동네로 이동했다. 버스로 10분 정도 이동했는데 내려야 할 곳을 놓쳤다. 다음 정거장 즈음에서 벨을 눌렀는데 하필이면 이땐 기사님이 내 벨을 눈치 채지 못한 거였다. 다급히 내린다고 말하고 내렸다. 지도를 보아하니 큰길로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당연히' 버스가 있을 줄 알았다. 게다가 여기는 '시내'니까 '당연히' 버스나 택시가 많을 줄 알았다. 제주에서 교통편을 기대하는 건 큰 오산이었나보다. 카카오맵을 켠 날 기다리는 건 "배차정보 없음"이었다.

35분 오르막을 걸어올라 나온 풍경... 저 바다 아니었으면 가만 안뒀다
35분 오르막을 걸어올라 나온 풍경... 저 바다 아니었으면 가만 안뒀다

괜찮다. 그래도 가까워보인다. 35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고 한다. 제주도에 뚜벅이로 오면서 이 정도의 걸음은 이미 각오했다. 그런데 오르막길일 줄은 몰랐지. 그것도 한라산을 바라보는 오르막길이라니. 한라산 등반을 하는 줄 알았다. 한겨울에 땀이 흐르더라.

슬픈 소식은 그 다음에도 있었다. 가고 싶었던 독립서점인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미 인터넷으로 휴무가 일요일이 아니란 것도 다 알아둔 참이었다. (이전과 같은 비극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건물 앞에 선 나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사장님이 바꾸신 거였다. 일요일도 휴무인 걸로... 코로나 탓인 걸까? 설상가상으로 근처에 가고 싶었던 카페의 휴무일을 알아보니 또 오늘이었다. 왜 오늘은 일요일인 거지? 차라리 스폰지밥처럼 "월요일 좋아!"를 외치고 싶었다.

다른 곳에 독립서점이 있나, 자포자기 심정으로 카카오맵을 켰다. 어! 그런데 가까운 곳에 다른 서점이 하나 있는 것이다! 그건 참 좋았는데

빨간색이 내가 걸어 올라간 길, 1번 2번 3번 순으로 가고자 했던 곳
빨간색이 내가 걸어 올라간 길, 1번 2번 3번 순으로 가고자 했던 곳

왜 내가 35분이나 걸어 올라온 그 출발점과 가까운 곳에 있냐고.

그래도 하나의 위안을 받았다면, 좋은 독립서점을 발견했다는 것. 이번에 간 곳은 <취향의섬 북앤띵즈>이다. 사장님께서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셔서, 직접 그리신 굿즈들이 많아 유니크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기념품을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책마다 메모가 있었는데, 어떤 점에서 추천하는지, 누구에게 추천하는지 등 자세한 책소개가 적혀있었다. 덕분에 모든 책들을 사고 싶게 만드는 구매 욕구가 뿜뿜 솟아올랐는데... 이전에 책을 하도 많이 사서 자제했다. 서점에 오면 책을 보고 싶은 욕구가 솟는데, 왜 집에 돌아오면 그게 사라질까?

저 강아지 인형 너무 귀엽지 않나요?
저 강아지 인형 너무 귀엽지 않나요?

오늘은 메일이 잘 써지지 않아서 저런 제목으로 했는데, 생각보다는 분량이 더 나왔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쓸 때가 제일 빨리 써진다. 내일은 생각이란 걸, 감성이란 걸 한 스푼이라도 담아서 써보고 싶다.

여담이지만 매일 술 마실 생각으로 '제주 한 잔'이라고 제목을 적었는데 정작 와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혼술을 하기에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너무 어둡다. 다들 밤의 제주도는 조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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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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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라니

    0
    over 2 years 전

    아아... 제주도는 길을 잃기가 쉬운 곳이군요.. 긿을 잃었다기보단 뚜벅이에게 쉬운 길이 아니었다는 말이 더 와닿을 수 있겠어요.. 역시 자동차가 아닌 이상은 험난한 예정이 펼쳐질 공간이랄까.. 많은 것을 깨닫고 갑니다.. (아무리 경기도 사람이라지만 대중교통이 없다면 그저 조선시대 노비인 셈...) 결국 흑임자 라떼를 드셨군요! 존맛탱이라니, 제주도 스벅에 가야할 욕구가 마음껏 샘솟는군요! 안그래도 꾸덕한 흑임자를 내심 연모하고 있었는데, 맛있다는 후기를 들으니 더욱 먹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인증샷을 남겨야겠군요! 그리구 일요일에는 대체로 휴무인 점이 저를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관광지를 제외한 가게들은 주말에 휴식을 취한다니...! 저도 일정을 짤 때 고려해보아야겠어요! 꾸준히 읽을 책을 살펴보고 구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작가님의 마음을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네요.. (작가님의 독서량.. 나카나카 정말 대단하군요..!) 저는 제주 한 잔이라는 뜻이 궁금했는데, 마지막 문단을 읽고 나서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저도 음주를 즐기는 편이지만 정작 와서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 혹은 익숙한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즐기는 것은 좋지만 낯선 곳에서의 술 한 잔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법인 것 같아요! 아무리 경치 좋고, 풍경 좋은 제주라지만 내 마음이 내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시간이 꽤 지나고 나면, 작가님이 추천해주시는 술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기대하겠습니다💕♥️

    ㄴ 답글 (1)
  • 김하물

    0
    over 2 years 전

    오 강아지 진짜 귀엽다..! (책보다 강아지가 더 눈에 들어오는 나는?) 그 저 서점이었나? 걸어서는 멀 수 있지만 차타면 금방인? 곳에 크리스마스 박물관 있는데, 먼 크리스마스 박물관이야;;하면서 갔는데 꽤 만족했던 곳..! 완전 추천이요 헤헤 오늘 코스 완전 문창 코스네요ㅋㅋㅋㅋ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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