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두번째 한권, 두번째 편지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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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한권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는 제가 평생 간직하고 싶은 그런 문장들이 무척 많습니다. 먼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소개 시켜드려 볼까 합니다.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서는 것은 외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생겨난 수많은 가능성들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능성이란 계속 나뉘는 길 중에서 도착지를 알 수 있는 한 줄기 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능성이란 항상 쉬지 않고 변화하는 전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중대한 선택들을 하게 됩니다.
첫번째 한권인 <전념>에서도 선택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이었죠. 어쩌면 그와 비슷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 일을 다른 것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A와 B와 C 중에서 A를 택하면, B와 C를 버린다는 아쉬움이 무척 큰 것이죠. 특히, B와 C에 담긴 가능성들을 생각하면, 쉽사리 선택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사람은 자기가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하기가 무척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A와 B와 C의 가능성을 '가진' 상태에서 하나를 택해버리면, 나머지 가능성들을 버린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아이랑 마트에 가면, 이런 점을 더 명확히 느끼게 됩니다. 아이는 처음 고른 장난감을 포기하기 매우 어려워 합니다. 일단, 손에 쥐면 아무리 더 좋은 것으로 유혹하더라도, 처음 고른 '그것'을 아무리 별볼일 없는 것이어도 포기할 수 없어 합니다. (생일 선물을 고르게 할 때, 먼저 비교적 저렴한 코너에 데려가는 게 하나의 팁이 될 수 있겠군요.)
그러나 막상 어느 하나를 택하고 나면, 그것은 다른 가능성들을 버린 일이기 보다는, 그 하나가 불러오는 엄청난 디테일들의 축제 속에 들어서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선택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의 환대인 셈이죠.
간단한 예로, 소설가가 되기로 선택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당장 우리는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 채 '소설가 되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까요? 한 사업가는, 원래 소설가 지망생으로 문예창작학과를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소설 쓰는 훈련을 통해 키운 능력으로, 자기 제품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기가 막히게 해내서, 크게 사업을 성공시킨 경우도 있더군요.
저도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인문학 책을 썼고, 에세이를 쓰다가, 요즘에는 소장을 쓰고 있습니다. 글쓰기라는 게 여러 가지들로 파생되어 나가면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보여준다는 걸,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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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신비로운 건, 그렇게 다른 선택들을 버렸다고 믿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왜소해 보이는 단 하나의 선택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수많은 가능성들과의 기적같은 만남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런 우연과 만남들에 대하여 책 한권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스터디 모임 중에서 하나를 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의 결혼상대를 택했을 때, 수많은 직장들 중에서 하나의 직장을 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늘 저녁에 만날 한 사람을 택했을 때,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번 주에 읽을 한 권을 택했을 때, 폭죽이 터져 올랐던 것 같습니다.
삶을 무언가 제거되고, 위축되고, 포기되는 과정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만남의 과정, 새로운 가능성들이 다시 펼쳐지는 무대, 우연들의 놀이터로 볼 수 있는 태도를 지닌다면, 삶을 사랑할 준비를 끝마친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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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저는 한 구절을 더 남겨보고 싶습니다. 저는 대화를 할 때 뿐만 아니라, 강연을 하거나 모임을 할 때도 핵심은 '삼천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이어지는 어떤 대화와 이야기의 지점들이야말로, 바로 대화 자체의 신비롭고도 기쁜 본질이 아닐까 하고요. 이 구절은 바로 그런 점에서 큰 공감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 여분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대화가 넓어질 여지를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놀이와 비슷한 구석이 저와 이소노 씨 사이에 있기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말을 엮을 수 있고, 저는 환자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말이 잘통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대개 내가 하는 이야기를 상대방이 공감하며 잘 들어주고, 나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좋은 대화를 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더 멋진 대화의 경험이란, 대화를 하기 전까지는 결코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어떤 현장성의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도치 않게 파생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때론 삶의 새로운 힌트를 발견하기도 하지요.
반면에 세상에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대화'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코 새로운 영역이나 만남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대화 말이지요. 자기의 가치관에 갇혀서 상대에게 끊임없는 훈계를 늘어 놓는다든지, 대화의 전과 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든지, 대화가 만남의 창조가 아니라 더 단단해지는 돌하르방이 되는 계기라든지, 하는 그런 대화도 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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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서재>는 어떨까요? 비록 몇 번 안되는 편지이고 만남이지만, 이 대화의 장은 어떤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이는 그런 현장일까요? 아니면 저 혼자 즐거워하는 나르시시즘적인 골방일까요?
구독자님께 그러할지, 저는 역시 알 방법이 없습니다.
혹여나 이 편지로 오가는 이야기가 그런 현장이라면, 저에게 가벼운 언질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조금 더 즐겁게 다음 편지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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