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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움의 정치: 될 것 같아야 손을 든다

손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2026.08.05 | 조회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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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lue

유라시아 끝에서 나는 손을 들었다

작년 여름, 포르투갈을 다녀왔습니다. 서핑을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째 미루다가 유라시아 대륙의 끝까지 가서야 첫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작년 포르투갈은 제가 일사병을 한 번 앓을 만큼 더웠고, 해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는데 발바닥이 따갑게 아팠습니다. 물에 들어가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그대로 보드를 끌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보니, 양 발바닥 전체적으로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걸 무시하고 파도를 타다가 물집 하나가 터졌고, 그 이후엔 통증이 심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 때부터 걸어다니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숙소에서 몇 날 며칠을 누워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가장 빠른 비행편으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공항이었습니다. 공항은 걷는 곳이니까요.

예약을 바꾸려고 항공사에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더니, 담당자가 휠체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습니다. 물어볼 생각도 못 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카운터에서 사정을 다시 설명했고, 배정을 기다렸고, 그렇게 포르투와 파리와 인천 세 개의 공항을 휠체어로 통과했습니다. 세 곳 모두에서 직원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게이트까지 밀어 주었고, 다음 공항의 직원에게 저를 인계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 여름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첨부 이미지

그러니까 저는 요청을 했습니다. 이 글이 하려는 이야기는 요청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제 요청이 이상하리만치 싸게 먹혔다는 쪽입니다.

한번 세어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제가 알아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항공사가 먼저 말해 주었으니까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헤매지 않아도 됐습니다. 데스크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진단서를 내지 않았고, 화상 부위를 보여 주지 않았고, 얼마나 못 걷는지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절당할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재량 또는 조직의 선의가 아니었습니다. 유럽연합은 2006년에 만들어 2008년부터 시행한 규정으로, 이동에 제약이 있는 승객에게 공항과 항공사가 무상으로 지원을 제공하도록 의무를 지워 두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은 분명 친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절이 반드시 도착하도록, 그리고 제 요청이 그렇게까지 쌀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것은 설계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내내 조금 창피했습니다. 젊은 여자가 겉보기에 멀쩡한 몸으로 앉아 있고 뒤에서 직원이 밀어 주는 그림이 스스로 어색했습니다. 제 화상은 발바닥에 있었으니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건 착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착각이 어디서 왔는지가 오래 남았습니다. 아무도 증명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저는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제 손상은 몇 주면 낫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곧 표준으로 돌아갈 몸이었고, 그러니 이 경험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문을 열어 주는 것. 여기서 제가 붙들고 싶은 것은 손상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입니다.

요청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값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거의 내지 않았습니다.

 

밀어낸 게 아니라 세지 않았다

개념을 먼저 정확히 세우고자 합니다. 배제와 지움은 다른 일입니다.

배제는 존재를 인정한 채 바깥에 두는 일입니다. 명단이 있고,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름을 뺍니다. 그래서 배제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빠진 사람이 자기가 빠졌다고 말할 수 있고, 항의할 자리가 있고, 숫자로 잡힙니다. 부당하지만 싸움은 가능한 상태입니다.

지움은 다릅니다. 지움은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표면에서 없앱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역이 있으면 그 역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여기까지는 배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외출을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그 역의 이용객 수에 잡히지 않습니다. 수요가 없으니 설비를 넣을 이유도 사라집니다. 그가 그 역을 못 쓴다는 사실은 이제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지움은 그가 지워졌다는 증거까지 함께 지웁니다.

한 가지 차이를 더 붙이면 선명해집니다. 배제에는 선고가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은 이 명단에서 빠졌다고 말한 순간이 있습니다. 지움에는 선고가 없습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없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움을 찾으려면 쫓겨난 사람을 찾으면 안 됩니다. 요청을 그만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될 것 같아야 손을 든다

요청을 그만 둔 사람들은 실제로 셀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세어 보려고 한 조사가 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비수급 빈곤층을 대상으로 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를 신청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비수급 빈곤층이란 소득과 재산이 기준 이하인데도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을 법한데 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다고 답한 경우를 빼면, 가장 많은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19.3%가 선정 기준이 엄격해서 신청해도 안 될 것 같아 신청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이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옆에 있는 숫자입니다. 제도를 몰라서 신청하지 않았다는 답은 1.9%였습니다.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로워서라는 답은 1.3%였습니다.

