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첫 눈

이 왔어요~

2022.12.23 | 조회 402 |
0
|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시험이 끝났고 연말 파티를 했고 개봉한 영화를 이것저것 봤다. <너는><태초 마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두 개의 시를 적었다. 수빈과 함께 서울 시립 미술관을 구경하다 냉라멘을 먹고 딸기 타르트와 로즈 밀크티를 아주 조금 남겼다.

잠을 자고 싶지 않아 늦은 새벽까지 눈 뜨고 있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네 시간만 자고서도 오늘은 아침 열 시까지 깨어있었고 덕분에 긴 시간 오랜만에 내리는 대구의 아침 눈을 만졌다.

눈이 일 년만 일찍 내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한 시간 반 정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 개의 눈사람을 만들었다

집에 들어오니 손이 꽉꽉 얼어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었다면 아마 더 크고 예쁜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셋보다는 둘의 경우가 내게는 조금 더 행복이라는 것을 부여했을 것이다

 

책이 잘 정리된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울타리가 있으면 그곳에 사람을 들여놓을 수도 있고 선 밖으로 사람을 내보낼 수도 있다

선에 대해 다연과 이야기할 때, 다연은 여유가 없으면 선 밖에 사람을 잠시 빼내두는 식으로 자신을 지킨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 두고 중간에 흐릿한 선을 몇 개고 만들어버리는 방식을 곧잘 택한다.

수빈과 우정과 (연애 감정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몇 개월 동안 서로를 옅은 연애 감정으로 대한 적이 있었으나 그 기억은 말 그대로 기억이 되었고

나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꼭 한 번은 수빈을 만나 전시를 본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되는 관계는 내게 특별하다. 서서히 차오르는 느낌. 친구가 되고 싶은 자들은 자기비판적이며 웃긴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다. 배우고 싶은 점이 있어서, 곁에 두고 나도 그만큼 성장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감이 깊기 때문에 가끔 삐걱여도, 관계의 시간을 조금만 갖자, 우리는 타인이니 가끔 서로가 불편한 게 당연하고 그것과 별개로 너를 여전히 매우 사랑한다고, 싸우더라도 안심을 시켜줄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인으로 두고 싶은 자들은 이제껏 모두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밖에서 보았다면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시간 내어 만나지도 않았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넘길 것 같은.

오직 흥미와 설렘, 성애적인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얼마나 윤리적이든 혹은 윤리적이려고 하든 딱히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줄어들어 나쁘다거나 커지니 좋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정과 사랑은 종 자체가 다른 차원의 문제라 분명 어떤 우정은 사랑 같고 어떤 사랑은 우정 같지만, 내게는

사랑 같은 우정(혹은 사랑하는 우정)은 도처에 가득하나, 내가 연애적인 호감을 우정으로 착각해본 적은 (지금까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헤어질 때는 우선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그런 말을 언제나 해왔다.

솔직하자면, 분명 연애 감정이었으나 사랑까지는 아니었던 수빈을 제외하면,

모두 딱히 친구가 되고 싶진 않은 이들을 결국에 좋아해버렸던 것이라, 아니 사실은 모두 핑계고 명분이고 사랑했으니까, 그 고차원적이고 흔하고 유치한 걸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내가 친구로 남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알쓸인잡에 <헤어질 결심>의 작가 정서경이 서래의 결핍이란 사람과 헤어질 수 없다는 것에 있다는 말을 했다.

나의 결핍은, 언젠가 사랑했던 이를 앞으로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보고 싶으나 죽어서 정말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반해, 우리는 죽지 않았고 여전히 이 반투명한 지구 위에 서서

함께 살아있는데 어째서 계속 사랑할 수 없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이별 결핍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표정이 무서워 그전부터 이미 그것을 충분히 상상하고 본 적 없는 얼굴을 되새기는 게 결핍에서 비롯된 나의 버릇이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깨달은 건

시간과 추억과 친구들과 나와 정민의 덕이다.

살아있다는 건 정말 함께 살아있다는 거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는 또 다른 자들과 묶이고 분류되고 사랑하고 친구할 수 있고 확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데

죽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왜 못 보는 거야?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이 있는데, 볼 수 있으나 못 보는 게 존재해? 존재한다면 왜 그런 게 있어

따지는 것이 또한 나의 천성이다

 

 

노란 머리가 지겨워 애쉬 토너를 두 개 주문했다

머리칼이 버텨준다면 노란색을 조금 빼고 싶다

잃어버린 아이펜슬과 똑같은 제품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구매했다

 

내일은 알바 교육을 듣는 날이고 금요일은 울산에 들러 친구들과 밥을 먹고 목욕탕을 가려는데

그때에는 눈사람을 만드느라 얼어버린 손이 조금 녹아있을지 궁금하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에는 새벽까지 일을 하기로 했다

 

너는 나를 데리러 오는 꿈을 꾸고 꿈에서는 내가 잡히니까

깨기 싫어서 오후 늦게까지 잤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래 나는 네가 자란 집을 알고

네가 자주 만나는 친구들의 이름과 각자 그들을 만나 어떤 대화를 하는 지도 안다

아빠를 바라볼 때 네 기분이 어떤지도 안다

 

너는 내가 자란 집 앞 편의점의 개수도 알고

엄마와 내가 싸우는 걸 안절부절 대며 구경하고

엄마가 어떤 식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말하는지를

어느 부분을 이야기할 때 특히 그녀가 우는지를 알고

그래서 너 역시 우리 엄마와 함께 울고 내가 그것을 안절부절못하며 구경하고

우는 엄마와 우는 너를 볼 때 내 기분이 어떤지를 아마 알 것이다

 

그가 그것까지는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충분히 알아도 좋았을 것이다...

 

정말 눈이 일 년만 일찍 내렸다면

강아지처럼 뛰어놀다 눈을 먹고 우리도 언젠가는 시아의 스노맨을 틀어둔 채로 춤추는 영상을 찍어보자며

병약한 자세로 단출하게 누워 노래를 채집할 때

네 정수리가 뭉툭하다는 걸 내가 알았고 그걸 내가 알아서 넌 좋았을까

 

오늘 역시 무언가의 초입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입가에 스테인리스가 묻은 것처럼 피 냄새가 나고 밑빠진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점심 이후에 일어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시간까지 너는 꿈에서 나를 잡고 나는 꿈이니까 잡히고 그건 동시에 내 꿈이기도 한데

세 시쯤 눈을 뜨면 너도 눈을 떴을 테니까

기상 시간을 네가 말한 적은 없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는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것인데

어쨌거나 함께 눈을 봤다면 무지하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연의 버킷리스트>

12/12: 타투 배워보기

12/13: 타국의 주민 되어보기

12/14: 유리공예

12/15: 해리포터 원본 원서 정독

12/16: 영어권 나라의 아주 큰 트리 앞에서 크리스마스 맞이하기

12/17: 가족 만들기

12/18: 포켓몬 고 도감 전부 수집하기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흑심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