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몸이 달라졌다

두려움의 자리에서 불편심(不偏心)의 자리로

2026.04.26 | 조회 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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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쥐지 않은 아침, 그 자리에 이미 빛이 있었다." Generated by Gemini

어느 아침, 오래 보내지 못했던 메일을 드디어 보냈다.

함께 수련을 나누면 좋겠다고 느꼈던 한 기관이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여러 번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실제로는 오래 두드리지 못했다. 한 번 No를 들은 기억이 몸에 남아 있었다. 다시 연락한다는 것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들이 또 No를 하면 — 내 프로그램이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절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아침은 달랐다. 몸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상황은 그대로였다.

 

역할과 나를 과동일시할 때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로 모인다. 나는 사역의 결과를 나 자신에게 걸고 있었다.

토마스 키팅은 이것을 '과동일시(over-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신이 맡은 역할 — 목사, 목자, 영성지도자, 교사, 부모 — 과 자기 자신을 너무 강하게 동일시한다. 그래서 사역이 거절당하면 내가 거절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코스에 사람이 오지 않으면 내 존재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상태에서는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 연락을 해도 무겁다. 연락을 안 해도 무겁다.

몸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를 떠올릴 때 몸이 긴장되는가, 아니면 부드러워지는가. 그 아침, 처음으로 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사막은 실제 장소여야 하는가

벨든 레인(Belden C. Lane)은 그의 책 거친 풍경의 위로 (The Solace of Fierce Landscapes)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막은 본질이 아닌 모든 것을 벗겨낸다.

사막은 꼭 모래밭이 아니어도 된다. 캘리포니아의 산도, 뉴욕의 새벽 거리도, 손녀를 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 고요한 밤도 — 같은 일을 한다. 통제할 수 없고, 결과를 붙잡을 수 없는 자리. 그 자리가 이미 사막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사막은 내면에 있다. No를 들을까 두려운 그 순간, 오래 연락하지 못하고 있는 그 자리 — 거기서 에고가 의지하던 것들이 흔들린다.

본질이 아닌 것이 벗겨질 때 — 비로소 더 근원적인 것이 드러난다.

 

비워짐에서 충만으로

사막에서 벗겨지는 것은 내가 의지하던 것들이다. 역할, 이미지, 인정, 통제. 이것들이 사라질 때 처음에는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비어있음이 끝이 아니다. 레인은 말한다.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답을 가지고 있다.

비워질 때 — 더 근원적인 생명력이 살아난다. 결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충만에서 흘러나오는 움직임.

그 자리에서 연락한다면 — 거절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나누고 싶기 때문에 연락하는 것이 된다.

 

우유병을 든 할아버지

뉴욕에서 손녀를 돌보던 2주가 있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작은 머리가 내 손에 닿았다. 따뜻했다. 잠깐, 숨을 멈췄다.

나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아기가 잘 먹으면 기뻤다. 배가 불러 고개를 돌리면 — 그냥 병을 내려놓고 함께 쉬었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왜 사역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아기 앞에서는 결과를 나에게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역 앞에서는 건다.

이냐시오는 이 자리를 '불편심(不偏心, Holy Indifference)'이라고 불렀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 냉담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결과에 나를 걸지 않을 때, 비로소 움직임이 가벼워진다. 받으면 기쁘고, 안 받으면 내려놓고 함께 쉬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분별은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냐시오는 분별의 기준을 이렇게 말한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선택인가, 자유함에서 나오는 선택인가.

스스로에게 두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들이 No를 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인가?"

잠시 머물렀다. 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연락할 수 있는가?"

그 순간 — 무게가 달라졌다.

상황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져 있었다.

관상 수련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결과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는 자리를 바꾸는 것.

No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에서 No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 나의 중심과 맞지 않는다"는 자리에서 No 하는 것. 이것도 불편심에서 나오는 선택이다.

 

당신에게도 그 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한 방향만이 아니다.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자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반대도 있다. 두려움 때문에 No를 못 하고 있는 자리도 있다.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관계가 끊길까봐 — 해야 할 No를 삼키고 있는 자리. 이것도 같은 뿌리다.

결과를 나에게 걸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다. 그 자리에서 한 가지만 물어보라.

이것이 어떻게 되든 — 나는 여전히 괜찮은가?

그 질문이 당신을 두려움의 자리에서 불편심의 자리로 조금 옮겨놓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선택하면 된다. 연락해도 좋고, 기다려도 좋다. No를 해도 좋고, 천천히 말을 꺼내도 좋다.

결과는 내 소산이 아니다. 나는 그저 우유병을 내밀 뿐이다.

그리고 그 비어있음 속에서 — 더 근원적인 것이 살아난다.

 

지금 당신이 피하고 있는 한 자리는 어디인가요?

그 앞에서 몸이 긴장되나요, 부드러워지나요?

불편심의 자리에 서면, 무엇이 달라질 것 같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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