이 배열을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복지 사각지대를 정보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몰라서 못 받는다고요. 그래서 홍보를 늘리고 안내를 개선합니다. 그런데 조사가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몰라서 신청하지 않은 사람보다, 알면서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예상해서 신청하지 않은 사람이 열 배 많습니다.

여기서 곧바로 나올 반문이 있습니다. 그건 체념이 아니라 정확한 계산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양의무자 기준이나 소득인정액 기준에 실제로 걸리는 사람이라면, 안 될 걸 알고 안 내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고쳐야 할 것은 요청의 문법이 아니라 기준의 높이라는 반박이 성립합니다.

절반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기준이 엄격한 것과 기준이 불투명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같은 연구가 인용한 국제 비교 조사에서, 필요할 때 공적 지원을 받지 못할 것 같다고 답한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을 물었더니 57.6%가 자기에게 수급 자격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탈락할 것이 확실한 사람이 신청하지 않는 것은 효율입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사람이 신청하지 않는 것은 손실입니다. 그리고 그 손실은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제가 더 오래 들여다본 것은 방금 괄호에 넣고 지나간 쪽입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다고 답한 사람들. 소득도 재산도 기준 이하인데 받을 생각이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알려져 있습니다. 수급자라는 이름이 붙는 것 자체가 싫고, 재산과 소득을 전부 열어 보이는 조사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제도는 오랫동안 신청자 본인만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함께 조사했습니다. 내가 신청하면 자식이 부양의무자로 특정되고, 내 형편이 자식에게 전달됩니다. 실제로 부양의무자 기준은 오랫동안 탈락 사유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고, 그 기준으로 탈락한 가구의 대부분은 소득이 최저생계비 아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요청의 값에는 서류와 시간만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수치심과 노출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값이 받게 될 급여보다 비싸다고 판단한 겁니다.

한국 사회가 실패를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데 유난히 익숙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 습관의 청구서가 여기서 날아옵니다. 실패가 내 탓인 사회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일이 곧 내 실패를 인정하는 일이 됩니다. 요청의 값에 부끄러움이 얹히는 겁니다.

앞의 제 이야기와 나란히 놓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될 것 같아서 손을 들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될지 안 될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게 설계돼 있었으니까요. 19.3%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창구가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다만 그 문 앞까지 갔다가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돌아섭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슬이 돌기 시작합니다. 요청하지 않은 사람은 신청자 통계에 없습니다. 신청자가 없으면 수요가 없습니다. 수요가 없으면 예산 근거가 없습니다. 예산이 없으면 사업이 없고, 사업이 없으면 그 사람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됩니다. 아무도 그를 내보내지 않았는데도 그렇습니다.

2014년 송파의 반지하에서 세 모녀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70만 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건이 오래 회자된 이유는 그들이 제도 바깥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제도 안에 있을 수도 있었는데 손을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청에도 자격이 있다

그러면 요청의 값은 무엇으로 치를까요. 제 경험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이 글의 대상이 넓어집니다.

첫째,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기 치매를 가진 사람, 언어를 쓰지 않는 중증 발달장애인은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언어로 조직할 수 없습니다. 요청은 언어 능력을 요구하는 행위인데, 그 능력의 손상이 곧 그가 요청해야 할 이유인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자격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공항에서 느낀 창피함의 정체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증명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증명을 요구받는 사람은 어떨까요. 보이는 손상은 설명이 필요 없고, 보이지 않는 손상은 매번 해명해야 합니다. 만성질환자와 정신장애인이 늘 겪는 일입니다. 이 심사를 몇 번 겪은 사람은 결국 요청 자체를 그만둡니다.

셋째, 절차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장벽이 이쪽입니다. 무인화된 창구, 화면으로만 진행되는 주문, 앱으로만 되는 예약. 한국소비자원이 2020년에 65세 이상 소비자 300명을 조사했을 때, 무인 단말기로 은행 화상 상담을 시도한 사람 열 명 중 여섯 명이 상담 연결에 이르기 전 단계에서 메뉴 선택과 키보드 조작에 어려움을 겪거나 실패했습니다.

이 세 번째 장벽이 특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인 단말기는 누구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그 앞에 서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고, 이용을 거부당한 사람도 없습니다. 실패한 사람은 그냥 돌아섭니다. 몇 번 돌아선 사람이 다음에도 그 창구를 시도할지는 조사에 없지만, 그가 오지 않기로 했다면 그 결정은 어떤 이용 통계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쫓겨난 사람이 없으니 항의할 사람도 없습니다.

