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을 쓰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
패권은 규칙을 쓰는 힘이고, 2026년 그 자리는 세 곳에서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규칙을 쓰는 자리
1945년, 전쟁이 끝났다. 이긴 나라들이 모여 새 질서를 짰다. 돈은 어떻게 돌리고, 무역은 어떤 규칙으로 하고, 분쟁은 어디서 다투는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서고, 관세와 무역의 규칙은 훗날 세계무역기구(WTO)로 정리됐다. 다만 이 규칙이 처음부터 온 세계의 규칙이었던 것은 아니다. 냉전 동안 세계는 둘로 갈려 있었다. 서방 진영의 규칙은 미국이 썼고, 동구권에는 소련이 쓴 규칙이 따로 돌았다. 두 문법이 40년을 나란히 버텼다. 판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다. 그때부터 미국이 쓰던 규칙이 사실상 세계의 규칙이 됐다.
여기서 흔한 착각을 하나 걷어내야 한다. 20세기 후반 미국이 패권을 오래 쥔 것은 가장 강해서가 아니라 규칙을 썼기 때문이다. 힘이 한 번 규칙으로 굳으면, 그 힘을 매번 꺼내지 않아도 된다.
규칙은 하나가 아니었다. 분쟁의 문법을 정하는 국제법이 있고, 무엇을 어떤 조건으로 사고팔지 정하는 무역 규칙이 있고, 그리고 페트로달러가 있었다. 석유가 주로 달러로 거래되면서 세계는 달러를 쌓아 둬야 했고, 미국은 사실상 종이를 찍어 실물을 사 올 수 있었다. 어느 것도 조약으로 강요된 명령이 아니다. 그런데 대체로 그렇게 굴러갔다. 따르는 편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자리의 정체를 알아봤다. 눈여겨볼 것은 중국이 이 규칙 체계를 통째로 부수려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법도, 무역 기구도, 달러 체제도 당장 갈아엎기보다, 그 안에서 규칙을 쓰는 자리를 조금씩 자기 쪽으로 당겨 온다. 개발도상국에 도로와 항만과 차관을 얹어 다가가고, 국제기구에 자국 인사와 표준을 밀어 넣고, 위안화 결제망을 넓힌다. 질서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중심을 자기에게로 옮겨, 세계를 다시 자기를 축으로 짜려는 움직임이다.
그러니 패권 다툼의 본질은 누가 더 세냐가 아니다. 누가 규칙을 쓰느냐다. 그리고 이 패턴은 국가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업에도 똑같이 있다. 거기서는 규칙을 '표준'이라 부른다.
표준을 쥔 자
윈도우를 쓰라고 명령한 정부는 없다. 그런데 관공서의 문서도, 회사의 회계도, 학교의 행정도 그 위에서 돈다. 운영체제는 윈도우, 그 안의 칩은 인텔이라는 조합이 오랫동안 사무실의 기본값이었다. 한번 그 위에 생태계가 얹히면 벗어나는 것도, 그 힘을 재편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다.
왜 못 벗어나나. 나 혼자 바꿔서는 손해만 나기 때문이다. 국내에 좋은 예가 있다. 2023년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됐다. 법령과 행정과 계약에서 나이는 전부 만 나이로 통일됐고, 제도 전환은 사실상 완료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나이를 말할 때 쓰는 수는 그대로다. 이유의 핵심은 호칭에 있다. 우리는 세는 나이를 기준으로 형과 누나와 동생을 정하고, 그 위에 말투와 서열을 얹어 살아왔다. 나 혼자 만 나이로 말하는 순간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가 헝클어진다. 혼자 바꿔서 얻는 것은 없고 치를 혼란만 있다. 법이 약해서가 아니다. 법은 100% 관철됐다. 관철되지 않은 것은 다 같이 한 번에 움직여야만 움직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표준의 진짜 성질이 드러난다. 법은 정부가 관철할 수 있어도, 무엇을 실제로 쓸지는 시장이, 사람들이 채택해야 정해진다.
표준의 힘이 여기 있다. 어기면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호환이 안 된다. 감시할 집행자가 필요 없다. 시장에서 알아서 잘려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준 경쟁의 시간 단위는 분기가 아니라 세대다. 엔비디아의 CUDA를 보면 분명하다. 어떤 조약에도 없고 어떤 정부도 명령한 적 없는데, 전 세계 AI 개발이 그 위에 서 있다. 진짜 비용은 코드를 옮기는 값이 아니다. 그것으로 훈련받은 엔지니어 수십만 명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값이다. 대학 강의와 채용 공고와 신입의 첫 석 달이 전부 거기 얹혀 있다.
