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숏숏픽션_웰컴 투 유니버스룸

Play: 오늘 나는 당신의 몸으로 입장합니다

2023.06.16 | 조회 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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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마음

계속해서 읽고 쓰고 싶은 마음으로 띄우는 편지

ⓒ민채씨
ⓒ민채씨

 

손님들은 짧은 사이에 많은 것을 내 가게에 흘려 두고 간다. 자신이 어디에서 왜 왔는지, 이곳에 얼마나 머물며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일을 좋아해왔고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래서 왜 힘든지, 미래에의 바람까지도. 그들은 대개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말함으로써 동력을 얻고 싶어 눈 맞춤을 원하는 눈동자. 그 눈동자를 발견하면 나의 진짜 일도 시작된다.

*

소우주 제작 과정을 배운 뒤로 한동안 일감이 없어 생활이 궁했다. 제작법은 온라인에서 암암리에 찾아낼 수 있었지만, 막상 방법을 익혀도 어떤 식으로 일감을 찾아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지인들이 가진 이야기만으로 제작에 필요한 충분한 재료를 얻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해진 나는 결국 동창 중 제작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루시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루시는 미용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다듬고 가꾸는 동안 루시는 손님들에게 말을 걸었다. 가운 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채 머리에 이런저런 약품을 바른 그들은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루시에게 자기 이야기 혹은 남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루시는 미용실 일이 끝나면 그들에게서 발굴한 소재를 고스란히 복기해 소우주로 만들었다.

루시가 만든 소우주는 우주방으로 꽤 값비싸게 팔려나갔다. VR 장비 같은 걸 갖춘 몇 개의 유리관으로 구성된 우주방은 현실기반의 롤플레잉 서비스를 제공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얼굴과 몸, 삶, 관계로 이루어진 이야기만이 소우주로 만들어져 시스템에서 재생될 수 있었다. 유리관에는 뇌파를 자극하고 온습도와 냄새까지 조절할 수 있는 설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최초의 소우주 시스템은 주로 거동이 불편해 원활하게 바깥 생활을 할 수 없거나 고령의 은퇴 등을 이유로 조직이나 사회적 관계에서 많이 배제되어버린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설비가 비싸 가정에 설치하기 어려운 탓에 시장에서 외면 받았고, 병원이나 요양원에만 일부 설치되는 정도에서 그쳤다가 원하는 이들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우주방이 생겨났다.

순전히 다른 직업이나 성별, 나이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소우주를 겪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주방에 중독되는 이들도 있었다. 실존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삶을 선택해 엿보고 그들의 관계와 마음 한가운데로 간다는 점에서 소우주는 관음증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를 내세워 반대하는 이들의 시위가 거셌다. 결국 소우주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우주방 운영도 물론 불법. 그러나 전면 금지된 뒤부터 오히려 어두운 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

루시는 획득한 이야기를 토대로 해당 인물과 세상의 맥락에 이상이 없게끔 섬세하게 구조를 짜내는 유능한 메이커였다. 불륜이나 배신, 자해 등 지나치게 자극적인 요소만을 구성해 판매하는 메이커들도 있었지만, 루시는 직업윤리에 충실한 편이었다. 대신 루시는 미용실에서 얻어온 부자 인물의 화두를 소우주 곳곳에 심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곤 했다. 그 부유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내 것으로 느껴보세요! 루시가 만든 소우주는 인기가 많았다.

루시 말로는 자기를 가르쳤던 선생은 택시 운전을 발굴원으로 삼았다고 했다.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시간대에 잠깐씩 발굴 작업할 수 있기에 꽤 유용하다고 장점을 덧붙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택시기사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우주 소재를 발굴할 확률이 낮은 편에 속한다고 했다.

그에 비해 미용 기술이 있었던 루시는 고급 미용실에서 일하며 소재를 얻었다. 풍문으로 떠돌던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 혹은 특정 연령대와 성별에서 잘 팔릴 만한 소재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지만, 손끝이 아리거나 눈이 매울 만큼 독한 약품을 다루는 일과 손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머리를 만지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고 했다.

나는 루시의 조언을 받아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우선 꾸리기로 결정했다. 루시 같은 기술도 화술도 없던 내가 택한 건 작은 서점이었다. 미용실이나 택시에서 발굴할 만한 소재보다 조금 더 소수인 이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소 마니악한 소우주만 즐기는 이들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진 재료들로 조용히 집중해서 구조를 짜기에도 좋을 듯했다. 어쩌면 루시보다 더 괜찮은 메이커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가게를 여는 날부터 달떠 손님들을 기다렸다.

*

“혹시 사장님이세요?” 한 중년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네 맞아요.” 눈을 맞추면 손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가 이곳에 흘리고 가는 삶을 남김없이 주워 담는다. 오늘 이곳에서 또 하나의 소우주가 만들어진다. 당신의 지나간 시간, 혹은 지금, 혹은 다가올 날의 이야기가 다시금 재생되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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