영문학을 가르치며 장애학이라는 분야를 연 로즈메리 갈런드톰슨은 사회가 상정하는 표준 인간에 노메이트(normat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장애가 없고, 늙지 않았고,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표준에 평생 완전히 부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나 아프고 다치고 늙습니다. 그런데도 이 실재하지 않는 기준이 무엇이 온전한 인간인지의 경계를 긋습니다.

그런데 제도는 사람을 직접 보지 않습니다. 창구에 도착한 신청서를 볼 뿐입니다. 그래서 제도가 상정하는 표준은 어떤 몸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합니다. 자기 처지를 설명할 언어가 있고, 자격을 증명할 서류가 있고, 화면을 넘길 손이 있고, 거절당해도 다시 갈 여력이 있는 사람.

갈런드톰슨의 표준이 몸의 기준이었다면 이쪽은 절차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둘은 대개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지움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여기까지가 개인의 자리에서 본 그림입니다. 이제 사회의 자리로 한 칸 물러서 보겠습니다. 지움 자체는 거의 모든 사회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방식입니다.

여기서 흔히 헷갈리는 지점이 하나 있어서 먼저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지움의 방식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국가가 했다, 시장이 했다, 이미지 때문이었다, 가족에게 떠넘겼다를 한 줄에 놓고 비교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넷은 같은 층위가 아닙니다. 누가 지웠는가왜 지웠는가는 다른 질문입니다. 축을 나눠 놓으면 훨씬 잘 보입니다.

주체 축은 셋입니다. 국가, 시장, 가족. 누구의 손을 거쳐 사람이 사라지는가입니다.

동기 축도 셋입니다. 통치, 수익, 이미지. 무엇을 위해 사라지게 하는가입니다.

이 두 축을 겹치면 좌표가 생기고, 대부분의 사회는 그 격자의 한두 칸에 몰려 있습니다. 그리고 칸마다 누가 지워지는지가 다르고, 요청의 어느 단계가 막히는지도 다릅니다. 네 칸을 차례로 보겠습니다.

국가 × 통치. 2017년 겨울 베이징에서 외곽 저층 주거지에 화재가 나자 당국은 안전 점검을 명분으로 40일 만에 대규모 철거를 진행했습니다. 지운 주체는 분명합니다. 당국입니다. 지워진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 호적이 없는 이주노동자였습니다. 청소와 배달과 건설을 맡아 온, 도시가 돌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했던 사람들입니다. 동기는 통치였고, 그 동기는 말에 이미 적혀 있었습니다. 저단인구, 곧 낮은 등급의 인구. 학력과 소득이 낮고 이른바 저급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던 이 표현은 행정 문서와 선전 문구에까지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국제적으로 알려지며 논란이 커지자 이 말은 온라인에서 민감어로 분류되어 공적 언어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여기서 순서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먼저 지워졌고 말은 나중에 지워졌습니다. 말을 지운 것은 그렇게 불린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장면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방식이 막는 것은 요청할 신분입니다. 호적이 없으면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이 방식에는 뜻밖의 성질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지웠는지가 보입니다. 권력이 자기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책임의 주소가 분명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직한 방식입니다.

시장 × 수익. 지리학자 닐 스미스는 1970년대부터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연구하면서 통념을 뒤집는 논점을 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취향을 따라 도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먼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운 개념이 임대료 격차입니다. 지금 그 땅에서 걷히는 임대료와, 새로 지어 올렸을 때 걷힐 수 있는 임대료 사이의 틈. 그 틈이 충분히 벌어지면 자본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떠나서 자본이 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와서 사람이 떠납니다.

여기서는 지우는 주체를 지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주는 시세에 맞춰 임대료를 올렸고, 투자자는 수익이 나는 곳에 돈을 넣었고, 행정은 규정대로 허가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보면 어느 것도 딱히 잘못된 판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합이 사람을 없앱니다.

이 칸이 곤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시장을 없애자는 말은 답이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책임을 물을 사람을 찾으면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워지는 사람은 두 겹입니다. 먼저 오래 세 들어 살던 사람과 그 자리에서 장사하던 사람입니다. 이쪽은 그래도 보입니다. 뉴스에도 나오고 항의도 합니다. 덜 보이는 쪽은 그다음입니다. 동네가 비싸지면 그 동네에 있던 싼 것들이 먼저 사라집니다. 저렴한 밥집, 오래된 세탁소, 값싼 여인숙, 동네 목욕탕. 이 시설들에 기대어 그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임대 계약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쫓겨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갈 곳이 없어져서 없어집니다.