그런데 표준은 돈으로도, 국가의 명령으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2006년 중국은 자국이 만든 3세대 이동통신 표준을 의무화하고 최대 통신사에 강제했다. 동기는 분명했다. 외국 특허권자에게 나가는 라이선스료, 즉 남의 규칙에 내는 임대료를 끊으려는 것이었다. 실패했다. 상용화가 늦었고, 경쟁 표준보다 느리고 불안정했으며, 단말 제조사가 붙지 않았다. 명령은 표준을 지정할 수 있어도 생태계를 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반대 장면도 있다. 중국의 검색은 구글이 아니라 바이두이고, 메신저는 왓츠앱이 아니라 위챗이며, 전자상거래도 자국 플랫폼이 장악했다. 바깥 표준을 그대로 들이는 대신 자기 생태계를 따로 세웠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차이가 무엇이었나. TD-SCDMA에는 없고 여기엔 있던 것, 바로 그 생태계를 떠받칠 만큼 거대한 내수 시장이다. 명령이 만들지 못한 것을 시장의 크기가 만들었다.
그러니 국가에게 남는 수단은 명령이 아니다. 시장을 만들거나 사주는 것이다. 규칙으로 굳히려면 먼저 충분한 수요를 깔아 줘야 한다. 우리가 산업정책이라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이 사실 이것이다.
아직 규칙이 안 굳은 곳, AI
지금 AI는 표준이 정해진 세계가 아니다. 규칙을 만들어가는 도중인 경쟁이다. 그래서 최근 두 장면이 이상하게 보인다.
2025년 12월,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 H200을 중국에 파는 것을 허용했다. 앞선 행정부가 막아 둔 것을 되돌린 결정이었고, 그 매출의 4분의 1을 미국 정부에 낸다는 조건이 붙었다. 중국 기업들이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 정부가 그 주문을 멈춰 세웠다. 거절은 아니었다. 어떤 조건에서 들일지 정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그 사이 기업들이 미리 쟁여 두는 것을 막겠다는 지시였다. 성능은 아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살 수 있는 시간에 사지 않았다.
2026년 7월, 중국의 문샷AI가 새 모델 Kimi K3를 내놓고 며칠 뒤 가중치를 공개했다. 파라미터 2조 8천억 개, 공개된 모델 가운데 가장 크다. 가중치를 공개한다는 것은 누구든 이 모델을 받아다 자기 서버에서 마음껏 돌려도 좋다고 무료로 내주는 것이다. 이걸 만든 돈은 회수 계획이 없고, 한 번 풀린 가중치는 되돌릴 수 없다.
두 장면 다 당장의 돈을 포기했다. 더 큰 것을 쥐기 위해서다. 누가 더 센가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걸려 있는 것은 성능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무엇 위에서 자라는가이기 때문이다. 공짜로 내주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습관이다. 먼저 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번다. 이걸 덤핑과는 다르다. AI의 무료 공개는 그것과도 다르다. 값을 후려친 것이 아니라 아예 거저 깔아 습관을 고착시키는 것이고, 되돌아올 회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것을 공짜로 깔아 두고 그 위에서 팔 것을 따로 가진 쪽의 전략에 가깝다. 인쇄기를 나눠 주고 잉크를 파는 쪽이다.
국가가 여기 왜 돈을 쓰는지도 이제 보인다. 2026년 7월 시진핑은 상하이에서 각국에 오픈소스 협력을 권했고, 열흘쯤 뒤 문샷이 가중치를 풀었으며 알리바바도 자사 모델의 무료 공개를 발표했다. 정부가 시켰다고 쓰면 근거 없는 단정이다. 확인된 것은 지시가 아니라 정렬이다. 정책과 기업의 행동이 같은 방향을 향한다는 것, 앞에서 말한 '시장을 사주는 선점 지원'의 모습이 지금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까지가 정확한 진술이다.
다만 공짜가 이겼다고 말하기엔 이르다. 미국 싱크탱크가 추적하는 국가 AI 프로젝트 지표를 보면, 기반 모델을 고른 정부 가운데 40%가 메타의 라마를 택했고 중국 무료 모델을 택한 곳은 없었다. 무료 모델이 1년 넘게 존재했는데도 그렇다. 점령을 결정하는 것은 성능도 가격도 아니라 신뢰이고, 신뢰는 락인보다 느리게 쌓인다. 그래서 AI의 규칙은 지금 쓰이는 중이다. 아직 아무도 다 쓰지 못했다.
방향만은 분명하다. 누군가 끝내 그 습관을 깔아 버리면, 그 자리는 총 한 발 없이 넘어간다. 곧 이어 볼 폭력은, 습관을 미처 깔지 못한 자리에서만 터진다.
규칙이 안 먹히면 일어나는 일
규칙을 쓰는 힘이 그 자리에 있으면 총이 필요 없다. 없으면 총이 나온다.
