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영업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쳤던 어느 날 서울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서 나와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익숙했다.
'어?'
고등학교 친구였다.
"라프야!"
친구는 라프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닌데...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어.. 이상하다. 대구에서 ㅇㅇ여고 다녔던 라프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아.. 네.. 죄송합니다."
사실은 라프도 고등학교 친구의 얼굴을 기억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뿐. 하지만 라프는 자신의 힘들고 지친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모른 척했다.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다. 그런데 잊을만하면 친구를 만났던 이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그냥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프는 뒤늦게 후회했다. 친구를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지만, 수소문을 해서라도 친구에게 그때 미안했다는 말은 꼭 전하고 싶은 라프였다.
'수진아, 미안해. 그때 내 심신이 너무 힘든 시기라, 너를 모른척하고 싶었어. 많이 서운했지? 정말 미안하다.'
사실 라프 인생을 돌아보면 이런 식으로 '회피'했던 순간이 많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피적 대처라고 하는데,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을 말한다.
회피적 대처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나타난다. 친구나 가족, 연인 등의 인간관계를 무시하거나 피하고, 고민되는 일을 미루거나 덮어두기도 한다. 또한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폭식이나 음주, 과도한 수면, 스마트폰 몰입 등으로 현실 회피를 시도하기도 한다. 또한 '나는 괜찮아'라고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이 행동들 중 라프가 어릴 때부터 자주 써왔던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감정을 억누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라프에게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보여도 눈을 감고, 들려도 귀를 닫아버리는 것 말이다.
회피적 대처는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생리적 반응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불안, 공포 반응을 증폭시켜 뇌가 문제를 직면하지 말고 '도망치라'는 반응을 유도하는 편도체의 활성화 그리고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조절 기능이 약화될 때도 이런 충동적 회피 행동이 쉽게 일어난다.
특히 이런 방식으로 뇌가 작동하는 것은 우울증의 특징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순간적으로 친구를 모른 척했던 그때 라프는 회사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의 증상들도 있던 시기였다.
'괜찮아지겠지'
매번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라프는 생각했다. 때로는 이렇게까지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건 꿈이야.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현실의 고통, 부정적인 감정이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계속 라프의 감정을 억누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아질 거야'라는 믿음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심리적으로 손상을 줄 수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독성 긍정' 또는 '비현실적 낙관주의'라 부른다.
감정을 무시하고 억압하게 되면 실제 감정이 해결되지 않고 내면에 억눌리게 된다. 이는 다양한 감정들을 올바르게 소화하지 못하게 만들고, 긍정적인 감정마저도 억누르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기뻐도 표현하지 않기
- 칭찬을 받아도 무덤덤하게 넘기기
- 즐거운 마음을 죄책감처럼 느끼기
이런 것이 반복되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부정적인 자기 대화가 증가하고 자기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삶에 대한 태도 역시 비관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정서적 거리감이 생기고 타인에게 '차갑거나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인간관계는 표면적이 되거나 끊어지기도 한다.
'결국에 다 잘 될 거야'
이렇게 생각만 하고 실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경향도 크다. 즉 현실에 생기는 문제들의 해결마저 회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인 대처 능력을 약화시키고 반복되는 실패를 경험하게 만들며 무기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제 라프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말이다.
'지금 내가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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