이 방식이 막는 것은 요청할 상대입니다. 명령이 없으니 명령한 사람도 없고, 책임이 수백 개의 작은 결정으로 흩어져서 항의하려 해도 겨눌 대상이 흐릿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기서 무너집니다. 첫 번째 방식은 명시적으로 잔인하고, 두번째 방식인 이 방식은 익명성에 숨어 잔인합니다.

국가 × 이미지. 싱가포르의 정원 속의 도시라는 국가 브랜드는 실제로 대단히 잘 작동하는 도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화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화면 밖으로 옮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워진 사람은 저숙련 이주노동자입니다. 약 20만 명이 43개의 대형 기숙사에 살았고, 그 기숙사는 주요 주거지역이 아니라 도시 외곽 공업지역에 있었습니다. 한 방에 네 명에서 스무 명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2020년 봄 이 기숙사들에서 집단감염이 터지고 나서야 이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방역 모범국이라 불리던 나라의 확진자 대부분이 그 화면 밖에서 나왔습니다.

이 칸의 특징이 여기 있습니다. 이 지움은 사람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 도시를 짓고 청소하는 20만 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우지 않되 보이지 않는 자리에 둡니다. 그래서 이 방식이 막는 것은 요청의 정당성입니다. 문제가 없는 곳(현실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망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한국입니다. 한국이 특이한 것은 어느 칸에 속해서가 아니라 여러 칸을 동시에 쓰기 때문입니다.

국가 × 이미지 칸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은 도시미화라는 이름으로 판자촌을 철거했습니다. 성화 봉송로에서 보이는 집들이 특히 표적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부랑인 단속이 강화됐고, 거리에서 눈에 띄면 데려가는 대상에는 걸인과 노숙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내진 곳이 부산의 형제복지원 같은 수용시설이었습니다. 1975년 내무부 훈령으로 만들어진 이 단속 체계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강화됐고, 수용 인원도 그때 늘었습니다. 여기서도 막힌 것은 요청의 정당성이었습니다. 국가적 행사의 성공이라는 서사 앞에서 개인의 항의는 부당함의 호소가 아니라 발목잡기가 됩니다.

시장 × 수익 칸은 IMF 외환위기 이후 그 위에 두껍게 얹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유독 두꺼운 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족 × 이미지. 돌봄을 가족 안으로 밀어 넣어 집에서 처리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정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 이 칸의 동기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비용이기도 합니다. 가족이 감당하는 돌봄은 예산에 잡히지 않습니다.

지워지는 사람도 두 겹입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먼저입니다. 중증 장애인, 치매를 가진 노인, 정신질환자. 그리고 돌보는 사람이 그다음입니다. 대개 여성이고, 그들도 일에서 관계에서 조금씩 사라집니다. 이쪽은 아파서 사라진 것도 아니라서 어떤 통계로도 잡히지 않습니다.

이 칸이 막는 것은 요청의 체면입니다. 밖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곧 우리 집이 감당하지 못했다는 고백이 되기 때문에, 요청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그런데 이 칸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과 가족이 작동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행정은 서류에 가족이 적혀 있으면 그 가족이 돌본다고 전제합니다. 앞에서 본 부양의무자 조사가 그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제가 사실인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순간이 있긴 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입니다.

2021년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신고된 무연고 사망자 가운데, 연고자가 있는데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한 경우가 74.1%였습니다. 이 비율은 2021년 70.8%에서 2025년 75%로 오르는 중입니다.

이 거부를 부끄러움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그 뒤에 있는 것은 대개 폭력과 학대, 반복된 채무 갈등, 수십 년의 단절처럼 이미 남이 되어 버린 관계입니다. 그리고 장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들에게 가족은 오래전부터 없었습니다. 서류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통계가 보여 주는 것은 가족의 냉정함이 아니라 전제의 허구입니다. 제도는 가족이 받아 줄 것이라 믿고 요청 창구를 좁게 열어 두었는데, 그 가족은 이미 거기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일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디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죽고 나서야 숫자가 됩니다.

이 격자를 다 그리고 나면 한 문장이 남습니다. 중국은 요청할 신분을 없애고, 한국은 요청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앞의 방식은 누가 했는지가 보이고, 뒤의 방식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앞에서 본, 받을 자격이 있는데도 받을 생각이 없다고 답한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세지 않는 것은 계획에 없다

이 사슬이 정책에서 어떻게 굳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서울의 접근성 통계입니다.