2026년 2월 28일, 테헤란에 공습으로 시작된 미국 이란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2026년 8월 17일 기준) 이란이 핵합의를 이행하지 않았고, 핵 농축 중단을 촉구하는 미국의 '통제'가 실효성이 없자, 폭력의 형태인 공습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도 순서가 같다. 러시아의 세력권 안에 남아 중립을 지키라는 요구, 이것 역시 통제였다. 우크라이나가 그 세력에서 벗어나려 하며 통제를 거부하자 러시아는 침공했다. 여기서 인과를 정확히 봐야 한다. 규칙을 제시했는데 상대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규칙으로 상대를 통제하던 힘이 약해졌다는 신호다. 말이 더는 먹히지 않으니 말 대신 총을 꺼낸다. 폭력은 힘이 세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던 힘이 빠진 자리를 메우려고 나온다.
그러니 폭력은 힘의 과시가 아니다. 규칙이 더는 먹히지 않는다는 자백이다.
여기서 익숙한 논의 하나를 다시 놓아 보자. 떠오르는 세력과 저무는 세력이 부딪치면 전쟁이 예정돼 있다는 이야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규칙제정권의 렌즈로 보면 그 속이 더 선명해진다. 저무는 쪽은 기존 규칙으로 떠오르는 쪽을 계속 통제하려 하고, 떠오르는 쪽은 규칙을 새로 쓰고 싶어 한다. 부딪히는 지점은 세력의 크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규칙을 쥔 손이다. 세력전이가 전쟁의 겉모습이라면, 규칙제정권 다툼은 그 이면이다.
규칙을 써도 패권이 아닐 때, EU
규칙제정권을 쥐었다고 패권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유럽연합이 그 산 증거다.
EU는 규제를 통해 규칙제정권을 가져갔다. 개인정보 보호 규정이 대표적이다. 유럽이 기준을 세우자 세계 기업들이 그 기준을 전 세계 서비스에 적용했고, 한동안 그것이 사실상의 세계 표준이 됐다. 왜 맞췄나. 예전의 EU가 거대한 소비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장에서 잘리지 않으려면 그 규칙을 따라야 했다. EU의 규칙을 실제로 받쳐 준 것은 규제라는 문서가 아니라 그 뒤에 있던 시장이었다. 물론 소비력이 있다면 규칙 제정권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리하기는 하다. 규칙을 받치는 지반은 기술일 수도, 통화일 수도, 군사력일 수도 있다. EU는 그 지반이 하필 소비 시장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소비력이 약해졌다. 이제 EU가 규제를 내놓아도, 그 파급력이 이전과 같지 않다. 오히려, EU AI act 등이 화제는 되지만, 이보다는 미국과 중국의 AI 경쟁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난번에 나눴던 물음이 모인다. 패권을 가지려면 기술과 규칙제정권을 함께 쥐어야 하는가. EU가 그 답을 보여준다. 규칙제정권은 홀로 서지 못한다. 뒤에 기술이든 시장이든 통화든, 따르지 않으면 손해를 보게 만드는 실물 지반이 있어야 규칙이 규칙으로 산다. 미국은 규칙과 달러와 기술을 함께 쥐어서 오래 갔고, EU는 규칙만 남아 흔들린다. 중국이 AI에서 습관을 공짜로 깔려는 것도 결국 규칙 이전에 지반부터 깔겠다는 움직임이다.
한 가지는 짚고 가야 한다. 규칙이 지켜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키는 이유는 동의일 수도, 바꾸는 비용이 커서일 수도, 시장에서 잘릴까 봐일 수도 있다. EU의 규칙이 흔들리는 것은 바로 그 '잘릴까 봐'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지반이 빠지면 순응도 빠진다.
그래서, 2026년의 규칙제정권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다. 규칙이 설득으로 굴러가는 동안이 가장 싸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으면 집행자조차 필요 없어진다.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데 아무도 벗어나지 않는 상태, 그것이 규칙을 쓰는 힘의 정점이다. 설득도 습관도 안 될 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힘이다.
2026년은 그 국면들이 한꺼번에 보이는 해다. AI에서는 규칙이 지금 쓰이는 중이고 아직 아무도 다 쓰지 못했다. 이란과 우크라이나에서는 통제하던 규칙이 무너져 총이 나왔다. EU에서는 규칙이 실물 지반을 잃고 종이가 됐다. 규칙을 쓰는 자리가 새로 열리고, 무너지고, 실효를 잃는 일이 같은 해에 겹쳐 있다.
그래서 누가 규칙을 쓰는가가 중요하다. 규칙을 쓰는 자리에 앉는 것과, 그 자리를 받칠 지반을 함께 쥐는 것. 이 둘이 맞을 때만 패권이 오래간다. 힘을 꺼내야 하는 순간은 권위의 정점이 아니다. 균열의 시작이다. 원칙을 말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때 목소리를 높이는 쪽이 있다.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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