서울이 얼마나 좋은 도시인지부터 숫자로 보겠습니다.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337개 역 기준으로 엘리베이터 설치율은 99.4%이고, 출입구에서 승강장까지 도움 없이 갈 수 있는 이른바 1역사 1동선이 확보된 역은 320개로 95%입니다. 저상버스 도입률은 2024년 기준 71%로, 전국 평균 44.4%를 크게 웃돕니다. 서울시는 이 수치가 런던이나 뉴욕, 파리보다 높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이제 이 숫자들이 무엇을 재고 있는지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재지 않는지도요. 빠진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 숫자들은 요청의 값을 재지 않습니다.

1역사 1동선이 95%라는 말은 뒤집으면 나머지 열일곱 개 역에는 그 동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역에서 층을 옮기려면 계단에 설치된 휠체어 리프트를 씁니다. 그런데 이 리프트는 혼자 타는 물건이 아닙니다. 호출 버튼을 눌러 역무원을 부르거나, 콜센터나 역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야 합니다.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직원이 조작해 주는 동안 경보음이 울립니다.

엘리베이터라고 값이 0인 것은 아닙니다. 한쪽 출구에만 있어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역이 많습니다. 저상버스는 더 분명합니다. 휠체어로 타려면 기사가 슬로프를 펴 주어야 하고, 그동안 버스는 서 있고 뒤에 탄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도입률 71%가 재는 것은 그런 버스가 몇 대인가이지 타는 데 무엇이 드는가가 아닙니다. 다만 지하철 역사 내의 리프트는 그 값이 훨씬 비쌉니다. 부르지 않으면 아예 움직이지 않고, 부르는 순간 그 요청이 공개됩니다. 전화를 걸고, 이름을 대고, 기다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경보음과 함께 옮겨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접근성 통계에서 이 둘은 같은 칸에 들어갑니다. 갈 수 있는가만 묻고, 가기 위해 무엇을 치러야 하는지는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값을 세는 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극단에서는 그 요청 자체가 위험했습니다. 2017년 10월, 전동휠체어를 타던 한경덕 씨가 신길역 1호선과 5호선 환승 구간에서 리프트 호출 버튼을 누르려다 계단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왼팔을 쓸 수 없어 오른팔로만 눌러야 했는데, 버튼 위치가 정면으로는 닿지 않는 곳이라 휠체어를 돌려 계단을 등지고 누르려 했습니다. 돌릴 공간이 부족해 앞뒤로 움직이기를 반복하다 추락했습니다. 98일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2018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법원은 추락 위험이 큰 자리에 호출 버튼을 두고 방지 장치를 갖추지 않은 것을 설치상의 하자로 보고 서울교통공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으며, 항소심도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신길역에는 그 뒤에 엘리베이터가 놓였습니다.

이 사건이 이 글의 맥락에서 뼈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요청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청하려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나기 전까지, 신길역은 접근 가능한 역으로 세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도 요청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데스크까지 걸어가 사정을 말하고 기다렸습니다. 두 요청의 차이는 의지나 태도가 아니라 값(가격)입니다. 그리고 그 값을 정한 것은 요청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자리를 설계한 쪽입니다.

둘째, 이 숫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손상만 잽니다. 엘리베이터, 동선, 저상버스. 전부 바퀴가 지나갈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다시 말해 규격으로 환산되고 도면에 그려지는 손상만 항목이 됩니다. 제 발바닥의 화상이 그랬듯, 눈에 보이지 않는 손상은 애초에 잴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면에 그려지지 않는 손상은 어떻게 될까요.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경사로가 아니라 쉬운 말로 쓰인 안내와 예측 가능한 절차입니다. 치매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길을 잃었을 때 이상하게 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서울의 어떤 접근성 통계에도 인지장애 항목은 없습니다. 세지 않는 것은 계획에도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배리어프리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램프와 엘리베이터는 필요하고, 여전히 부족하고, 그것을 깐 사람들의 노력은 폄훼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포용의 전부로 셈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듯한 반박이 하나 있습니다. 램프가 먼저인 것은 순서의 문제 아니냐는 것입니다. 경사로는 규격이 명확해서 설계하고 시공하고 검수할 수 있지만, 인지장애 지원은 무엇이 충분한지부터 합의가 어렵고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 듭니다. 그러니 서울은 다른 것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늦은 단계에 있을 뿐이라는 반박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순서라면 다음 순서가 준비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어떤 지표에도 그 항목이 없다는 것은 다음 순서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셀지가 선택이라는 것은 다르게 센 사례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일본은 2006년 배리어프리법을 만들면서 마음의 장벽이라는 항목을 정책 언어에 넣었고, 인지장애를 도시 설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물리적 접근성만 놓고 보면 서울이 도쿄를 앞섭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무엇을 세기 시작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을 위한 말도 결국 요청이다

여기서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목소리를 낸 사람들 덕분에 바뀐 것이 아주 많습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도, 저상버스도,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접근성 대부분이 누군가가 오랫동안 요구해서 생긴 것입니다. 저는 그 성과를 조금도 깎아내리고 싶지 않고, 이 글이 그 요구를 겨누는 것으로 읽히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겨누고 싶은 것은 요구한 쪽이 아니라 듣는 쪽의 문법입니다. 우리 사회는 요청이 도착했을 때만 그 필요를 인정합니다. 가시성, 재현, 목소리, 당사자성. 이 어휘들은 나타나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전제로 작동합니다. 그러니 요구하는 사람이 아무리 크게 말해도, 애초에 요청의 값을 치를 수 없는 사람의 몫은 그 요구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담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요청받은 것만 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신 말해 주면 될까요?' 저는 이 처방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변도 결국 요청입니다. 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하는 순간 그는 다시 한번 말하지 못하는 자로 규정되고, 그를 대신할 자격은 잘 말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무대는 그대로 두고 대역만 세우는 일입니다. 더 큰 목소리도 답이 아니고, 빌려준 목소리도 답이 아닙니다.

 

요청의 값을 누가 내는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제 앞에 구멍이 하나 보입니다.

그러면 요청의 값을 개인에게서 덜어 내면 되겠다고 말하고 싶어지는데, 그건 누가 합니까. 결국 누군가 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청의 값을 못 치르는 사람은, 자기 요청의 가격을 낮춰 달라는 요청도 할 수 없습니다. 악순환입니다.

저는 이 순환에서 깔끔하게 빠져나갈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방을 길게 쓰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제가 붙들고 있는 생각 하나는 적어 두겠습니다.

자격을 좁게 그리면 증명이 까다로워집니다. 그런데 그 까다로움은 심사에서 떨어진 사람에게만 남지 않습니다. 소문이 돌고, 옆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어차피 안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만들어집니다. 앞에서 본 19.3%가 그렇게 생깁니다.

좁게 그린 자격은 심사에서 사람을 떨어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심사장에 오지 않을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오지 않은 사람은 탈락자로도 세어지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가 반대편 사례입니다. 유럽연합의 그 규정은 발바닥에 화상을 입은 서퍼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상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조문이 이동에 제약이 있는 승객이라고만 적어 두었기 때문에 저에게도 왔습니다. 장애 등록증 소지자라고 적혀 있었다면 저는 그 휠체어를 받지 못했을 겁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도 같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이동권을 요구한 사람들이 싸워서 얻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앞에는 그 싸움에 나서지 않았던 사람들이 훨씬 많이 서 있습니다. 캐리어를 끄는 여행자,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은 사람, 짐수레를 미는 노동자. 유모차를 미는 부모와 무릎이 아픈 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할 자격이 없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과는 함께 씁니다. 얻어 낸 사람들만의 시설로 설계되지 않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순환에서 나가는 길이 있다면, 대신 말해 주는 쪽이 아니라 말한 사람이 얻어 낸 것의 문턱을 낮게 그리는 쪽에 있을 겁니다.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만든 것이 그들만의 몫으로 남지 않게 하는 일. 저는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포르투갈에서 겪은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요청을 했습니다. 다만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제가 알아낼 필요가 없었고, 데스크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고,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고, 거절을 각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네 가지를 누군가는 이미 치러 놓았습니다. 저를 밀어 준 직원들의 친절이 아니라, 그분들이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둔 규정이 치렀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은 사람이고, 요구할 것은 설계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척도를 하나만 바꿔 보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회가 포용적인지 물을 때 우리는 보통 얼마나 잘 보이게 했는가를 봅니다. 경사로가 몇 개인지, 프로그램이 몇 개인지, 신청자가 몇 명인지.

요청이 가장 비싼 값을 치르게 되는 사람에게도 도착하는가.

이건 정책을 만드는 사람만 쓸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어떤 숫자를 보든 그 숫자는 온 사람만 셉니다. 이용객 수도, 신청자 수도, 만족도 조사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표를 볼 때 채워진 칸보다 누가 이 표에 들어올 수 없었는지를 먼저 물어보는 것,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얻은 것은 사실 그 습관 하나입니다.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리가 아니라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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